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2016 | 성령강림절 후 열두번째 주일
사울의 회심 (The Conversion Of Saul)
김태환 목사
사도행전 9:4-16
4 사울은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소리가 뚜렷이 들렸습니다.
5 사울은 “주님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7 사울과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깜짝 놀라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커스로 데려갔습니다.
9 사울은 삼 일 동안, 앞을 보지 못했으며,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10 다마스커스에 아나니아라는 어떤 제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환상 중에 “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11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고 하는 거리로 가거라. 그리고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아라. 그가 지금 거기서 기도하고 있다.
12 그가 환상 속에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찾아와 그에게 손을 얹어서 그의 시력이 회복되는 것을 보았다.”
9:13 아나니아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 사람에 관한 소문을 들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14 그리고 그 사람은 대제사장들에게서 주님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잡아갈 수 있는 권한을 받아 가지고 이 곳에 왔다고 합니다.”
15 그러나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그는 이방 사람들과 여러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 주겠다.” (쉬운성경)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강림 후에 제자들의 삶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도행전을 보면서 추적(追跡)해 보았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 주목할만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는 사울이라는 사람의 회심이야말로 그 많은 일들 중의 백미(白眉)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 말의 ‘백미’라는 말을 아시지요?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흰 눈썹’이라는 뜻인데, 이 말의 유래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적벽대전 후 형주, 양양, 남군 등 많은 땅을 얻은 유비(劉備)가 신하들을 모아 놓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책을 물었다고 했답니다. 이때 유비를 두 번이나 구해 준 이적(伊籍)이라는 사람이 "새로 얻은 땅들을 오래 지키려면, 먼저 어진 선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자기 생각을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유비는 이적에게 "그러면, 그 어진 선비가 누구요?" 라고 묻자, 이적이 "형양 땅에 뛰어난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어진 사람은 양 눈썹 사이에 흰 털이 난 마량(馬良)이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속히 그를 청하여 오심이 옳은 줄 압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유비는 그 말을 듣고 즉시 양 눈썹 사이에 흰 털이 난 마량(馬良)을 청하여 오게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백미(白眉)’라는 나왔다고 합니다.
저는 사울의 회심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재미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우리의 예상을 뒤엎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지루하지 않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흥미진진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이루는 일에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사(士師)나 예언자들이 모두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모두 평범하지 않습니다. 굳이 안 하겠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억지로 그 일을 시킵니다. 모세 같은 사람은 자기는 그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몇 번이나 고사를 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출애굽이라는 큰 일을 맡겼습니다. 그 일에 전혀 적합하지 않을 것 같은 소시민적인 사람을 사사로 임명합니다. 기드온이 그렇습니다. 남쪽 왕국에서 농사짓고, 양을 치던 사람을 북왕국으로 가서 예언활동을 하라고 합니다. 정의의 예언자라는 별명이 붙은 아모스가 그렇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적합한 사람이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잘 찾아 보면 하나님의 일에 어울릴만한 사람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예상 밖으로 사울이라는 사람을 지명하십니다. 보세요. 사울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로,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의 한 조항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고 철저하게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출발했지만,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다 보니까 겉과 속이 다른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교만에 빠졌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사울이 그렇게 고백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너무나 열심이었으므로..... 율법을 지키고 따르는 데 있어서는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서 헛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빌립보서 3:6)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사울은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돌로 스데반을 치는 사람들의 옷을 지키는 사람으로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사울은 그 현장을 목격하면서 스데반이 그렇게 죽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는 사울의 과거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남자든 여자든 닥치는 대로 끌어 내어 감옥에 넣었습니다. 사울은 예수의 제자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커스의 여러 회당에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붙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8:3-9:2)
개역성경에는 사울이 교회를 잔멸(殘滅)하려고 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8:3) ‘잔멸’이라는 말은 ‘쇠잔하여 기운이 없어짐’이라는 뜻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Saul was going everywhere to destroy the church”라고 나와 있습니다. 희랍어 원문에 나오는 ‘엘뤼마이네토’라는 말은 멧돼지가 농작물 밭에 들어가서 온통 휘저어서 밭을 못쓰게 만들어 놓는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사울이 멧돼지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의 뿌리를 뽑아버리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다른 착하고 좋은 사람도 많은데,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사울의 회심은 다마스커스 (Damascus)로 가는 중에 일어났습니다. 다마스커스는 이스라엘 북쪽 시리아 영토에 있습니다. 다마스커스에 예수 믿는 유대인들이 많이 숨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끌고 오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편지를 손에 들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같이 여러 사람을 데리고 가고 있었습니다. 다마스커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밝은 빛이 사울을 비췄습니다. 그 빛이 하도 강렬하여 사울은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소리가 뚜렷이 들렸습니다. 사울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신기한 것은, 사울과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긴 한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깜짝 놀라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참 만에 땅에서 일어난 사울은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커스로 데려 갔습니다. 사울은 삼 일 동안, 앞을 보지 못했으며,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울의 회심 장면입니다. 저에게도 이 말씀은 모두 설명되지 않는 말씀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영적인 체험에 대한 말씀인데, 어떻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 궁금한 것 한가지는, 바울이 어디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고 복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배웠을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바울이 교회나 개인에게 쓴 편지가 13권이나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교회가 그 편지 속에 든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궁금증이 커집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이 문제가 이슈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고, 제자들과 교제를 나누었던 것도 아닌데,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넘겼던 사람이 어디서 예수 그리스도에 지식을 얻었을까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사울의 말을 직접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형제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은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그것은 내가 사람에게서 얻은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들었을 것입니다. 나는 유대교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했을 뿐 아니라, 아예 없애 버리려고 까지 계획했습니다. 나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다른 유대인들보다 더 열심히 유대교를 믿었습니다. 또한 그 누구보다도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나를 따로 세우셔서 은혜로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게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을 때에 나는 어떤 혈육을 통해서도 가르침이나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 1:11-16) 그의 말 중에 “그리스도께서 내게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게 보이셨다”는 말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중에 강렬한 빛 속에서 만났던 예수님을 만난 그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사람을 이렇게 회심을 시키셨을까?”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다마스커스에 살고 있던 진실한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 (Ananias)라는 사람을 통하여 이렇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나니아도 처음에는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13-14절에 나와 있습니다. “주님,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 사람에 관한 소문을 들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대제사장들에게서 주님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잡아갈 수 있는 권한을 받아 가지고 이 곳에 왔다고 합니다.” 아나니아의 말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그는 이방 사람들과 여러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5-16절)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aul is my chosen instrument to take my message to the Gentiles and to kings, as well as to the people of Israel. And I will show him how much he must suffer for my name's sake." 이 말씀에서 ‘instrument’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말은 도구(道具)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악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도구’라는 것이 무슨 일을 할 때 필요한 연장을 말 하잖아요? 도구는 스스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자의 손에 들려서 일을 합니다. ‘악기’도 그렇습니다. ‘악기’ 스스로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연주자의 손에 들려야 합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손에 들고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울이 자기 의지를 내려 놓고, 완전히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럴 사람으로 사울이라는 사람을 지명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까? 계속해서 우리에게 질문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 교회를 핍박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해서 감옥에 보냈던 사울이라는 사람입니까? 이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主權)에 달린 문제입니다. 하지만, 좀 설명을 해 본다면, 이 문제를 우리의 입장에서 보지 말고, 사울의 입장에서 봐 보십시오. 사울은 자기의 과거를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압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undeserved God’s favor’라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겸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 부름 받은 것을 감사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신의 사명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그가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I do not nullify the grace of God., 갈라디아서 2:21, NASB)”라고 고백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우선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싶습니까? 이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사울의 회심 이야기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했던 사람을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이기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경쟁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삶을 살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나의 것을 내려 놓는 희생의 삶을 살게 합니다. 다른 사람과 화평한 삶을 살게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구원 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는 사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사울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사울 덕분에 우리도 하나님께 필요한 도구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런 삶을 살았기에 삶에 대한 더 넓은 지평 (horizon)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하, 내가 추구하고, 내가 아는 삶이 전부가 아니구나! 이렇게 사는 삶도 있구나! 이렇게 나만 아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에 참여하는 삶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우리도 도구적인 삶을 선택하고 그렇게 살기를 결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하는 일부터 시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