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2022 | 새해 메시지3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Where Does My Help Come From?)
김태환 목사
시편 121:1-8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개역개정)
1 [A song for pilgrims ascending to Jerusalem.] I look up to the mountains - does my help come from there? 2 My help comes from the Lord, who made heaven and earth! 3 He will not let you stumble; the one who watches over you will not slumber. 4 Indeed, he who watches over Israel never slumbers or sleeps. 5 The Lord himself watches over you! The Lord stands beside you as your protective shade. 6 The sun will not harm you by day, nor the moon at night. 7 The Lord keeps you from all harm and watches over your life. 8 The Lord keeps watch over you as you come and go, both now and forever.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까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태어났을 때는 엄마, 아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소나 말 같은 동물들은 어미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비틀비틀하다가 이내 걷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엄마의 젖을 먹어야 하고, 엄마의 품속에서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일년이 넘어야 겨우 걸을 수 있습니다. 청소년 시절에도 부모의 사랑과 ‘도움’을 계속 받아야 합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홀로 설 수가 없습니다. 결혼하고, 직장을 잡고 나서야 겨우 홀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많아지면 또 다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찬송가 67장 3절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질그릇같이 연약한 인생 주 의지하여 늘 강건하리.”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의 도움이 있어야 하고, 친구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게 지으셨고 사람의 마음에 영원의 감각을 주셨지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행하실 일은 다 깨달을 수가 없다(Yet God has made everything beautiful for its own time. He has planted eternity in the human heart, but even so, people cannot see the whole scope of God’s work from beginning to end., NLT).” (전도서 3:11) 개역 성경에는 ‘영원의 감각’이라는 말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아주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행하게도 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 옛날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I thirst for God, the living God. When can I go and stand before him)?” (시편 42:1-2)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목마름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 내면의 갈급함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하게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 목마름은 우리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 주신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알제리아)은 그의 책 ‘고백록(Confession)’에 이렇게 썼습니다. “Because God has made us for Himself, our hearts are restless until they rest in Him(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그 분 안에 안식하기 전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시편 121편 말씀을 볼까요?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시편들은 그 용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은 ‘A song for pilgrims ascending to Jerusalem’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순례의 길은 고달픈 길입니다. 여러분, ‘산티아고 순례길(Comino de Santiago)’에 대하여 들어보셨습니까? 프랑스의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해서 스페인을 걸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이르는 장장 780km에 이르는 긴 순례길입니다. 이 길을 걸으면 죄가 없어진다는 종교적인 이유로 이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고, 스페인의 멋진 경치를 감상하면서 힐링을 목적으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크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남자들의 경우 일년에 적어도 세 번은 예루살렘을 순례해야 합니다. 보통은 제물로 드릴 양을 데리고 순례의 길을 갑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가 약 140km이고, 가버나움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85km입니다. 보통 걸어서 5-6일 걸리는 길입니다. 순례자들은 시편 노래를 부르면서 예루살렘까지 등에 양을 지고 걸어갔습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가니까 순례의 길이 즐겁고 고단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순례의 목적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오늘 시편 말씀을 보십시오. 순례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꼭 맞는 노래 아닙니까? 순례의 목적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My help comes from the Lord, who made heaven and earth, 2절)”라는 가사 속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도움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최초로 밝혀진 것은 출애굽기 3:14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기 이름은 ‘יהוה’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네 글자는 모두 자음으로 되어 있어서 발음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네 글자로 된 하나님의 이름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I AM who I AM)’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영어식 표기로 ‘Jehovah’라고 하는데, 이것은 발음을 하기 위해서 억지로 만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할 수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도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말로 ‘주님(The Lord)’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후에 이 하나님의 이름을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 ‘ego eimi(에고 에이미)’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영어로 하면 ‘I AM’이라는 뜻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밤중에 바다를 건너가다가 폭풍을 만났습니다. 마침 그 배에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바람을 거슬러 노를 저으려고 애를 썼지만, 배는 앞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때 누군가 바다 위를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너무 무서워서 “유령이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가복음 6:50, 마태복음 14: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어로 ‘에고 에이미’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They were all terrified when they saw him. But Jesus spoke to them at once. “Don't be afraid,” he said. “Take courage! I am here!①” / ①Or The ‘I AM’ is here; Greek reads I am. 위기에 빠진 제자들에게 오신 예수님은 곧 ‘스스로 있는 분’ 여호와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will lift up my eyes to the hills [of Jerusalem]— From where shall my help come?”
이 시편 기자는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산들(언덕들)을 보면서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가 보고 있는 예루살렘의 언덕들은 무슨 언덕들이었을까요? 성서 학자들은 그 언덕들이 ‘시온산(Mount Zion, 765m)’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곽 서남쪽에 ‘시온문(Zion gate, 다윗의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을 나가면 시온산으로 바로 연결됩니다. 시온산은 다윗 성이 시작되는 곳이고, 다윗 왕의 무덤이 있고, 베드로 통곡교회가 있고, 최후의 만찬 장소로 사용된 마가의 다락방이 있는 성지(聖地)입니다. 시온산에서 보면 예루살렘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시온산은 한 지명(地名)이라기보다 예루살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지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눈을 들어 시온산을 바라봅니다. 나의 도움이 ‘시온산’에서 오는 것입니까?” 하고 질문하면서 “아닙니다!” 하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만일 누가 이 시편 기자에게 “우리의 도움이 성전에서 오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의 도움은 그 어디에서도 아니고, 오직 살아 계신 여호와에게서 온다고 합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 ‘I AM’ ‘에고 에이미’, 예수님께서 위기에 빠진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안심해라. 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여호와이심을 드러냈던, 그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나의 도움이 온다고 합니다. 우리를 돕는 힘이 역사와 전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돕는 힘이 웅장한 성전의 건물에서 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돕는 힘은 오직 ‘스스로 계시는 분’으로부터 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O 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How blessed is the man who takes refuge in Him!, NASB).” (시편 34:8) 이 시편을 쓴 사람이 다윗인데요. 다윗은 이 시편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고 있는 사람인지 아주 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refuge(피난처)’는 위태할 때 피하는 장소를 말합니다. 위기에 빠진 사람이 ‘피난처’로 피하는 것처럼, 인생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맞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떤 가요? 위기를 맞이했을 때,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보세요.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왕자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eople.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rinces).” (시편 118:8-9) 말씀을 더 볼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 very present help in trouble).” (시편 46:1)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46:5) 삶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로 피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 시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346년-1352년 사이에 ‘흑사병(The Black Death or Pestilence)’이 유행했습니다. 그 때 7,500만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약 2억명이 죽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리고, 1918년 2월-1920년 4월까지 ‘스페인 독감(Spanish flu)’이 유행했습니다. 그 때 전 세계 인구의 1-3%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 때는 지금처럼 인류의 지식이 발달되지 않았고, 의학적인 수준도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동안 인류의 지식은 엄청나게 팽창했습니다. 의학적인 수준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2년을 넘어 3년째로 ‘팬데믹’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망자 수가 5.5백만명입니다. 과거에는 인류가 미개한 상태에 있어서 미처 질병에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막대한 인명 피해를 냈다고 볼 수 있지만, 지금은 어떤 가요?
지금 하나님께서 이 ‘팬데믹’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인류의 지식의 발전과 과학 문명의 발달이 결코 인류에게 희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인류의 희망은 ‘스스로 있는 분’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불렀던 그 시편 노래 가사가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은 ‘시온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도움은 ‘왕자들(princes)’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도움은 인류의 지식과 의학의 발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도움은 ‘Artificial Intelligence’에 있지 않습니다. 비록 ‘AI’의 발달로 인간의 삶이 편리해지고, 삶의 질이 높이질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인류의 희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인류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팬데믹’을 통해서 인류에게 이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 중에 ‘펜데믹’이 몇 개월 안에 끝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 대로 이 지긋지긋한 ‘팬데믹’이 곧 끝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팬데믹’이 끝나면 인류에게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어떤 분이 시편 37:5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이 말씀을 묵상하고 이렇게 은혜 받은 것을 썼습니다. “God has a reason for allowing things to happen. We may never understand His wisdom, but we simply have to trust His will(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 지 하나님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지혜를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의 뜻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모두 하나님의 통제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희망이 이 모든 일을 자기 통제 속에 두고 계시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92-1983, 네덜란드)은 세계 제2차 대전 때 독일의 나치 수용소에 끌려가 갖은 고난을 겪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분입니다. 함께 수용소에 있던 그녀의 언니는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코리 텐 붐은 전범(戰犯) 국가인 독일로 들어가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Never be afraid to trust an unknown future to a known God(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불확실한 시대에 확실한 하나님께 여러분을 맡기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확실한 하나님을 여러분의 도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