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5/2021 | 바나바와 사울
부활절이 지나고(14) (After Jesus’ Resurrection)
김태환 목사
사도행전 9:26-31
26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곳의 제자들과 어울리려 했으나, 그들은 사울이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모두 사울을 두려워했습니다. 27 하지만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로 갔습니다. 바나바는 사도들에게 사울이 길에서 주님을 본 것과, 주님께서 사울에게 하신 말씀과, 사울이 다마스커스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한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28 이렇게 해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자유롭게 다니면서 주 예수님의 이름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29 사울은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인들과 이야기도 하고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30 형제들이 이 사실을 알고, 사울을 가이사랴로 데려갔다가 다시 다소로 보냈습니다. 31 그러는 동안,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있는 교회들이 평화를 되찾았으며, 터전을 든든하게 잡았습니다. 교회는 주님을 두려워하며 성령의 위로를 받아 믿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쉬운성경)
26 When Saul arrived in Jerusalem, he tried to meet with the believers①, but they were all afraid of him. They did not believe he had truly become a believer! / ①Greek disciples 27 Then Barnabas brought him to the apostles and told them how Saul had seen the Lord on the way to Damascus and how the Lord had spoken to Saul. He also told them that Saul had preached boldly in the name of Jesus in Damascus. 28 So Saul stayed with the apostles and went all around Jerusalem with them, preaching boldly in the name of the Lord. 29 He debated with some Greek-speaking Jews, but they tried to murder him. 30 When the believers heard about this, they took him down to Caesarea and sent him away to Tarsus, his hometown. 31 The church then had peace throughout Judea, Galilee, and Samaria, and it became stronger as the believers lived in the fear of the Lord. And with the encouragement of the Holy Spirit, it also grew in numbers. (New Living Translation)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사울(Saul)’이라는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기록했습니다. 사울은 나중에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지게 됩니다. 사도행전 13: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바울이라고도 부르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Saul, also known as Paul, wa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이 말씀부터 사울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쓰지 않고 바울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유대인들의 이름에는 뜻이 있습니다. ‘사울’은 ‘asked for(묻다)’ ‘questioned for’ ‘prayed for’라는 뜻이 있습니다. 반면에, ‘바울’이라는 이름에는 ‘small(작은)’ ‘humble(겸손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실제로 회심 후에 바울은 자기 자신을 항상 겸손하게 낮췄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조산아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입니다. 나는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8-10) 이 말씀에서 ‘조산아(早産兒)’라는 말은 ‘제 때 나오지 않은 아이(one untimely born)’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말을 자기 자신을 낮추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사울은 극적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가 예수님이 살아있을 때 만났다는 어떤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사울이 동시대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의 말 대로 그는 같은 또래 유대인들보다 더 열심히 유대교를 믿었습니다(갈라디아서 1:14). 그는 유대교 외에 다른 진리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울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혈통으로는 ‘히브리인 중에서도 히브리인’이었고, 신앙적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조건을 많이 갖춘 사람이었습니다(빌립보서 3:4). 그는 부모를 잘 둔 덕분에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사도행전 22:28). 그리고, 그는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어는 물론이고, 아람어, 그리스어, 로마 말을 자유롭게 사용했습니다(사도행전 21:37). 그의 스승은 ‘가말리엘(Gamaliel)’이라는 유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랍비였습니다(사도행전 22:3).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사울을 가르친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상당히 소신이 있고, 진취적이고, 열린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유대 공의회가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심문할 때, 이 사람들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하실 수도 있다고 혼자 소신 발언을 했습니다. 저는 사울이 이런 스승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심 후에 사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I once thought these things were valuable, but now I consider them worthless because of what Christ has done).” (빌립보서 3:7)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특권들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그의 성공을 보장해 주리라고 믿었던 것들을 ‘worthless rubbish(가치 없는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모두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일어난 변화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힘들어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번 사울을 보세요. 그가 버렸다고 말하는 로마의 시민권은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되었는지 모릅니다. 그가 모국어처럼 사용할 수 있었던 그리스어나 로마말은 그가 위험에 처해 있었을 때 그의 목숨을 구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가말리엘 문하(門下)에서 공부했던 학문적인 성취는 그가 쓴 편지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 같은 성경은 얼마나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전개됩니까? 그가 버렸다고 했던 것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전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필요했던 것들이었지만, 회심 후에는 이것들이 복음을 위해서 필요한 도구들이 되었습니다. 목적이 바뀌고, 우선 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사울이 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이야기는 사도행전 9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서 시리아의 다메섹(Damascus)으로 가는 도중에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사울은 회심하자마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밖에 나가서 전파했습니다. 사람들은 사울의 회심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피했습니다. 회심을 해서 마음에는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하나님은 ‘요셉’이라는 사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요셉은 ‘바나바(Barnabas)’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사람입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에는 ‘위로의 아들(Son of Encouragement)’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 꼭 이름처럼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름의 뜻에서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바나바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Barnabas was a good man, full of the Holy Spirit and strong in faith).” (사도행전 11:24) 대부분의 성경들이 바나바를 가리켜 “Barnabas was a good man”이라고 했는데, GOD'S WORD® Translation에 보면 “Barnabas was a dependable man(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믿음이 좋다는 사람 중에 “He is a good man” 혹은 “He is a dependable man”이라는 평을 듣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은 좋은데 평이 안 좋은 경우가 많고, 믿음은 좋은 것 같은데 어딘지 가까이하기에는 먼 사람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착하고, 신뢰할 수 있고, 믿음이 좋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 바나바를 사울을 위해서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바나바는 신자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울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사울의 회심이 진실하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울의 회심을 믿지 않았을 때, 바나나가 사울의 회심을 보증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좋은 사람이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고, 믿음이 좋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사울을 위해서 이런 바나바라는 사람을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잘 배우고, 주변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면 언젠가는 이것이 하나님을 위해 쓰임을 받는 날이 꼭 올 것입니다.
언젠가 사울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For Christ's love compels me., 고린도후서 5:14)”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빚을 진 사울은 예루살렘을 돌아다니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스데반과 마찬가지로 그의 설교를 듣고 분노한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사울을 그의 고향 다소(Tarsus)로 피신을 시켰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당장에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고향에 숨어 지내야 합니까? 그의 마음 속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 불타고 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은둔 생활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다시 바나바로 하여금 다소에 있는 사울을 불러내게 하십니다. 바나바는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사울을 데리고 시리아의 ‘안디옥(Antioch)’으로 갔습니다(사도행전 11:25) 사울의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하나님은 바나바를 보내서 사울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때로 우리의 앞길이 절망적이고 막막한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바나바’를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의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We can make our own plans, but the Lord gives the right answer).” (잠언 16:1)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길을 어떻게 인도하시는 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인생의 위기 때마다 바나바를 보내셨다는 말씀이 은혜가 됩니다. 바나바는 그 때 안디옥 교회의 실태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안디옥에 박해를 피해 피난 온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그들은 유대인들을 찾아 다니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정체 불명의 크리스천들이 안디옥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구브로(Cyprus)와 구레네(Cyrene) 출신 사람들이라는 것 밖에는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방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전해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로 보내 실태를 조사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와 아무 상관없을 것 같은 이 이야기가 우리의 구원과 직접 관련된 일인 것을 알게 되면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납니다. 맞습니까? 만일 그 때 바나바가 조사원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때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교회 문을 닫았더라면, 오늘 우리의 구원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 바나바의 눈에 비친 안디옥 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사도행전 11:23).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고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동역자를 찾았습니다. 그 때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고향 다소에 내려가 있는 사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다소로 가서 사울을 데리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교회를 1년 간 섬겼습니다. 그 1년이라는 기간이 중요한 이유는 이 때 ‘크리스천(Christians)’이라는 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사도행전 11:26에 나옵니다. 안디옥 교회 신자들이 우리는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크리스천들이다!” 하고 이름을 붙여준 것입니다.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때 안디옥 교회 신자들은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배우고, 실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략(The Divine Conspiracy)’이라는 책을 쓴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희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게 하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주께서 명하신 바를 실천하는 길을 열어 줄 복음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윌라드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복음을 제대로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은 올바른 크리스천으로서 살게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또 누가 한 말인지 한번 맞춰 보십시오. “Jesus, a man who was completely innocent, offered himself as a sacrifice for the good of others, including his enemies, and became the ransom of the world. It was a perfect act(예수님은 완전히 결백한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심지어 원수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사람이다. 그는 세상을 위한 대속물이 되었다. 그것은 완전한 행위였다.” 마하드마 간디 (Mahatma Gandhi, 1869-1948, 인도)의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찬양했던 간디가 크리스천들에 대하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I do not like your Christians. Your Christians are so unlike your Christ(나는 당신들 크리스천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믿는 그리스도와 너무 다르다).”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천들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마다 사도행전 말씀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모습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세상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달라스 윌라드의 말처럼 성경을 펴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새롭게 읽고 배우고, 그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천’이 됩니다. 그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