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1/2021 |
계절이 주는 축복(III) (Season’s Blessing Of God)
김태환 목사
마태복음 7:15-20
15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속은 굶주린 늑대이다. 16 그들의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있느냐?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있느냐? 17 마찬가지로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모두 잘려서 불 속에 던져진다. 20 그러므로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 것이다.” (쉬운성경)
15 "Beware of false prophets who come disguised as harmless sheep but are really vicious wolves. 16 You can identify them by their fruit, that is, by the way they act. Can you pick grapes from thornbushes, or figs from thistles? 17 A good tree produces good fruit, and a bad tree produces bad fruit. 18 A good tree can't produce bad fruit, and a bad tree can't produce good fruit. 19 So every tree that does not produce good fruit is chopped down and thrown into the fire. 20 Yes, just as you can identify a tree by its fruit, so you can identify people by their actions.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계절이 주는 축복’ 시리즈 설교 세 번째 시간입니다. 케임브리지에서 차를 타고 약 30분 정도 가면 ‘콩코드(Concord)’라는 동네를 만나게 됩니다. 조용하고 자연이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Ralph Waldo Emerson(1803-1882, 사상가), Henry David Tho-reau(1817-1862, 사상가), Margaret Fuller(1810-1850, 저널리스트, 여성 운동가), Amos Bronson Alcott(1799-1888, 교육자), 그리고 그의 딸 Louisa May Alcott(1832-1888, 소설가)등이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라는 19세기 미국 철학을 만들어낸 동네입니다. 그 때 초월주의 사상가들이 만들었던 잡지 이름이 ‘다이얼(The Dial)’이었습니다. 자연에 우리의 삶의 주파수를 맞춘다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I went to the woods because I wished to live deliberately, to front only the essential facts of life, and see if I could not learn what it had to teach, and not, when I came to die, discover that I had not lived. I did not wish to live what was not life(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본질적인 것들을 직면해 보고, 숲이 가르치는 것을 내가 배울 수 없는지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진정한 삶이 아닌 것을 살고 싶지 않았다)." 이 글은 헨리 소로우가 친구 에머슨의 권유로 콩코드에 있는 ‘월든 폰드(Walden Pond)’에서 2년 2개월 동안 자연 속에서 살면서 그가 왜 숲에서 살기로 작정했는지 그 동기를 쓴 글입니다. 그는 숲의 단순한(simple) 삶에서 느끼고, 체험하고 발견한 것들을 ‘월든(Walden)’이라는 그의 일기책에 기록했습니다.
소로우는 ‘월든의 숲(woods)’에서 인생의 에센스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소로우처럼 숲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지금 계절이 주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보스턴은 한국처럼 사계절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보스턴에서는 사계절이 주는 축복을 모두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사계절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봄은 생명과 희망(hope)의 계절이고, 여름은 모든 것이 성장하는 기쁨(joy)의 계절이고, 가을은 열매를 맺는 아름다움(beauty)의 계절이고, 겨울은 내일을 위한 안식과 반성(reflection)의 계절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열매’는 우리 삶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메타포(은유, metaphor)’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열매에 대한 말씀이 많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 것이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16-1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생전에 한자(漢字)를 많이 쓰셨습니다. 글씨 대회에 나가서 입상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글씨를 쓰시더니 연세가 들어가시면서 언제부터 글씨를 쓰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서울에 갔을 때 왜 글씨를 쓰시지 않느냐고 여쭸더니 글씨를 쓰려면 여러가지 준비할 것이 많은데 그런 일들이 힘이 들고 귀찮아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버님이 쓰신 글씨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중에 ‘진광불휘(眞光不輝)’라는 글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글이 좋아 보인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말의 뜻을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진광불휘’라는 말은 “참된 빛은 번쩍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빛이 참된 빛이라면 구태여 사람들의 눈에 띄려고 번쩍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된 빛이 아닌 가짜 빛은 사람들의 띄어야 하고 사람들의 눈을 속여야 하니까 요란하게 번쩍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특징은 좋은 말, 듣기 좋은 말로 자기들의 말을 그럴듯하게 포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말이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면 포장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속은 굶주린 늑대이다.” (15절) 거짓 예언자들 속에는 굶주린 늑대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숨겨야 하니까 양의 옷을 입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감쪽같이 속아넘어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거짓 예언자를 분별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이렇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를 보면 그들을 알 수 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You can identify them by their fruit, that is, by the way they act. A good tree produces good fruit, and a bad tree produces bad fruit).” (16-17절) 이 얼마나 지혜로운 말씀입니까?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시나무는 가시나무의 열매를 맺습니다. 포도나무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그 나무가 만들어내는 프로덕트(생산물, product)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만 들어서는 분별할 수 없습니다. ‘감언이설(甘言利說)’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귀에 솔깃한 달콤한 말이나 이로운 조건을 내세워 다른 사람을 꾀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말만 듣지 말고 그 사람의 행동을 보라는 것입니다. 행동은 그 사람이 맺는 열매입니다. 열매가 좋으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열매가 나쁘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열매는 나쁘지만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일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다. 열매는 그 사람이 만드는 프로덕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을 해보십시오. 열매가 그 사람이 생산하는 프로덕트라면, 좋은 프로덕트를 생산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좋은 프로덕트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해야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접근으로는 절대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쉽고 간단합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나무만 되면 우리는 자연히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맞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은 나무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요한복음 15:1)”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Take my yoke upon you. Let me teach you, because I am humble and gentle at heart, 마태복음 11:29)”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니까 나에게 와서 배우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멍에(yoke)’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사진을 한번 보세요. 이것이 ‘멍에’입니다. 소 같은 동물의 목에 걸어 고정시키고 끈을 달아서 마차를 끌고, 밭을 갈게 합니다. 멍에에 대한 사전의 정의를 보면 ‘a wooden crosspiece that is fastened over the necks of two animals and attached to the plow or cart that they are to pull(두 마리의 동물의 목에 걸고 잡아당길 쟁기나 수레에 부착된 나무 가로대)’라고 나와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보았던 멍에는 모두 소 한 마리의 목에 건 멍에였습니다. 그런데, 원래 멍에는 두 마리의 목에 건다고 합니다.
멍에가 무엇인지 잘 이해를 하면 왜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지식으로 배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듯이 하면서 예수님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맞습니까? 정말 예수님을 공부하듯이 배울 수 있다면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제일 예수님을 잘 배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Let me teach you. Take my yoke upon you”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를 예수님과 같이 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멍에를 내가 같이 지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저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삶과 인격을 배우라는 말씀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대로 예수님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시는 곳으로 내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시는 방향으로 나도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에 나의 삶의 다이얼을 맞추는 것입니다.
예전에 많이 불렀던 ‘마라나타(Maranatha)’의 ‘I Love You Lord(주님 사랑합니다, https://youtu.be/8hyBJwTKmQ8)’ 가사가 생각납니다. “I Love You, Lord / And I lift my voice / To worship You/ Oh, my soul, rejoice! / Take joy my King / In what You hear / May it be a sweet, sweet sound / In Your ear(주님 사랑해요.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제 목소리를 높입니다. 오, 내 영혼아, 기뻐하라. 나의 왕이신 주님, 주님이 들으시는 소리를 기뻐하세요. 그 소리가 주님의 귀에 달콤한 소리가 되기를 바래요).” 참 가사가 좋지요? 전 혼자 있는 조용한 시간에 이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그 때마다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淨化)되는 것을 느낍니다. 이 노래의 가사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요? 주님과 보조(步調)를 맞추는 삶을 살아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라는 메시지 아닙니까?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공부하고, 예수님에 대한 교양과 지식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교회마다 성경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교회마다 제자 훈련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자 훈련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훈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제자 훈련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는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삶과 예수님의 인격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생각나고, 그 사람이 행동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Henri Nouwen, 1932-1996)이 1977년에 출판한 ‘The Living Reminder(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라는 책의 내용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편지에 똑 같은 말을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편지(a letter from Christ, 고린도후서 3:3)’라고 했습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의 대사(Christ’s ambassadors, 고린도후서 5:20)’라고 했습니다.
뉴햄프셔에 가면 청교도 작가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생가(生家)가 있습니다. ‘주홍 글씨’가 호돈의 대표작이지만, 그가 쓴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 1850)’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어니스트라는 소년입니다. 이 소년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에 ‘큰 바위’에 얽인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 바위는 멀리서 보면 인자한 사람의 얼굴로 보입니다. 이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언젠가는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인물이 이 마을에서 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랍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 소년은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마을에서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마을 출신 중에 정계에 진출한 사람도 있었고, 돈을 많이 모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 출신인 한 시인이 마을을 찾아옵니다. 그 때 어니스트는 마을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니스트의 얼굴은 석양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어니스트를 본 시인이 이렇게 외칩니다. “여러분, 보세요. 이 분이야 말로 큰 바위 얼굴과 닮은 분 아닙니까?”
초등학교 때 읽었던 이 이야기의 감동이 어른이 된 지금도 생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 속에 뭔가 우리 마음을 울리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니스트가 이렇게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 마을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어니스트는 자기도 모른 사이에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날마다 성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인격과 만나고,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가서 배우면 좋은 나무가 됩니다. 그러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우리가 생산해 내는 프로덕트입니다. 프로덕트에 마음을 쓰지 말고 먼저 좋은 나무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