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1-4, 6:11

1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심> 그후, 예수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내내 금식하셔서, 매우 배가 고팠습니다. 3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고 명령해 보시오.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에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6: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쉬운 성경)

1 Then Jesus was led by the Spirit into the wilderness to be tempted there by the devil. 2 For forty days and forty nights he fasted and became very hungry.3 During that time the devil came and said to him, “If you are the Son of God, tell these stones to become loaves of bread.”4 But Jesus told him, “No! The Scriptures say, ‘People do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God.’

6: 11 Give us today the food we need (New Living Translation)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번주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에 이르기까지 40일동안 그리스도의 빛이 가장 어두워지는 영적 여정을 걷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기 위한 영적 순례의 여정으로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두 가지의 양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말씀이고 또 하나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어떤이들은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무익한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죄를 회개하기 위해 음식을 삼가며 금식을 하는 것은 영적으로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금식을 통해서 욕망과 욕구를 죽이고 십자가를 더 가까이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주님은 육체는 악하고 영혼만 선하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가 마음 안에 머무를 때에 식탁의 자리도 떡을 떼며 소중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일상의 변화로 이어지며, 예배는 삶의 자리와 분리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주기도문의 간구 중에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날은 기도하지 않아도 일용할 양식이 넉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먹고도 쌓아 둘 만큼 넉넉한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의 기도가 어떻게 느껴질까요? 이제 일용할 양식의 기도는 우리의 삶과는 편차가 너무 크게 느껴지기에 이 기도는 배고픔을 겪는이들에만 필요한 기도일까요? 아니면 가난에 굶주리고 있는 빈민국가의 사람들에만 해당되는 기도일까요? ‘

 

일용할 양식의 원어는 헬라어로 πιούσιος, ‘에피우시오스입니다. 로고스 주석에 보면 에피우시온단어의 뜻은 날마다의 것을인데, 이 단어는 에피우시아의 합성어입니다. ‘우시아에 대한 단어의 의미를 추적해 보면, 첫째는 존재하기 위하여 필요한이란 뜻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날마다 그날에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달라는 의미겠지요. 둘째는 오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내일의 위한 양식을 공급해 달라는 의미입니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다가오는 날을 위하여 공급되는뜻으로 일용할 양식을 받아들였습니다. ,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때 앞으로의 24시간을 가리킵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루 동안 필요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두가지의 뜻은 하나님의 시간에서 보면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점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의 인식 차원이 아니라 다차원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가지 해석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시간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현재는 과거가 되지요.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거하시려면 우리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행하실 하나님의 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억하고 기념하라 말씀하고 있는ㄴ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고 기억합니다. 예배하고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예배자가 현재에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영원한 시간과 교차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른 상황과 다른 시대에 쓰여진 책인데 모든 책이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알게 해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를 성령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많은 성서의 기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2천년 전 그리스도가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주셨구나 믿어지는 일도 성령께서 해주십니다. 성경 곳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되고, 주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어떻게 간섭하시는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시간이 우리의 시간 안에 뚫고 들어 온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안식과 쉼을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는 것이 힘이 들고 불편한 일이라면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아가는 일과 봉사하는 일들이 불편하고 고생스럽다는 것은 이미 믿음생활이 누림이 아니라 의무가 되어 형식, 위선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를 하는 것도 이러한 개념에서 보면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들어오심간섭하심은 인류의 역사 전체에 걸쳐 이루어 졌고, 지금도 이루어 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한몸을 이루었습니다. 마치 밀가루들이 하나로 모여서 빵이 되듯이 떡을 떼는 교인들은 하나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한몸이기에 연약한 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나누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됨을 기억하며 일용할 양식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기도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떡도 포함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인간이 육체적 존재임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그래서 음식으로 인해 몸을 해치면 안됩니다. 몸이 아프면 밥맛을 잃게 됩니다.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소화기관이 정상이어야 하고, 식욕이 있어야 되는데 일용할 양식을 잘 먹을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들은 식탁의 교제속에서 이 은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지요.

 

디너처치(dinner church)라는 것을 들어보셨나요? ‘평범한 저녁그리고 교회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인데, 말 그대로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먹으며, 비기독교인들을 초대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 주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디너처치(dinner church)라 이름한 것이지요. 초대교회의 문헌인디다케에 보면 “주일마다 여러분은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드리시오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의 범법들을 고백하여 여러분의 제사가 깨끗하게 되도록 하시오.”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교회의 건물이 없었으니까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에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떡을 나누고(성찬제사(예배)를 가정에서 드리며 생명의 교제를 나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갈릴리 호수로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제자들은 다시 고기 잡은 일로 돌아가서 밤새도록 잡지만 고기 한마리 잡지 못하고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우고 물고기를 구우시고, 떡까지 준비하셨습니다배고픈 제자들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을 알고 마련하시고 기다리셨습니다.(21교회마다 공동체를 위해 식당에서 섬기시는 분들의 손길을 보면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왜 헌신하는 것이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공동체의 식탁을 위해 주님의 사랑으로 준비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교회 안에 가족모임, 팀모임, 소그룹 모임을 통해서 이런 일들이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모임 가운데 믿지 않는 이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믿음이 자라가고 섬김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자주 만나서 식사를 함께하면 그 사람과 친밀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학교에서 배운 것은 밥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게 하시는 훈련입니다. 오늘날 일용할 양식의 개념에는 자녀들을 위한 양육비가 필요하고, 집을 소유하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렌트비, 그 밖에 하루 동안의 사용하게 되는 모든 양식이 충당이 되어야 합니다. 이뿐입니까? 소비문화는 소비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라고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대중매체를 통해서 특정상품이 유행이 되면 소유하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생각을 지니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입학시킨 것입니다.

 

광야라는 죽음의 땅에서 매일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40년이라는 방랑생활 동안에 매일의 양식인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주시며 그들을 낮추시고 훈련하셨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학교가는 자녀에게 일주일 전에 지었던 밥을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라면 매일 새밥을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 광야의 시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날마다 새로운 양식을 주시며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대는 밥만이 아니라 일용할 마음, 일용할 삶의 활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삶의 의미와 새마음, 정결한 마음이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매일 공급하시는 삶의 너머에 하나님이 계심을 보아야 합니다. 시간도, 건강도, 물질도 주어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함 가운데 하나님이 매일 공급해 주시는 것에 대한 훈련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만나가 하늘에서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안되었을까요?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배가 고프다고 불평한 것이 문제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새밥을 해주시며 출애굽 공동체가 하나님을 의존하고 사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로 나가십니다. 예수님 정도면 광야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 사역을 하셔도 되었을텐데, 주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십니다. 40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를 하셔서 배가 고프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때 시험하는 자가 와서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돌을 떡으로 바꿔 보라고 하니 주님은 처해진 현실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떡속에 담긴 삶의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와 같은 고통의 시간을 하나님은 언제든지 거둬 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광야의 시간은 자신의 백성들이 영원한 생명의 관점을 바라보며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다루심입니다. 예수님은 시험하는 자를 쫓으실때에 신명기 83절을 기억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8:3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낮추시고, 굶기셨다가 만나를 먹여 주셨소. 만나는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조상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오.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까닭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오.”

 

예수님은 성도들이 세상속에서 단지 떡 하나에 의지해 사는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육체적 생존방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에서 진리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일용할 양식을 내가 열심히 벌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라고 착각합니다. 식당에 가서 내가 번 돈을 지불하고 먹었으니 내가 이룬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생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기에 우리가 살아 있고, 매일 생명력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교회 역사학자가 알렌크라이더가 쓴 초대교회 교인들의 일상을 보면, 초대 교인들은 도시의 음식을 먹고, 시민으로서 모든 일에 참여하지만 거주하는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초대교인들은 도시 문화속에 들어가서도 당시 로마 문화를 비판하며 시대 흐름에 도전하는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며 거주하는 나그네들이라 불렸습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힘이 없고 경제적 능력이 없어도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해 억눌린 자들을 자유로 인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새하늘과 새땅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은 일용한 양식을 채우는 일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400년 종살이에서 출애굽 시켜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루라도 잊어 버리시면, 이스라엘 전체가 굶게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일용할 양식에 담긴 공동체의 과업을 발견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에게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기도문의 구성을 보면 하나님께 대한 기도의 간구가 나오고 우리를 향한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를 위한 첫번째 간구가 일용한 양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라는 수식어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라는 말 안에는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 단지 먹을 것만이 아니라 어려움으로 하루를 살아갈 힘 조차 없는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양식은 단지 먹을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 모든 자원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는 일용할 양식이 넘치는 사람은 이웃과 나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있는 존재들이기에 일용할 양식을 더 누리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취하고 부당하게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을 드리는 성도들은 우리에게로 시작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기도의 그릇을 넓혀가야 합니다. 한국사람은 어릴때 내 아빠 내 엄마 하지 않고 우리 엄마 우리 아빠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릴때부터 자연스럽게 우리의 개념이 내 자녀, 내 가족, 내 식구가 먹을 양식이라는 개념에 익숙합니다. ‘우리에게라는 수식어는 형제의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 절박한 상황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만나를 남겨 두면 다음날 다 썩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탐욕에 물든 마음, 욕망의 노예로 살게 되는 삶은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허기진 마음을 채우려고 소유하고 또 소유해도 배고픔이 없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신가요?

 

<부시맨Bushmen>이라는 영화를 보셨지요? 원제는 ‘The Gods Must Be Crazy’인데 , 영화속 배경은 아프리카 덤불 속에 사는 부시맨들입니다. 경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 상공을 낮게 비행하던 백인이 콜라를 마시고 빈 병을 비행기 밖으로 던졌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병이 부시맨 마을에 떨어지게 됩니다. 부시맨들에게 하늘에서 내려 주신 그 병은 신비로운 요술 방망이 같기도하고, 밀가루 반죽을 밀어 보기도 하고,  과일을 놓고 내려치니 과일 즙이 됩니다.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장난감이었지요. 용도가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문제는, 하늘이 내려 주신 그 신비한 콜라병을 서로 독차지하려다 부시맨들이 그만 원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침내 족장은 자신이 아는 세상 끝까지 가서 콜라병을 절벽 아래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부시맨들은 다시 평화를 되찾게 됩니다. 콜라병 하나 때문에 온 부시맨이 원수지간이 된 이유는, 하늘이 내려 주신 것을우리가 함께 쓰려 하지 않고 저마다혼자 독점하려 하니, 콜라병 하나를 놓고도 분란이 생겼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은 빵을 저축하고 싶어합니다. 성공하고 싶고, 좋은 차를 타고 싶고, 유명해 지고 싶고, 세상속에서 거장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먼저 지녀야 합니다. 성공과 축복만을 향해서 기도하는 일은 자본주의적 가치일 뿐이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의 메시지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기도는 청지기의 삶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에게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바르게 모으고 사용하겠다는 기도입니다. 양식을 왜 모으는지, 쓴다면 왜 쓰는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명확한 기준과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 내 2024년 하계올림픽 개최 후보지로 선정된 보스턴시가 유치 신청을 철회했다고 합니다. 보스턴 시의 발전 보다 다음세대들에게 재정적 부담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마틴 월시 보스턴 시장은  “올림픽을 다시 유치하는 것이 미국에도 좋고 보스턴에도 장기적 혜택을 가져오리라 믿는다 하지만 어떠한 혜택도 우리 시의 재정적 미래를 넘겨줄 만큼의 가치는 없다고고 밝혔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제어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물질의 축적과 인간의 끝없는 욕심은 보다 좋은 미래를 가져다 줄 것 같지만 하나님으로 떠나게 만듭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매일의 기도는 우리가 가진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이 거둬 가실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바른 생각과 옳은 기준으로 하나님 앞에 있음을 매일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셋째로, 일용할 양식은 쉼을 주시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먹는 것을 앞두고 매일 식사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의 영성은 매순간 노동을 하며 안식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안식도 필요한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기도를 드리며 죄, 불안, 경쟁, 불평, 정죄, 불확실함으로 부터 안식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죄인들이 자주 초대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나누며 하나님 나라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나누는 자리에 주인이시고, 그 자리에 온 모든 죄인들은 떡을 나누며 교제를 즐겼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때에 장래에 예수님의 식탁 앞에서 믿음의 교우들이 둘러 앉을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때에는 십자가에서 우릴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손수 떡을 떼어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예배는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들을 마시며 생명을 누리지만 언젠가 우리에게 임할 날을 기다리며 일용할 양식의 기도는 안식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선교사들은 일용할 양식을 나누지 않는 것을 죄라고 여기며 조선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이 떡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1901년 한국 이교의 심장 속으로 오랫동안 잊어버린 노래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파고들어 갔습니다. 그 멜로디는 무교의 정령숭배에 있는 두려움의 중얼거림을 삼켜버리고, 조상 제사에 있는 절망적인 실망의 속삭임과 불교의 윤회 사상에 내재된 고뇌의 신음 소리를 그리스도 십자가 영생에서 부르는 즐거운 승전가로 변화시켰습니다. 그 옛날 뱃길을 따라 전해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기도는 한국땅에 수많은 십자가와 교회를 세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 형성사라는 책에 실린 카우퍼의 장시 자비’(Charity)의 일부분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한국에도 옛날 항로를 따라 전해진 주님의 떡은 하늘과 소통하는 어떤 이가 순수한 강물이 발원하는 곳에서 항아리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 미천한 우리의 물과 다시 섞었는데 이는 마치 천사가 날개를 치는 것과 같았다. 불멸의 향기가 순례자의 길을 가득 채우고 그의 보물을 어디서 구했는지 우리에게 말한다. 그래서 보물을 가득 실은 범선은 태양이 인도의 향신료 해안에서 이글거릴 때 서구 세계의 어떤 안전한 항구에 그 닻을 내리고 돛을 접었다. 그 배가 어느 항구로 갔는지 묻는 것은 헛되다고 향기에 젖은 바람이 우리에게 알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