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022 | 사순절 다섯째 주일
눈을 주님께 돌려(II) (Turn Your Eyes Upon Jesus)
김태환 목사
히브리서 12:1-11
히브리서 12:1-11
1 우리에게는 이렇게 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말고 우리 앞에 있는 경주를 열심히 합시다. 우리의 삶 속에서 방해가 되는 것들은 다 없애 버리고, 우리를 쉽게 옭아매는 죄를 벗어 버립시다. 2 우리 믿음의 시작이며, 또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모든 부끄러움을 참아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기쁨을 기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분은 하나님 보좌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3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그를 미워해서 악한 일을 할 때에도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지칠 때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본을 따르기 바랍니다.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고 있지만, 아직 죽을 정도까지 싸워 보지는 않았습니다. 5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격려하듯이 말씀해 주신 것을 잊었습니까? “내 아들아, 주의 훈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실 때,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벌을 주시고, 그의 아들로 받아들인 자들을 채찍질하신다.” 7 따라서 여러분이 받는 고난을 아버지의 훈계로 알고 견디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벌 주듯이 여러분을 대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훈계하지 않는 아버지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8 아들이면 훈계를 받게 마련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아무 훈계가 없다면, 여러분은 사생아이며 참아들이 아닙니다. 9 우리는 이 땅에서 모두 육체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 아버지가 우리를 훈계한다 해도 공경하는데, 하물며 영의 아버지의 훈계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생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0 이 땅에서의 아버지는 그들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우리를 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거룩하심을 닮게 하기 위해 벌하십니다. 11 훈계를 받는 바로 그 때에는 즐거움이 없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 훈계 때문에 더 나은 사람이 된다면, 우리에게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올바른 길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쉬운성경)
1 Therefore, since we are surrounded by such a huge crowd of witnesses to the life of faith, let us strip off every weight that slows us down, especially the sin that so easily trips us up. And let us run with endurance the race God has set before us. 2 We do this by keeping our eyes on Jesus, the champion who initiates and perfects our faith①. Because of the joy awaiting him, he endured the cross, disregarding its shame. Now he is seated in the place of honor beside God's throne. / ①Or Jesus, the originat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3 Think of all the hostility he endured from sinful people; then you won't become weary and give up. 4 After all, you have not yet given your lives in your struggle against sin. 5 And have you forgotten the encouraging words God spoke to you as his children? He said, "My child, don't make light of the LORD's discipline, and don't give up when he corrects you. 6 For the LORD disciplines those he loves, and he punishes each one he accepts as his child."① / ①Prov 3.11-12 (Greek version) 7 As you endure this divine discipline, remember that God is treating you as his own children. Who ever heard of a child who is never disciplined by its father? 8 If God doesn't discipline you as he does all of his children, it means that you are illegitimate and are not really his children at all. 9 Since we respected our earthly fathers who disciplined us, shouldn't we submit even more to the discipline of the Father of our spirits, and live forever? 10 For our earthly fathers disciplined us for a few years, doing the best they knew how. But God's discipline is always good for us, so that we might share in his holiness. 11 No discipline is enjoyable while it is happening - it's painful! But afterward there will be a peaceful harvest of right living for those who are trained in this way.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믿음의 시작이며, 또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봅시다(We do this by keeping our eyes on Jesus, the champion who initiates and perfects our faith).” (2절) 또 3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칠 때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본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고, 우리 믿음을 온전하게 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믿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율법 시대에 제사장들,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어떻게 믿음생활 했는지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구나. 헛되이 내게 예배를 드리고, 사람의 훈계를 교리인 양 가르친다(These people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Their worship is a farce, for they teach man-made ideas as commands from God).” (마가복음 7: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 이사야 29:13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이사야 시대이면 기원전 약 500-600년 전쯤 되거든요? 그 때 예배가 극도로 형식화되어 있었는데, 이런 현상은 예수님 시대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예배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형식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예배를 비판하시면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farce(우리 성경에 ‘헛되이 내게 예배 드리고’라고 나와 있음)’라는 말은 짧은 ‘소극(笑劇)’ ‘웃기는 연극’ 혹은 ‘코미디’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왜 ‘farce’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그 시대의 예배를 ‘코미디’라고 비판하셨을까요?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자들이 하나님과 아무 인격적(人格的)인 관계가 없이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예배를 드린다면, 그게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입에서는 “주여, 주여”라는 말이 나오는데, 정작 하나님께서 “(미안하지만) 난 너희가 누구인지 모른다(마태복음 7:7)”고 말씀하신다면, 이게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배울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the originator, the champion, the initiator and the perfecter of our faith’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요한복음 4:24)”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는 “우리의 원대로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라(마가복음 14:36)”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시며,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 예배, 기도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난 받을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난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삶과 직결된 실존적(實存的)인 문제입니다. 이 고난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고난의 때에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을 받는 중에 당황스러워하거나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됨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Dear friends, don't be surprised at the fiery trials you are going through, as if something strange were happening to you. Instead, be very glad - for these trials make you partners with Christ in his suffering.” (베드로전서 4:12-13)
고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굉장한 말씀 아닙니까? 베드로는 고국을 떠나 타국에 와서 온갖 생존(生存)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고난을 겪고, 어려움을 겪을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야단을 떨지 말라고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당황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고난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을 함께 나누는 예수님의 ‘파트너(partners)’가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는데, 주님의 제자들의 삶에 고난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고난이 없는 것이 이상합니다. 맞습니까? 우리에게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이름이 주어졌을 때, 그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the followers of Christ)’이라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이 고난 받으셨는데, 우리가 고난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의 때에 예수님처럼 그 고난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참아내야 한다고 합니다(2절). 예수님이 고난을 참아내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기쁨을 기대하셨기 때문이라(Because of the joy awaiting him, he endured the cross, disregarding its shame, 2절)”고 합니다. NIV 성경에는 이 말씀이 “Jesus who for the joy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scorning its sham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앞에 차려 있는 기쁨을 생각하면서 십자가와 십자가의 수치를 개의치 않고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고난이 오면 그 고난을 참고 견딥니다. ‘endure’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이 말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은 무작정 견디는 것이 아니라 ‘for the joy set before them(그들 앞에 놓여 있는, 혹은 차려 있는 기쁨을 위하여)’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도 바로 ‘그 기쁨(the joy)’을 위하여 주어진 고난을 참고 견디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그 기쁨’이 무엇일까요? ‘그 기쁨’이 무엇이길래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고난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면서 참으셨을까요?
한자성어에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생이 다하면 좋은 일이 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돈, 성공, 출세, 이런 것들입니다. 다분히 물질 지향적(志向的)인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기대하셨던 ‘기쁨’은 어떤 것일까요? C.S 루이스(C.S. Lewis, 1898-1963, 영국)가 쓴 책 중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 1942년)’라는 책이 있습니다. 고참급 악마인 ‘스크루테이프’는 이제 막 악마생활을 시작한 조카 ‘웜우드’에게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기 위해 자신이 평생 터득한 노하우를 전수해 줍니다. 그 노하우 중에 기쁨과 쾌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쿠르테이프’는 인간에게 ‘기쁨’이라는 감정 대신 쾌락을 가르쳐 주라고 합니다. 여러분, 기쁨과 쾌락, 이 비슷하게 보이는 두 감정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기쁨’은 친밀하면서도 진실한 사랑의 관계에서 나오는 감정입니다. 이에 반해 쾌락은 은밀한 습관 혹은 중독에서 나오는 이기적인 감정입니다. 막 걸음마를 배워서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기쁨일까요? 쾌락일까요? 기쁨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쁨’은 무슨 기쁨일까요?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희생하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 놓여 있는 무슨 ‘기쁨’을 보았을까요?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해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관계의 회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29 말씀을 한번 보세요. “For God knew his people in advance, and he chose them to become like his Son, so that his Son would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오래 전부터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의 아들과 같이 되도록 선택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아들이 많은 형제들 중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쁨’은 자신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많은 형제와 자매를 얻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쁨’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참고 견디신 것입니다.
셋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그를 미워해서 악한 일을 할 때에도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지칠 때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본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고 있지만, 아직 죽을 정도까지 싸워 보지는 않았습니다.” (3-4절) 이게 무슨 말인가요? 지치고 낙심될 때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일들보다 더 큰 고난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견디신 분이니까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고난을 참고 견디라는 말씀입니다. Jason Evert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Jesus didn’t suffer so we wouldn’t have to suffer. He suffered, so that we would know how to suffer(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고난 받은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단하지만 고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간단한 말이지만, 고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반대로 생각하잖아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지만, 우리는 고난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요.
크리스천의 고난에 대하여 오스왈드 체임버스(Oswald Chambers, 1874-1917, 영국)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No healthy Christian ever chooses suffering. He chooses God’s will as Jesus did whether it means suffering or not (어떤 믿음이 좋은 크리스천이라도 고난을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그것이 고난을 의미하든 의미하지 않든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뿐입니다).” 또 뉴욕에 있는 ‘리디머교회’의 담임 목사로 있는 팀 켈러(Tim Keller) 목사의 말도 한번 들어보시죠. “Jesus Christ did not suffer so that you would not suffer. He suffered so that when you suffer, you’ll become more like him. The gospel does not promise you better life circumstances; it promises you a better life(예수님은 당신이 고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고난을 받음으로써 더욱 자기와 닮은 사람이 되게 하려고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복음은 당신에게 좋은 삶의 환경을 약속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삶을 약속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이 받는 고난을 아버지의 훈계로 알고 견디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벌주듯이 여러분을 대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면 훈계를 받게 마련입니다...... 훈계를 받는 바로 그 때에는 즐거움이 없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 훈계 때문에 더 나은 사람이 된다면, 우리에게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올바른 길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7-8, 11절)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을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훈련하시는 ‘discipline’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에 ‘훈련(discipline)’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요즘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점점 ‘discipline’이 없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는 이것이 여러분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discipline’을 거부하는 이 시대의 풍조(風潮, fashion)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풍조에 알게 모르게 우리가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내 삶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옆에서 이러쿵저러쿵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본회퍼의 말을 하나 인용하겠습니다. “Cheap grace is the preaching of forgiveness without requiring repentance, baptism, church discipline, Communion without confession(값싼 은혜란 회개와 세례, 그리고 교회생활에 대한 훈련 없는 용서의 설교, 그리고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을 말한다).” 본회퍼는 이 ‘값싼 은혜’를 설교하는 것이 결국 교회를 병들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without church discipline(교회 생활에 대한 훈련 없는)’이란 말이 눈에 띕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말을 들어 보세요.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