5/2/2021 |
부활절이 지나고(4) (After Jesus’ Resurrection)
김태환 목사
누가복음 24:28-35
28 그들이 가려고 했던 엠마오 마을에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곳보다 더 멀리 가려 하셨습니다. 29 제자들은 예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저녁 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와 함께 묵으십시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머무시려고 들어가셨습니다. 30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식사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순간, 예수님께서는 사라지셨습니다. 32 그들이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불타는 것 같지 않았는가?” 33 그 두 제자가 일어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거기에 열한 제자들과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34 이들이 말했습니다. “주께서 정말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시몬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35 그러자 두 제자들도 길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쉬운성경)
28 By this time they were nearing Emmaus and the end of their journey. Jesus acted as if he were going on, 29 but they begged him, "Stay the night with us, since it is getting late." So he went home with them. 30 As they sat down to eat, he took the bread and blessed it. Then he broke it and gave it to them. 31 Suddenly,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And at that moment he disappeared! 32 They said to each other, "Didn't our hearts burn within us as he talked with us on the road and explained the Scriptures to us?" 33 And within the hour they were on their way back to Jerusalem. There they found the eleven disciples and the others who had gathered with them, 34 who said, "The Lord has really risen! He appeared to Peter." 35 Then the two from Emmaus told their story of how Jesus had appeared to them as they were walking along the road, and how they had recognized him as he was breaking the bread.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말씀은 유명한 ‘엠마오로 가는 두 나그네’ 이야기입니다. 누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분명한 사실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에게 보이셨고, 여자들에게 보이셨고, 게바에게 보이셨고, 열 두 제자에게 보이셨고, ‘오 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보이셨고, 바울에게 보이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4-8). 바울은 이 말씀을 하면서 사도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 나 같은 사람에게도 나타내 보이셨다고 감격합니다. 아마도 이런 감격이 바울로 하여금 사도로서 책임과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한 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서 예정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성경에 기록된 대로(just as the Scriptures said)’ 혹은 ‘성경 대로’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 수차례 이 말이 등장합니다.
하바드 법대를 창립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인 사이몬 그린리프(Simon Greenleaf, 1783- 1853, 미국, lawyer and jurist)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나중에는 강력한 기독교 변증론자(Christian Apologist)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A person who rejects Christ may choose to say that I do not accept it, he may not choose to say there is not enough evidence(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결코 충분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Either the men of Galilee were men of superlative wisdom, and extensive knowledge and experience, and of deeper skill in the arts of deception than any and all others, before them or after them, or they have truly stated astonishing things which they saw and heard(갈릴리 사람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최고의 지혜와 지식과 경험, 그리고 속임수의 전문가들이거나 아니면 그들이 보고 들은 놀라운 것들을 정직하게 진술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물론 12제자 중에 속했던 사람들은 아니지만, 바로 며칠 전까지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Cleopas)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17절)’이 역력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터벅터벅 ‘엠마오’가 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약 11km 떨어진 작은 마을입니다. 걸어서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의 고향이 ‘엠마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과 함께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 두 사람의 눈이 가리워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16절)”라고 썼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슬픔과 절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고요. 하지만,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But God kept them from recognizing him(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가리워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보다 극적으로(dramatically)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도록 해서 이 두 사람을 부활의 증인으로 사용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이 그림을 한번 보십시오. 이 그림은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1832-1883)가 그린 ‘The Walk to Emmaus(엠마오로 가는 길)’라는 제목의 그림(목판화)입니다. 저 멀리 그들의 목적지인 엠마오가 보입니다. 예수님은 뭔가 열심히 말씀을 하시고,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장면입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세 사람의 뒤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귀스타브 도레는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다고 합니다. 도레는 15살 때 이미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책에 삽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가 한창 유명했을 때는, 웬만큼 사는 집에서는 모두 귀스타브 도레의 그림을 하나씩 집에 걸어 놓았다고 합니다. 고흐나 피카소 같은 화가들도 귀스타브 도레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를 정작 유명하게 만든 것은 241점의 삽화를 그려 넣어 만든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성경’이었습니다. 영화 ‘십계(1962)’의 제작자는 도레의 그림를 참고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도레의 판화 성경은 유명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들의 고향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 헨리크 샌케비치 (Henryk Sienkiewicz, 1846-1916, 폴란드)가 쓴 ‘쿼바디스 (Quovadis)’라는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샌케비치는 이 책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1951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다시 2001년에 ‘쿼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 되어 나왔습니다.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는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들어가는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 때 당황한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그 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내 양을 버리고 온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려고 한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베드로는 다시 가던 길을 돌이켜 로마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성경에는 없는, 외경(外經, Apocrypha) ‘베드로행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 엠마오로 가고 있었을까요? 이 두 제자에게 예수님은 ‘행동과 말씀에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 보낸 예언자’였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대와 꿈이 산산조각이 난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 이유가 없었습니다. 어찌 예루살렘을 떠난 제자들이 이 두 사람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으로 절망한 다른 제자들도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두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여자들의 말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믿지 않고, 모든 것을 체념한 채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과 함께 동행하시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 답답하십니다. 어찌 두 분은 예언자들의 글을 믿지 않으십니까? 예언자들의 글에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그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25-26절)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예언자들을 들어 가면서 예수님에 관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귀스타브 도레의 그림은 바로 이 장면을 포착해서 그린 것입니다.
이미 날이 많이 저물었습니다. 두 사람의 권유로 예수님은 인근 여관에 이들과 같이 묵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 자리에서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모습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과 똑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uddenly,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And at that moment he disappeared!” (31절)
이 그림을 한번 보세요.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 네델란드)가 그린 ‘The Supper at Emmaus(엠마오에서의 저녁 식사)’라는 그림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이 늘 그렇듯이 이 그림에서도 빛과 어두움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관 주인으로 보이는 부부가 식탁에 잔을 내려 놓고 있는 것을 보아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되기 전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손에 빵을 쥐고 빵을 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 반쪽은 빛으로, 반쪽은 그늘져 있습니다. 앞에 앉아 떡을 떼시는 분이 점점 예수님으로 인식이 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인 것 같습니다. 왼쪽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제자는 뒷모습만 보입니다. 나머지 한 제자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면서 뒤로 물러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식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한 경험이 두 제자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두 사람의 고향이 바로 코 앞인데, 두 사람은 그 밤으로 예루살렘으로 달려갔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within the hour they were on their way back to Jerusalem.” (33절) 한 시간이 못되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얘기를 주고받습니다. “길에서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지 않았습니까?”(32절) 슬픔과 절망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두 사람을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만져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고, 치유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빌 게이더(William James Gaither)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은 본래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였는데요. 작사, 작곡에 재능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주님을 영접한 후에 영어 교사를 그만두고 찬양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모두 6번(1973, 1975, 1991, 1999, 2001, 2008)의 Grammy Award를 받습니다.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쓴 대표 곡 중에 우리가 많이 부르는 ‘살아 계신 주(Because He Lives)’가 있습니다. 이 곡 외에도 800여곡 이상의 찬양곡을 썼는데요. 그 중에 1964년에 쓴 ‘He Touched Me(그가 나를 만지셨네)’라는 찬양 곡이 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가 이 곡을 부르면서 이 곡은 대중들에게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이 곡으로 1972년에 Grammy Award Artist 상을 받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한 때 교회에서 찬양대원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빌 게이더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당신의 꿈이 산산조각 났을 때, 희망이 다 사라졌을 때, 아무 데도 갈 곳 없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에는 언제나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하시는 분께 달려가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은 나의 계획보다 더 크고 위대하십니다!”
험한 나그네 세상 길 나의 맘이 곤할 때/사랑스런 주의 손길 오 나의 맘을 두드리네
주 붙드네 오 날 붙드네 넘치는 기쁨 내 맘에/근심 걱정 나 없겠네 날 언제나 붙드네
(Oh, He touched me He touched me And all the joy that floods my soul
Something happened and now I know He touched me and made me whole)
험한 나그네 세상 길 나의 맘이 곤할 때/사랑스런 주의 손길 오 나의 맘을 두드리네
주 붙드네 오 날 붙드네 넘치는 기쁨 내 맘에/근심 걱정 나 없겠네 날 언제나 붙드네
여러분, 오늘 말씀의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슬픔과 절망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의 삶의 방향을 바꿔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슬픔 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절망 중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인생의 끝에서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은혜이지만, 나와 늘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매일매일 경험하면서 사는 것은 더 큰 은혜입니다.
제가 ‘동행(同行)’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늘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모스 3:3에 있는 말씀인데요. “Can two people walk together without agreeing on the direction (두 사람이 방향에 대한 동의가 없이 어떻게 같이 걸을 수가 있겠느냐)?”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이 같아야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같은 삶의 목적과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않으면 어떻게 동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으며(창세기 6:9)”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he walked in close fellowship with God.” 노아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과 나누는 ‘친밀한 교제’에 있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같이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은 그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 아닙니까?
여러분, 어떤 삶을 선택하겠습니까? 인생의 끝에서 극적으로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삶을 선택하겠습니까? 아니면, 매일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선택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