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8/2022 | 대강절 넷째 주일 메시지
Love Came Down at Christmas
김태환 목사
요한복음 3:14-18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16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7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18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유죄 판결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쉬운성경)
14 And as Moses lifted up the bronze snake on a pol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15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have eternal life. 16 "For God loved the world so much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17 God sent his Son into the world not to judge the world, but to save the world through him. 18 "There is no judgment against anyone who believes in him. But anyone who does not believe in him has already been judged for not believing in God's one and only Son.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사랑의 촛불을 켰습니다. ‘사랑의 촛불을 켠다’는 것은 일종의 ‘은유적인 행위(metaphorical action)’입니다. 깜깜한 곳에 촛불을 켜면 주변이 밝아지듯이,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상에 참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일들을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Christina Georgina Rossetti(1830-1894)라는 영국의 시인이 ‘Love Came Down at Christmas(사랑은 크리스마스에 내려왔네)’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 시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캐럴로 부르고 있습니다.
Love came down at Christmas, 사랑은 크리스마스에 내려왔네
Love all lovely, Love divine; 모두가 사랑스러운 사랑, 신성한 사랑
Love was born at Christmas; 사랑은 크리스마스에 태어났네
star and angels gave the sign. 별과 천사들이 그 표적을 보였네
Worship we the Godhead, 우리는 삼위(三位)의 하나님을 예배하네
Love incarnate, Love divine; 사람의 몸을 입은 사랑, 신성한 사랑
worship we our Jesus, 우리는 예수님을 예배하네
but wherewith for sacred sign? 하지만 무엇으로 성스러운 표적을 (예배할까?)
Love shall be our token, 사랑은 우리의 징표이며
Love shall be yours and love be mine, 사랑은 당신의 것이며 나의 것
Love to God and to all men, 사랑을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Love for plea and gift and sign 간청과 선물과 표적을 위한 사랑을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멀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광야는 삶에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지 않는 곳입니다. 마실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자라는 식물은 키가 작고 가시가 난 엉겅퀴 같은 것들입니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합니다. 인간이 가진 기술과 지식과 경험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는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인간성의 바닥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백성들은 지도자였던 모세와 아론을 향해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백성을 광야로 데리고 오신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이었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否定)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감사의 마음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의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신속하게 감사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감사함으로(with thanksgiving)’라는 말은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감사에 대한 꺾이지 않는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과 계획이 들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때에도 감사의 마음을 계속 유지하면 그 때 내 삶의 주인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빌립보서 4:6 말씀의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할 때 갑자기 어디서 ‘불뱀들(poisonous snakes)’이 나타났습니다. ‘불뱀들’은 불평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물었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갔습니다. 다급한 모세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살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구리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라. 뱀에 물린 사람은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다.” (민수기 21:9)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모두 치유된 것입니다. ‘구리뱀’에서 무슨 치유의 능력이 나온 것이 아니라,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산다는 말을 믿고 그대로 행했던 믿음이 이 사람들을 살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As Moses lifted up the bronze snake on a pol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have eternal life.” (14절) ‘The Son of Man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높이 들린다(lifted up)’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들린다(lifted up on the Cross)’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나를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福音)’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Good News)’, 그리스 말로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입니다. 아주 쉬운 ‘구원의 길’이 믿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어린 아이들도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믿으면 구원을 얻고, 연세가 많으신 분들도, 학자들도,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사람들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누구나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저 분이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이렇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6절) 이 말씀은 개역성경으로 읽어야 제 맛이 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3:16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세상’을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세상’은 ‘코스모스(κόσμος)’라는 말입니다. ‘우주(universe)’라는 뜻도 있고, ‘질서’라는 뜻도 있고, ‘the whole of creation(모든 피조물들)’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말 속에 저와 여러분도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이 기록되었을 때 세상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Live clean, innocent lives as children of God, shining like bright lights in a world full of crooked and perverse people(구부러지고 삐뚤어진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빛들처럼 깨끗하고 순결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십시오).” (빌립보서 2:15) 2,000년 전에 이 말씀을 쓴 바울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세상’에는 죄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 속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깨끗한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로 가득한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perverse people’은 단순히 ‘삐뚤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 사람들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는 사람들(로마서 1:26-27)’이라고 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400년 동안 이런 사람들과 소통을 끊고 침묵하셨겠습니까? 누가 이 400년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신 기간’이라고 했는데,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신’ 끝에 죄로 물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즉흥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태초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구원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세상에 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사람들만 살고 있었다면 독생자가 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들을 미워하면 안 되고, 피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사도행전 10:15)”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가 속되다고 피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이유로 세상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사랑이 내려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죄로 물든 이 세상에서 깨끗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의 별처럼 빛을 비추라고 합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드러내라(로마서 12:2)”고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가끔 기도할 때 ‘다음 세대’를 걱정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본심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다음 세대’ 걱정하기 전에 ‘지금 세대’인 여러분 자신들을 먼저 걱정하십시오. ‘지금 세대’가 잘하면 ‘다음 세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믿음은 ‘지금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pass on)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메타버스(metaverse)’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가상(假想)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우주(universe)를 의미하는 ‘버스(verse)’의 합성어입니다. ‘확장 가상 세계’ 혹은 ‘가상 우주’라고 번역합니다. 현실 세계를 디지털 기반의 가상 세계로 확장해 가상 공간에서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시스템입니다. ‘메타버스’가 우리의 코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변화될 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좋은 쪽으로 발전되어 나갈 수도 있고, 우리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지금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구원의 대상으로 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세상으로 내려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피하지 말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과 사명은 과거 어느 때보다 막중(莫重)해졌습니다. 지금의 목회 형식과 교회에 대한 고정 관념을 가지고는 변화된 세상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메시지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지난 ‘리뉴(ReNEW)’에 좋은 세미나가 많이 열렸습니다. 저는 김연준 목사님의 세미나에 들어갔습니다. 세미나의 내용은 새로운 시대에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전할 메시지는 과거와 같은 일방적인 메시지의 선포가 아니라 메시지에 대한 ‘창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세미나에서 제시한 것이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었습니다. 새 시대의 크리스천들은 ‘스토리텔러들(storytellers)’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내가 복음의 능력으로 고난의 시간들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각자의 ‘스토리’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새로운 시대는 일방적인 교회의 메시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쓴 ‘스토리(삶의 메시지)’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요한복음 3:16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구체적인 사랑(concrete love)’입니다. 하나님은 ‘His only begotten Son (독생자, NASB)’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아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진 ‘신적인 특권들(divine privileges)’을 모두 포기하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humility of Jesus(예수님의 겸손)’ 혹은 ‘humiliation of Jesus(예수님의 굴욕)’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빌립보서 2:5-8).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운 이야기 배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비하’와 ‘창피’와 ‘굴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베들레헴에 방이 없었다는 말씀으로 표현했습니다(누가복음 2:7). 여관에 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잠을 자게 된 마리아의 요셉은 그날 밤에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manger)에 뉘었습니다. 똑 같은 사실을 요한은 “그분이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 1:11)”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탄생 이야기에 반전(反轉)이 있습니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누가복음 2:11-12)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는 그 아기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인 것을 보여 주는 ‘징조(sign)’였습니다. 이 ‘징조’를 보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 근처에서 그 밤에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영접하는 사람,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누구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요한복음 1:12)
Christina Georgina Rossetti의 시 구절 중에 ‘사랑은 우리가 가진 징표(Love shall be our token)’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던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사랑의 ‘징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토큰(token)’이라는 말에 ‘징표’라는 뜻이 있지만, 우리 주머니 속에 있는 동전 같은 것들을 ‘토큰’이라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내려옴으로써 우리는 주머니 속에 ‘토큰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Rossetti는 ‘Love for plea and gift and sign(간청과 선물과 사인을 위한 사랑)’ 이렇게 그의 시를 마칩니다. 우리 주변에 사랑을 호소하고 간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사랑의 토큰을 나누어 줘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가 사랑의 선물을 줘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사랑의 토큰들을 나누어 주십시오. 우리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사랑의 토큰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드러내는 사인들입니다. 이 모든 일은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내려옴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