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2021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The Lord Is My Shepherd)
김태환 목사
시편 23편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쉬운성경)
1 [A psalm of David.] The LORD is my shepherd; I have all that I need. 2 He lets me rest in green meadows; he leads me beside peaceful streams. 3 He renews my strength. He guides me along right paths, bringing honor to his name. 4 Even when I walk through the darkest valley①, I will not be afraid, for you are close beside me. Your rod and your staff protect and comfort me. / ①Or the dark valley of death 5 You prepare a feast for me in the presence of my enemies. You honor me by anointing my head with oil. My cup overflows with blessings. 6 Surely your goodness and unfailing love will pursue me all the days of my life, and I will live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읽은 시편 23편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설교의 왕자(The Prince of Preachers)’라고 불리는 스펄젼(Charles Spurgeon, 1834-1892, 영국)은, 이 시편을 ‘시편의 진주(the pearl of psalms)’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인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 1898-1986)는 우울증 환자들에게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으로 시편 23편을 읽으라는 처방을 내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아주 드라마틱했습니다. 드라마틱했다는 말은 그의 삶에 그루브(groove)가 많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어려움 없이 편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맞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아무 일이 없는 편안한 삶이 아니라 드라마틱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가 그랬습니다. 다윗은 어렵고 힘들 때마다 시를 썼습니다. 그가 쓴 시들은 우리가 가진 성경에 시편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시편 150편 중에 다윗이 쓴 시편은 73편입니다. 그 시편들은 모두 다윗이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처절하게 하나님을 찾았던 시편들입니다.
시편 23편도 그렇습니다. 워낙 목가적(牧歌的)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편이기 때문에 다윗이 평안하게 지냈던 때에 이 시편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시편 23편은 다윗의 생애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쓴 것입니다. 학자들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을 했을 때, 다윗은 차마 아들과 칼을 겨누고 싸울 수가 없어서 왕궁을 버리고 피난을 갔던 때가 있었는데, 시편 23편은 그 때 쓴 시편이라고 합니다.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지요? 하지만, 자세히 읽어 보면 시편 23편에 다윗의 처절하고, 수치스럽고, 절망적이었던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시편 23편을 읽으면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 시편 23편의 내용을 한번 찬찬히 들여다볼까요? 먼저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라고 고백합니다. 목자를 ‘shepherd’라고 합니다. 양(sheep)을 herding하는 사람, 양을 지키고, 먹이고, 기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은 마치 목자가 양을 돌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신다는 고백입니다.
이 말씀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의 시제(時制, tense)에 주목하면서 여기에 사용된 시제가 미완료(未完了, imperfect) 시제라고 합니다. 미완료 시제는 어떤 동작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시제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면 나는 계속해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과거에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지금도 부족함이 없고, 앞으로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만족하고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욥기에 나오는 구절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주신 분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욥기 1:21) 또 이런 말씀이 생각나지요?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배부를 때나, 배고플 때나, 나는 어떤 형편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빌립보서 4:12) 이들이 이렇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과 계획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재의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께서 뜻이 있기 때문에 주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다윗 역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얼마나 사랑이 많고, 얼마나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목자(my shepherd)’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좋은 환경에 있을 때도, 내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 있을 때도, 변함없이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배려를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그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하나님을 믿는 이상 나에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과거에도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지금도 부족한 것이 없고, 앞으로도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목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위키 백과사전(WIKIEPRDIA)에 양의 성질(性質)에 대하여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화를 잘 안 내고 온화한 성질을 가진 사람을 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온순해 보이는 이미지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양을 온순한 동물이라고 생각지만 양은 매우 억세고 사나운 동물이다. 염소와 마찬가지로 고집이 세서 다른 동물에게 박치기를 하기도 하고 사람에게도 죽기 살기로 달려들기 때문에 양치기들도 애를 많이 먹는다.” 양은 성질도 좋지 않지만, 시력이 약해서 겨우 3m 정도 밖에 앞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넘어져 몸이 뒤집어지면 혼자 힘으로 일어날 수 없어서 목자가 도와줘야 한다고 합니다. 지난 2월에 호주 멜버른 북부 랜스필드(Lancefield)에서 오랫동안 버려졌던 메리노(merino) 종(種) 양 한 마리가 구조되었는데요. 발견 당시 털의 무게가 무려 35kg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양에게 목자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목자 없이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도 양에 대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흩어져 제 갈 길로 갔으나(All of us, like sheep, have strayed away. We have left God’s paths to follow our own)” (이사야 53:6) 양에게 목자가 없으면 양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그리고 길에서 벗어나 엉뚱한 길로 갑니다. 목자를 잃은 양이 제멋대로 길을 가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길(God’s path)’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들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인생의 정도(正道)를 말합니다. 우리 자신들의 길이란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잘못된 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정도를 떠난 우리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 줄 목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하나님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물가로 인도하신다(2절)”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신다(He renews my strength, 3절)”고 합니다. Amplified Bible에는 이 말씀이 “He refreshes and restores my soul (lif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실망하고 절망하여 주저 앉아 있을 때, 우리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주시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for his name’s sake)’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3절)”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면, 하나님의 명예를 떨어뜨리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윗처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믿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보스턴 생활이 두려울까요? 낯선 새로운 환경이 두려울까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If God is for us, who can be against us)?” (로마서 8:31)
마지막으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4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Even when I walk through the darkest valley①, I will not be afraid, for you are close beside me.” / ①Or the dark valley of death 우리가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때도 하나님께서 나와 가까이 계셔서 나의 도움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독일 한 대학에 한 노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가 구사하는 언어가 10개가 넘는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독일어, 영어, 불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에다 몇 개의 동양 언어까지 구사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교수가 히브리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 교수에게 어떻게 히브리어까지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그 교수는 40년 전,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던 당시, 대학시절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교수에게 기숙사 방을 같이 쓰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그 친구는 유태인이었습니다. 사실은 그 친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유태인이었지만, 나치는 유태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서 수용소로 보내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습니다. 공부를 시작하고 두 시간쯤 지나면 꼭 무슨 주문 같은 것을 큰 소리로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친구가 히브리어로 외웠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마치 음악같이 리듬을 타는 그 시가 무척 신기하게 들렸습니다. 그 친구에게 물었더니 구약성경에 나오는 시편 23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그 시편을 외우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서 공부가 더 잘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날부터 그 교수도 친구에게 배워서 같이 그 시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년, 2년을 함께 보내는 동안 사이 좋은 두 친구는, 공부하다 지겨워질 때쯤 되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암송했습니다.
나치의 핍박이 점점 심해지자 그 친구는 학교를 그만두고 은신처에 숨어 지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에게서 지금 나치 비밀경찰들이 들이닥쳤다고, 자기는 가스실로 끌려가게 될 것 같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교수는 급히 자전거를 타고 달려갔습니다. 그 친구와 가족을 실은 나치의 트럭이 막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교수는 출발하는 트럭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친구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트럭을 따라가는데, 고개를 내민 친구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친구의 얼굴은, 뜻밖에도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갑자기 소리 높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는 친구는 미소를 지으면서 시편 23편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따라가던 교수는 자기도 모르게 같이 그 시편을 외우면서 자전거 페달을 더 힘껏 밟았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친구를 태운 트럭은 점차 시야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친구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습니다.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나치는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끌어다가 전쟁터로 보냈습니다. 그 교수도 결국 군대에 끌려갔다가 러시아에서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 총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죽음의 대열에 낀 포로들은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습니다. 그 교수의 머릿속에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가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죽음의 길을 웃으며 떠난 그 친구처럼, 나도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자.” 끌려온 포로들이 하나 둘 총알에 쓰러지고, 드디어 교수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교수는 총을 겨눈 군인에게 마지막 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눈을 감고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연합군의 러시아 장교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도 같이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외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연합군 장교는, 유태인이었습니다. 장교는 그 사람을 풀어주라고 명령하면서 사형중지 서류에 사인을 했습니다. 놀라서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장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비록 악마의 제복을 입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정말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92-1983)의 말처럼 하나님의 나라에는 ‘ifs(만약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자기 백성을 이렇게 지키신 것입니다.
스스로 나는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양들에게 ‘풍성한 생명(an abundant life)’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요한복음 10:10). 돈을 받고 고용된(hired) 목자는 자신을 희생하려고 하지 않지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 덕분에 그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나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절)”하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보스턴 생활을 통해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선한 목자’를 평생 여러분의 자산(資産, assets)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