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2021 |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Where Does My Help Come From?)
김태환 목사
시편 121편
1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2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 3 주님께서는, 네가 헛발을 디디지 않게 지켜 주신다. 너를 지키시느라 졸지도 않으신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5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네 오른쪽에 서서, 너를 보호하는 그늘이 되어 주시니, 6 낮의 햇빛도 너를 해치지 못하며, 밤의 달빛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7 주님께서 너를 모든 재난에서 지켜 주시며, 네 생명을 지켜 주실 것이다. 8 주님께서는, 네가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이제부터 영원까지 지켜 주실 것이다. (쉬운성경)
1 [A song for pilgrims ascending to Jerusalem.] I look up to the mountains - does my help come from there? 2 My help comes from the Lord, who made heaven and earth! 3 He will not let you stumble; the one who watches over you will not slumber. 4 Indeed, he who watches over Israel never slumbers or sleeps. 5 The Lord himself watches over you! The Lord stands beside you as your protective shade. 6 The sun will not harm you by day, nor the moon at night. 7 The Lord keeps you from all harm and watches over your life. 8 The Lord keeps watch over you as you come and go, both now and forever.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읽은 시편 121편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시편입니다. 저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 시편을 어디에 사용했는지 그 용도가 ‘A song for pilgrims ascending to Jerusalem’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이 시편을 노래로 불렀습니다. 유월절 같은 큰 명절에는 전국 각지에서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가면서 제물로 드린 양들을 어깨에 메고 갑니다. 고된 순례의 길이지만, 여기 저기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을 만나면 이 시편을 같이 노래했습니다.
이 시편은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도움(help)’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 속에 나는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한자에서 사람을 뜻하는 ‘인(人)’자의 모양이 한 사람은 비스듬히 기대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을 떠받쳐주는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서로 기댈 사람이 필요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팬데믹의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소중한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친구가 필요하고, 함께 대화할 사람이 필요하고, 함께 있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프랑스와 핀란드의 축구 경기가 있었습니다. 관중이 꽉 찼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 속에 “저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금방 우리 모두에게는 저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이 자기 편을 응원하고, 소리 지르고, 함께 웃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책을 보다가 이런 말씀을 읽었습니다. “The Lord is greater than the giants you face(주님은 당신이 만나는 거인들보다 더 위대하시다).” (요한일서 4:4) 그래서 정말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더니 정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The one who is in you is greater than the one who is in the world(여러분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 있는 어떤 자보다 위대한 분이십니다).” 다윗과 골리앗 생각이 났습니다. 사실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했을 때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알았습니다. “내 앞에 서 있는 저 무서운 거인보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더 위대하신 분이다.” 사도 바울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If God is for us, who can ever be against us)?” (로마서 8:31) 놀라운 것은 이 말씀이 이미 구약 성경 시편 118:6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The Lord is for me, so I will have no fear. What can mere people do to me)?” 이 시편에 나오는 말씀이 다윗에게 전해졌고, 예수님의 제자 요한에게 전해졌고,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들 앞에 서 있는 무서운 자이언트를 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을 보면 저 산에 신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삼각산이나 북한산, 계룡산에 가 보면 각종 신들을 섬기는 제단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했던 사마리아 여자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조상 때부터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We Samaritans claim it is here at Mount Gerizim, where our ancestors worshiped).” (요한복음 4:20)
시편 121편을 쓴 사미스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 산들로부터 나의 도움이 온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나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1-2절) 이 시편을 쓰신 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진 분이 틀림없습니다. ‘나의 도움(my help)’이라는 말은 그가 개인적으로 도움을 경험했던 출처(source)를 말합니다. 이 시편을 쓰신 분은 그 도움의 출처가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시편 121편을 쓴 사미스트는 이 하나님이 바로 ‘나의 도움’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라고 믿는다면, 어렵고, 힘들고, 절망적인 일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다른 곳에서 도움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실제적인 믿음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번역할 때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말 중의 하나가 ‘보혜사’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희랍어 ‘파라클레이토스(παράκλητος)’를 번역한 말인데요. 이 말 속에 ‘안위하다’, 훈계하다’, ‘권고하다’, ‘격려하다’, ‘도와주다’ 등 다양한 뜻이 있어서 어느 한 단어로 번역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필리핀 남부의 ‘쫄로아노 모로’ 족(族)은 ‘계속하여 옆에 서서 같이 가시는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멕시코의 ‘오토미’ 인디언들은 ‘우리 영혼에 따뜻함을 주시는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아이보리 코스트에 사는 ‘빠울리’ 족은 보혜사를 ‘생각을 꽉 동여매시는 분’이라고 번역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근심과 걱정에 싸이고, 마음이 불안해질 때 모든 것이 혼란스럽습니다. 이 때는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의 흐트러진 생각을 꽉 동여매어 그의 통제 밑에 두신다는 것입니다. 참 좋은 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번 이 말 대로 실천해 보시지요. 마음이 흩어지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때 여러분의 마음을 꽉 동여매서 성령께서 통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나오는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주님은 네가 헛발을 디디지 않게 지켜 주신다(He will not let you stumble).” (3절) 원래 이 ‘stumble’이란 말은 무엇에 걸려 넘어진다는 말입니다.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괜찮겠지 하면서 발을 내 딛었는데, 그만 무엇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고향’이라는 노래 가사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지금 불확실성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꼭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시편 121편의 사미스트는 이 때 나를 붙들어주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네 오른쪽에 서서, 너를 보호하는 그늘이 되어 주시니, 낮의 햇빛도 너를 해치지 못하며, 밤의 달빛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5-6절) 이 사미스트는 하나님을 가리켜 나를 ‘지키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는데 ‘내 오른편에서(at my right side)’ 나를 지키신다고 합니다. ‘오른쪽’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강력한 힘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미스트는 “주님께서 너를 모든 재난에서 지켜 주시며, 네 생명을 지켜 주실 것이다(7절)”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재난’이라는 말은 ‘all harm’ ‘all evil’ ‘all danger’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악한 일로부터, 모든 해로운 일로부터, 모든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도움은 정해진 기한(expiration day)이 없습니다. 사미스트는 ‘지금부터 영원까지(from this time and forever)’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고 고백합니다.
수많은 시편의 사미스트들이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시편 118:8-9)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편 56:3)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시편 18:31)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편 73:28)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맞이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까? 우리는 단순히 마음에 위로를 받는 감정의 차원을 넘어서 직접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부지런히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요. 저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가?”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십시오(Be imitators of God, as beloved children).” (에베소서 5:1)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닮아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닮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ver, 1864(?)-1943, 미국)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잃고 노예 주인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날짜를 모르기 때문에 그의 묘비에는 태어난 날이 없고 죽은 날짜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카버를 길러 준 주인은 참 고마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고마운 사람을 만난 덕분인지 카버는 하늘이 주신 재능을 가지고 그 시대의 가장 탁월한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이 됩니다. 그는 마태복음 5장 44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을 붙들고 한평생 이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부커 T.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1856-1915, 미국)으로부터 돈과 지위와 명예를 포기하고 나와 함께 미국 남부 지방의 흑인들을 무지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일을 해 보자는 제의를 받아들여, 두 사람이 함께 학교를 짓고 교육 사업에 헌신합니다. 그 학교가 앨라배마 주 터스키기에 있는 터스키기 대학교(Tuskegee University)입니다. 카버는 그 학교 농학부 교수로 47년을 재직하면서 자기가 공부한 과학적인 지식을 농업에 접목하여 생산량을 늘리는 획기적인 연구 결과를 내 놓았습니다.
그 당시 남부 지방은 면화 재배가 주 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면화는 땅에서 질소를 빼앗아 가는 작물이기 때문에 땅을 황폐하게 만들어 면화 수확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흑인이나 백인이나 면화를 재배하는 사람들의 수입이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카버는 콩 종류의 작물이 공기 중의 질소를 빨아들여 땅에 질소를 공급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땅콩을 재배하도록 농민들을 설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땅콩을 많이 먹던 때가 아니어서 땅콩을 심어도 소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카버는 땅콩을 이용한 요리법을 직접 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유력한 사업가 9명을 초대하여 국, 샐러드, 닭고기, 아이스크림, 과자 등을 대접했는데, 모두들 음식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카버는 그 자리에서 “오늘 저녁에 여러분들이 드신 이 음식들은 모두 땅콩으로 만든 것들입니다. 땅콩을 많이 소비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십시오”라고 말해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카버는 땅콩으로 요리할 수 있는 음식 105가지를 발표해서 땅콩 소비를 늘려 농부들의 수입을 늘렸습니다. 카버는 음식뿐만 아니라 몸에 바르는 크림, 구두약, 비누, 살충제, 화장품, 염료, 샴푸, 버터, 인쇄용 잉크, 접착제 등 무려 200개가 넘는 실용품을 발명했습니다. 땅콩 외에도 고구마를 이용한 118개의 실용품을 발명하여 미국 전체를 부요하게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푼의 로열티를 받지 않고 자기가 개발한 모든 것을 무료로 제공하였습니다.
한번은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이 카버에게 만약 그가 자기 회사로 온다면 새 연구소와 연봉 10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카버는 에디슨의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비평가들이 카버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 모든 돈을 가진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많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카버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만약 그 돈을 전부 갖는다면, 나의 사람들을 잊어버릴 지도 모르죠.” 조지 워싱톤 카버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그는 명성과 부를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쪽도 상관하지 않았고, 오직 세상을 돕는 일에서 행복과 명예를 찾고자 했다(He could have added fortune to fame, but caring for neither, he found happiness and honor in being helpful to the world).”
저는 교우 여러분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하게 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머물지 않고, 나에게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닮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조지 워싱턴 카바 같은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이렇게 확정(確定)해 놓고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조지 워싱턴 카바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