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2021 | 성령의 사역(1)
부활절이 지나고(8) (After Jesus’ Resurrection)
김태환 목사
로마서 8:5-8
5 죄의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죄의 본성이 바라는 일을 생각하지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성령이 바라시는 일을 생각합니다. 6 죄의 본성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생각은 죽음이지만,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입니다. 7 죄의 본성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8 죄의 본성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쉬운성경)
5 Those who are dominated by the sinful nature think about sinful things, but those who are controlled by the Holy Spirit think about things that please the Spirit. 6 So letting your sinful nature control your mind leads to death. But letting the Spirit control your mind leads to life and peace. 7 For the sinful nature is always hostile to God. It never did obey God's laws, and it never will. 8 That's why those who are still under the control of their sinful nature can never please God. (New Living Translation)
앞으로 두 주일에 걸쳐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성령의 사역(the works of the holy spirit)’이라는 말은 성령께서 신자들의 삶 속에서 하시는 일을 말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쉬운 말로, 제가 이해하고 경험한 말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에 ‘성령’과 같은 말로 사용되는 다양한 말들이 있습니다. ‘영(The Spirit, 요한복음 3:6-8)’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고린도전서 3:16, 창세기 1:2)’ ‘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Christ, 로마서 8:9)’ ‘그리스도의 마음(The Mind of Christ, 고린도전서 2:16)’ ‘예수의 영(The Spirit of Jesus, 사도행전 16:7)’ ‘성결의 영(The Spirit of Holiness, 로마서 1:4)’ ‘약속의 영(The Spirit of Promise, 에베소서 1:13)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 요한복음 16:13)’ ‘생명의 영(The Spirit of Life, 로마서 8:2)’ 이런 말들이 모두 성령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말들입니다.
성령은 인격(人格, personality)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격이 있습니다. 날 때부터 타고납니다. 누구나 자기 인격이 존중을 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반대로 자기 인격이 무시를 당하면 불쾌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도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성령께서 근심을 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And do not bring sorrow to God's Holy Spirit by the way you live).” (에베소서 4:30) 또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절하게 중보기도를 하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로마서 8:26).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기뻐하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기쁨이 충만하여 말씀하셨습니다(At that same time Jesus was filled with the joy of the Holy Spirit).” (누가복음 10:21) 중요한 것은 성령을 단순히 ‘영’으로 이해하지 않고 인격을 가진 분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격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가 예수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처럼, 성령을 ‘성령님’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격을 잘 이해하면 ‘성령충만(to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이라는 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 편견(偏見)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성령을 받으면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 중에 가정에 충실하지 않고 교회에서 사는 사람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사람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항상 흥분 상태에 있는 사람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성령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혹시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도 성령에 대하여 이런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령을 받으면 지극히 정상적인 크리스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오히려 성령에 대한 지식이 없고, 성령에 대한 경험이나 체험이 없이 교회 생활하는 사람들이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 말씀을 한번 보세요.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오래 참음과 자비와 착함과 성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지할 율법이 없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e Holy Spirit produces this kind of fruit in our lives:love, joy, peace, patie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gentleness, and self-control. There is no law against these things!” 이 말씀을 읽는 여러분들은 이 시간 이후로 성령에 대한 편견을 모두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 리스트에 나오는 9가지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맺는 열매’입니다. 이렇게 나와 있지요? “But the Holy Spirit produces this kind of fruit in our lives (하지만, 성령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런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맨 끝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There is no law against these things!” 무슨 말인가요? 이런 것들과 반대되는 그 어떤 율법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율법도 이 ‘성령의 열매’와 충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넓게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결국은 우리가 이런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우리 속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내 속에 ‘나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이 충만한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요. 잘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성령의 열매’를 ‘the fruit of the Holy Spirit’라고 합니다. ‘fruits’라는 복수 형태를 쓰지 않고 ‘fruit’라고 단수 형태를 씁니다. 희랍어 원문에도 ‘카르포스(καρπὸς)’라는 단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결과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열매들입니까? 이런 사람에 대해서 누가 좋지 않은 편견을 갖겠습니까? 이런 사람에 대하여 누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겠습니까? 반대로, 누구나 이런 사람에게 호감(好感)을 갖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후로 성령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이 편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런 편견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 내주(內住, abide in)하실 수 있겠습니까? 위에서 성령은 인격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성령께서 자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과 어떻게 친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 다음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두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을 받지 않으면(혹은 성령을 체험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22 말씀인데요.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을 다 행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라는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13:14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 ‘a man after my own heart’라고 나와 있습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의도나 그의 의지나 그의 성향(inclination)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되었다는 뜻입니다. 참 보기 드문 케이스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도가 의지나 성향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거든요? 이 말이 잘 이해가 안 되는 분들은 지금 자기 자신을 한번 돌아보세요. 내가 의도하는 것들,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것들, 그리고 항상 내 생각이 향하고 있는 쪽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인지 한번 반성해 보세요.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반대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참 드문 케이스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윗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보인다고 하잖아요?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로마서 8:5-8에 있는 말씀입니다. “죄의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죄의 본성이 바라는 일을 생각하지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성령이 바라시는 일을 생각합니다. 죄의 본성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생각은 죽음이지만,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입니다. 죄의 본성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죄의 본성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at's why those who are still under the control of their sinful nature can never please God(바로 그런 이유에서 여전히 죄의 본성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But those who are controlled by the Holy Spirit think about things that please the Spirit (하지만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the Spirit을 기쁘게 하는 일들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여기서 ‘the Spirit’은 ‘하나님의 영’ 곧 하나님을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누가 한 말인지 모르지만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였던 노자(Lao Tzu)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지금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당신은 지금 향하고 있는 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If you do not change direction, you may end up where you are heading).”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싶겠지만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믿음생활도 그렇습니다. 왜 믿음생활을 하는지 그 목적이 중요합니다. 그 목적이 잘못 설정이 되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 위로를 받는 것, 좋은 말씀을 듣는 것은 믿음생활에서 얻는 부수적인 유익은 될 수 있지만 목적은 아닙니다. 믿음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 요리 문답(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작성한 나라가 영국입니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107 문항으로 만들어진 소 요리 문답과, 196 문항으로 만들어진 ‘웨스트민스터 대 요리 문답(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을 완성하는데 1643-1648년까지 무려 5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1648년에 영국의 국회에 보고되어 승인을 얻었습니다. 그 요리 문답에 나오는 제1번 문항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What is the chief end of man)?” 라는 질문입니다. 그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내 마음 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기 위해서 믿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죄의 본성(the sinful nature)’이 살아있는 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시도록(to be controlled by the Holy Spirit) 해야 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왜 꼭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성령을 받는 일을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욥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좀 열심이 있는 사람들 중에 성령을 받는 사람들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에 대하여 크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입장에서 제가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둘째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성령을 받았습니다(And we have received God's Spirit (not the world's spirit), so we can know the wonderful things God has freely given us).” (고린도전서 2:12) 어마무시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world’s spirit(세상의 영)’을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 수 없다는 말씀 아닙니까? ‘세상의 영’이 무엇입니까? ‘죄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세상의 영’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가지고 사는 이상 은혜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We can know the wonderful things God has freely given us(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 왜 꼭 성령을 받아야 믿음생활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정상적인 믿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왜요? 지금도 좋은데요?”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믿음생활의 올바른 목적을 회복할 수 있고,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믿음생활의 진수(essence)를 맛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