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2021 | 최초의 신앙 공동체
부활절이 지나고(10) (After Jesus’ Resurrection)
김태환 목사
사도행전 2:40-47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다른 여러 말로 그들에게 호소하고,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권하였습니다. 41 베드로의 설교를 받아 들인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날, 믿은 사람의 수는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42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서로 교제하고,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43 사도들을 통해 많은 기적과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44 믿는 사람들은 다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며 살아갔습니다. 45 그들은 재산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46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 뜰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함께 모여 기쁘고 순수한 마음으로 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47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였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늘어나게 하셨습니다. (쉬운성경)
40 Then Peter continued preaching for a long time, strongly urging all his listeners, "Save yourselves from this crooked generation!" 41 Those who believed what Peter said were baptized and added to the church that day-about 3,000 in all. 42 All the believers devoted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 and to fellowship, and to sharing in meals (including the Lord's Supper), and to prayer. 43 A deep sense of awe came over them all, and the apostles performed many miraculous signs and wonders. 44 And all the believers met together in one place and shared everything they had. 45 They sold their property and possessions and shared the money with those in need. 46 They worshiped together at the Temple each day, met in homes for the Lord's Supper, and shared their meals with great joy and sincere hearts, 47 all the while praising God and enjoying the goodwill of all the people. And each day the Lord added to their fellowship those who were being saved. (New Living Translation)
지난 두 주에 걸쳐 ‘성령의 사역’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보혜사’, ‘파라클레이토스(παράκλητος)’라는 말입니다. 항상 우리 ‘곁에서(be¬side)’ ‘Advocate(편을 들어주는 자)’ ‘Comforter(위로를 주는 자)’ ‘Encourager(격려하는 자)’ ‘Counselor(조언을 해 주는 자)’ ‘Helper(도와주는 자)’ ‘Strengthener(능력을 주는 자), ‘Intercessor(중보자)’로 일하고 계십니다. 신자의 삶은 의지할 곳 없이 세상에 버려진 ‘고아’와 같은 삶이 아니라 항상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함께 계시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in us)’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17).
문제는 어떻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느끼고 알아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을 ‘성령의 내적인 음성(the inner voice of the holy Spirit)’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바울 곁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용기를 내라. 너는 로마에서 나를 증거할 사람이다(사도행전 23:11)”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이 바로 ‘성령의 내적인 음성’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내적인 음성’을 듣는 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합니다.”(로마서 8:16) ‘우리의 영과 함께’라는 말은 ‘with our spirit’ 혹은 ‘together with our spirit’이라는 말입니다. Douay-Rheims Bible에 이 말이 “For the Spirit himself gives testimony to our spirit, that we are the sons of God”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라는 말은 쉽게 ‘우리의 마음’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생각을 불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내적인 음성’입니다.
백년전쟁의 영웅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1431)’가 전쟁에 참가하게 된 것은 13살 때 들은 하나님의 음성 때문이었습니다. 저녁종이 울릴 무렵, 집 앞에 있는 마을교회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고 동시에 밝은 빛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후 프랑스의 위기가 깊어 가면서 그 음성들이 더 자주 들려왔고, 열 여섯 살 되던 때에는 구체적으로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잔 다르크’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이 사실인지를 검증하는 심문이 열렸습니다. 한 심문관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원하시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데 왜 굳이 너를 보내 병력을 요구하시는 것이냐?” 그러자 ‘잔 다르크’는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전투는 프랑스의 아들들이 치르지만 승리는 그분께서 주실 것입니다” 하고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잔 다르크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결국 영국 군에게 체포됩니다. 감옥을 지키는 영국군의 간수가 넌지시 ‘잔 다르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텐데, 너에게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이유가 무엇이냐?” 이 말에 ‘잔 다르크’는 “당신은 한번이라도 저녁 때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한 적이 있느냐?” 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여러분은 오늘 본문 말씀을 읽고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보세요. “믿는 사람들은 다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재산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사도행전 2:44-45) 또 사도행전 4:32, 3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믿는 사람들의 무리가 다 한마음과 한 정신으로,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썼습니다. 그들 중에 부족한 것이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또 “이건 공산주의 사상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共産主義, communism)’는 사회 통제를 통하여 사유 재산을 금지하고 생산수단을 공동 소유한다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주장한 사상입니다. ‘공산주의’의 핵심 주장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것입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독일)’과 그와 동시대 사람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 독일)’의 영향을 받아 역사는 계급투쟁을 통해 발전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투쟁은 지배 계급인 ‘부르주아(bourgeois)’와 피지배 계급인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와의 투쟁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데, ‘자본주의’ 사회는 이 투쟁 과정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하게 되어 멸망하고 그 자리에 ‘사회주의’ 체제가 등장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적(過渡期的)인 경제 체제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유대인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유대교 랍비였고, 아버지는 루터교로 개종한 변호사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자유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고, ‘카를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자유적인 사고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베를린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처음에는 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는데, ‘마르크스’가 법학 외에 다른 학문에 관심을 보이자 아버지는 그를 베를린 대학으로 전학시켰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베를린 대학에서도 법학뿐만 아니라 철학과 역사, 경제, 사회학으로 관심을 돌리게 됩니다. 베를린 대학은 ‘헤겔(Hegel)’이 오랫동안 교수로 있던 곳이어서 ‘마르크스’는 여기서 헤겔의 변증법척 사고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카를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사상의 아이디어를 성경 사도행전에서 얻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연히 종교적인 면에서도 유대교에서 루터교회로 개종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유대인이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렇다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자기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공동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최초의 신앙공동체에 대한 반응은 “어? 이건 말도 안 돼. 이런 게 어디 있어?” 이런 반응과 “어?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고? 이건 공산주의 사상 아니야?” 이런 반응입니다. 충분히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최초의 신앙공동체의 형성 과정을 보면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됩니다. 그리고, 외견상 이 공동체가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찔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설교를 사용하셔서 듣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도들을 붙잡고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형제들이여,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Brothers, what should we do)?” (사도행전 2:37)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며,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사도행전 2:38-39)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날 베드로의 설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모두 세례를 받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날, 믿은 사람의 수는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출현하게 된 배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인위적(人爲的)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공동체에 대한 말씀을 읽으면서 시편133편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See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and sisters live together in harmony)!”(GOD'S WORD® Translation) 순례자들이 예배드리기 위하여 성소에 올라가면서 불렀던 다윗이 지은 시편(노래)입니다. 이 노래 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면서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는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 공동체의 출현에 대하여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기들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그 중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자기 땅을 판 돈에서 얼마를 떼어 몰래 숨겨 놓고, 나머지만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그의 아내 ‘삽비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성령을 속이고 땅을 팔아 받은 돈 가운데 얼마를 떼어 놓았소? 그 땅은 그대의 것이었고, 판 뒤에도 그 돈을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았소? 그런데 어찌하여 성령을 속일 마음을 먹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오(You lied to the Holy Spirit..... You weren't lying to us but to God)”(사도행전 5:3-4) 결국 성령을 속인 일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죽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을 갖게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신앙공동체 운동이 순전히 자발적으로, 성령께서 주도(主導)하신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은 공동의 이익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Now to each one the manifestation of the Spirit is given for the common good).”(고린도전서 12:7)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사역 중의 하나가 ‘공동(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 이런 게 어디 있어?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한다고? 그리고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준다고? 이거 공산주의 사상 아니야?” 맞습니다. 성령께서 일하시지 않고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공동체의 모습이 공산주의에서 추구하는 공동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달라요. 공산주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상적인 경제 사상일 뿐입니다. 오늘날 공산주의는 멸망했습니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인간의 죄성, 인간의 욕심과 탐욕을 간과(看過)하고 그것을 물리적인 힘으로 통제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공동체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실패합니다.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사람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도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우리를 거듭하게 하시기 전에는 어떤 공동체 실험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무리가 다 한마음과 한 정신으로,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썼습니다.”(사도행전 4:32) “집집마다 돌아가며 함께 모여 기쁘고 순수한 마음으로 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였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늘어나게 하셨습니다.”(사도행전 2:46-47)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교제가 있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음식을 같이 나누고 주님의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힘썼습니다. 모일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의 칭찬이 잇달았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사도행전 9:31)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the church throughout Judea and Galilee and Samaria enjoyed peace [without persecution], being built up [in wisdom, virtue, and faith]; and walking in the fear of the Lord and in the comfort and encouragement of the Holy Spirit, it continued to grow [in numbers].”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고린도전서 말씀만 읽어 보더라도 교회 안에 벌써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 아름다운 공동체가 사라지게 되었는지,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케임브리지 교회 공동체가 사도행전에서 보여준 최초의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해서 우리 속에 있는 탐욕과 이기심을 이겨내고, ‘공동의 선(the common good)’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