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2023 | (사순절 메시지 5)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Conquer Evil By Doing Good)
유민용 목사
로마서 12:16-21
16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마십시오.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과도 기꺼이 사귀십시오. 스스로 지혜 있는 척하지 마십시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이 보기에 선한 일을 하십시오.
18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19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직접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원수 갚는 것이 나에게 있으니 내가 갚을 것이라.’”
20 여러분은 이렇게 하십시오. “원수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으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쉬운성경)
16 Live in harmony with each other. Don’t be too proud to enjoy the company of ordinary people. And don’t think you know it all! 17 Never pay back evil with more evil. Do things in such a way that everyone can see you are honorable. 18 Do all that you can to live in peace with everyone. 19 Dear friends, never take revenge. Leave that to the righteous anger of God. For the Scriptures say,“I will take revenge; I will pay them back,” says the Lord.
20 Instead,“If your enemies are hungry, feed them. If they are thirsty, give them something to drink. In doing this, you will heap burning coals of shame on their heads.” 21 Don’t let evil conquer you, but conquer evil by doing good.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새벽기도회에 참여하며 순례길을 걷고 있습니다. 순례길을 걷고 있음을 잊고 계시진 않으시죠?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계속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조각 난 마음, 상처 난 마음에 찾아가셔서, 깨진 마음의 틈으로도 생명의 빛을 비추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에게 ‘마음의 회복’과 “마음의 평안”을 주십니다.
오늘날 세상이 바라보고 싶은 교회의 이미지는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것이지요.영국 런던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리빙스턴을 비롯하여 엘리자베스 여왕, 음악가. 건축가, 시인, 정치가, 귀족 등 영국의 유명 인사들의 무덤이나 비석들이 그 사원 안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광객들은 영국에서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제일 먼저 방문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본래는 그런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당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자기가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람들을 확인하고 싶어하지만, 정작 그 예배당이 세워지게 역사하신 하나님께는 무관심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모습이 아닐까요? 로마서를 기록하던 시기에는 기독교의 교리나 신학의 체계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 세기를 거쳐 오면서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신학적 체계가 형성 되었습니다. 감리교회는 성서와 이성과 전통과 경험이라는 4가지 표준을 삼고 신앙의 깊은 뿌리를 내렸습니다. 즉 ‘영적인 예배’라는 것은 ‘성서적 예배, 전통적 예배, 경험적 예배, 이성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영적인 예배’ 외에 다른 수식어를 붙이면 아직 낯설어 합니다. 사실 이 표현들은 대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경험’을 통해 회심 체험을 하게 하시고, ‘이성’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게 하시지요. 존 웨슬리는 기독교 관련 책들을 많이 읽었고, 200여권의 ‘고전’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표준이 됨은 더 말할 필요 조차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을 시작하며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롬 12:1) 여기서 영적(靈的)으로 번역된 헬라어 ‘로기켄:λογικην’은 ‘로기코스 :λογικοσ’에서 나온 말로 그 뿌리가 '로고스:λογοσ’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reasonable인데, 즉 '합리적, 이성적'이란 뜻을 지녔습니다. 영적인 것은 곧 합리적,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성과 이성은 구분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지성이 차고 넘칩니다. 우리는 지성으로 ‘성서적 지식’을 채울 수는 있으나 ‘진리의 경험’까지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영적 경험은 이성적으로 성경을 탐구 하는 이들이 ‘성령을 통해 구원의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몸을 값진 제물을 드리는 것에는 ‘삶의 전인격’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의지, 소유와 능력, 감정과 재능까지 모두를 드리는 것입니다. 헬라어 몸을 뜻하는 ‘소마(σώμα)’는 ‘전인격’이라는 뜻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 드리고 봉사하는 일은 삶 전체를 하나님과 연결해서 섬기는 삶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몸 안에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시고(고전6:19)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에(고전6:15) 전 인격적인 몸에 대한 자기 통제가 바로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롬12:1) 약한자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 חֶ֫סֶד 인’ 것이지요. 어떤 점에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은 쉽습니다. 때로는 교회에서 자존심도 살리고 명예심도 얻을 수 있고, 종교적인 위안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삶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은 형식적으로 할 수 있지만 자기의 삶 전체를 드리는 일은 온전히 드려지지 않는 한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기독교 신앙을 철저하게 삶속에서 규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에 대해서 말씀을 합니다.
첫째로, 한마음이 되기 위해 스스로 지혜로운 척 하지 않는 것입니다.
16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마십시오.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과도 기꺼이 사귀십시오. 스스로 지혜 있는 척하지 마십시오.
‘지혜’는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며, 악을 미워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고,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마음의 품을 내어주고, 스스로 지혜로운 척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성도들은 스스로 지혜 있는 척 하지 않습니다. ‘Philosophy’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에서 사랑이라는 ‘Phileo’와 지혜라는 ‘Sophia’가 결합하여 구성된 합성어입니다. 인간이 누구인지를 다루는 가장 심도 깊은 학문으로 인식되는 ‘철학’은 본질적으로 ‘지혜를 사랑함으로 비롯된 학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믿는 자들에게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10:21)
‘지혜로운 사람’은 악을 멀리합니다. 인류의 시작을 보면 뱀이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에게 지혜를 약속합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면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너가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부터 나온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가인은 도시 문명의 개척자가 아닙니까? 인류의 첫번째 영웅이었습니다. 가인으로 부터 도시문화가 세워지고, 인류의 정복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에는 ‘영웅이 아니라 실패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지혜의 열매였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한자라고 고백하는 의인을 통해 세상을 바꿔가십니다. ‘여러분은 영웅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 안에 머무르는 의인이 되기를 갈망하십니까’
우리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척 하면 안됩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서로에게 화를 내게 될 것이고,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교만한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요한 1서 3:5) 우리가 바라 보아야 할 길은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쏟으신 십자가의 물과 피입니다. 십자가에서 입증해 주신 사랑의 길 뿐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구원하신 ‘최고의 지혜’입니다.
성경은 뱀이 인간을 타락시켰다고 기록합니다. 요즘 보면 파충류과의 뱀이나 도마뱀을 반려동물처럼 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요. 고대 근동에서 뱀은 신처럼 떠 받드는 우상이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을 보면 뱀의 왕관을 썼지요. 성경에서 뱀은 사단을 상징합니다. 뱀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입니다.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 상태입니다. 머리를 치켜든 뱀이 이집트 왕 파라오의 왕관 정면을 장식하고 있는데, 뱀은 절대 왕권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이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섬겼던 태양신은 뱀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시기 위해 “네 손을 내밀어 뱀의 꼬리를 잡으라”(출4:4)고 말씀하셨습니다. 뱀이 상징하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두려워 했던 모세였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뱀의 꼬리를 잡았더니, 그 뱀은 이집트의 왕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왕권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지팡이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지도력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언약의 지팡이’를 들고 계신가요? 성도들은 평생 ‘누가 왕인지의 싸움’을 하며 살아갑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며 살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에덴동산에도 사단은 들어와 유혹을 했습니다. 사단은 의인 욥도 공격했고 광야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도 시험했습니다. 사단은 믿음의 성도들의 삶에도 유혹 할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싶어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선과 악의 선택 앞에서 형제를 미워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부부는 허락하신 배우자 외에 다른 이성들을 볼때에 선악과로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들도 죄가 들어올때마다 선악과를 떠올리며 은혜의 통치를 따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 달라고 말씀하셨지요.(마 6:13) 이것이 악에서 지지 않는 길입니다.
둘째로,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이 보기에 선한 일을 하십시오.
18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원수 된 이들을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어떠한 공로나 자격이 없음에도 선행적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나에게 끊임없이 부당한 일을 저지르고, 비방하고, 악담하고, 괴롭히는 누군가가 있다고 합시다. 격한 악이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반응을 일으키는 자가 바로 악이고, 악의 존재이며, 악한 구조입니다.
이 세상의 구조는 사람들의 일생이 칠흑 같이 어둠이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둠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이런 절망을 운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빛을 잃어버리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거짓, 돈의 유혹, 쾌락, 비방, 미움 등 수많은 죄의 요소들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악에 마음이 유혹되어 질 때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만일 세상의 방법데로 대응하거나 세상의 모습으로 대응하는 것은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조직적으로 악의 구조를 만들어 희생량을 만들고 악의 뜻을 이루려 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라면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가 생각이 나야 합니다. 누군가를 비방하고 싶을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마음이 불편해 져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것은 입을 열어 화를 내지 말고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을 행한 이들이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고, 그에게 해가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믿음의 자녀들도 악인으로 만들려고 호시탐탐 우는 사자처럼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벧전 5:8) 오직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2천년 동안 믿음의 선배들이 기독교 역사 가운데 입증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선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은 악이 더 강해 보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선한 마음을 품고 더불어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평화를 뜻하는 샬롬은 ‘완전하다, 온전하다’라는 뜻을 지닌 ‘실람’이라는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실람’이라는 동사의 의미는 "지불하다, 빚을 갚다"는 뜻인데, 성경에서 샬롬의 의미를 보면 평화의 뜻 외에도 ‘구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죄를 짓는 사람은 빚을 지고 있는 상태이니까 평안이 없고, 구원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과 화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력에도 화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성도들이 따라야 하는 명령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라는 말씀을 믿으며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라는 것이 악에 대해서도 가볍게 여기고 그냥 넘겨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악은 우리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고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선한 것을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롬 12:19을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악에 대해 심판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악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합니다. 내가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명령은 “맡기라”입니다.
캐나다의 한 커피숍 Faraday Café는 휴대폰 신호를 차단하고 교란시키기 위해 지어졌으며 무선 "블랙홀"을 의도적으로 생성하려고 시도한 세계 최초의 카페였습니다. 소유자는 엔지니어와 협력하여 상점 주변에 외부 신호를 차단하기 위해 패러데이 케이지로 알려진 것을 만들었습니다. 소유자인 줄리안 토마스(Julien Thomas)는 디지털 기술이 너무 빨리 발전하여 사람들이 사용에 대한 에티켓이나 윤리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실제로 없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토마스는 고객이 지속적인 인터넷 연결 없이도 일상생활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생각마져 너무 빨라졌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로 부터 나쁜 말이 끊어져야하고, 흘러다니는 죄가 끊어져야 합니다. 마치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했던 것처럼 우리의 텅빈 마음안에 들어오는 우울과 불안, 근심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세번째, 하나님은 이해 할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20 여러분은 이렇게 하십시오. “원수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으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으라 말씀합니다. “원수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으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는 것”입니다. 즉, ‘숯불을 머리에 쌓는다’ 라는 말은 성도의 친절한 행위가 원수로 하여금 심적 고통을 느끼게 하여 회개케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교만이 있고, 피속에 욕망과 복수심을 향한 끌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복수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네 손에 피를 묻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이해할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 뿐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공식들이 있습니다. ‘성공의 법칙’ ‘공부의 비결을 통해 명문대 들어가기’ ‘세상의 모든 공식’ ‘수학자를 알면 공식이 보인다’ 이뿐만이 아니라 요즘에는 음식을 만드는 레시피 공식도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소개되고 있지요. 수많은 인생의 비법을 알려주는 공식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만큼 세상이 빠르게 변화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식이 있습니다. 이미 증명된 공식이며, 수천년 동안 변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았던 공식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벌하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깊은 웅덩이 속으로 떠밀어 넣으셨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신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 공식’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는 문제를 세상의 공식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성령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는데 더 이상 성령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세상의 전문성과 방법을 의지할 때에 그 순간 교회의 기능이 끝이 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적어도 세상의 가치와 상식을 뛰어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굴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셨습니다.
여러분, 초대교회의 역사를 아십니까? 얼마전 한 교우가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기도제목이 생각나면 함께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1세기 교회로 시간 여행을 해보니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삶에 녹아 든 복음, 일상과 일치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예배는 예배 후에 교회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삶의 예배는 시작이 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문을 열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세상에서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끼십니까? 십자가는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능력이 없습니다. 여러분 주위를 둘러 보세요.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서로의 삶을 나누며 돕고 베푸는 사람들이 케임브리지 교회를 통해서 많이 배출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미련하고 약한 자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이 찬양의 가사를 함께 읽으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작은 나를 부르신 뜻을 나는 알 수 없지만 오직 감사와 순종으로 주의 길을 가리라
때론 내가 연약해져도 주님 날 도우시니 주의 놀라운 그 계획을 나는 믿으며 살리
날 부르신 뜻 내 생각보다 크고 날 향한 계획 나의 지혜로 측량 못하나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완전한 길로 오늘도 날 이끄심 믿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