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1/2023 | 부활후 마지막 주일, 승천 주일
우리가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겠습니다 (We will be the hands and feet of Jesus)
유민용 목사
누가복음 24:46-53, 사도행전 1:11
4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고 3일째 되는 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며
47 또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 모든 민족에게 그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받게 하는 회개가 전파될 것이다.
48 너희는 이 일들의 증인이다.
49 보라.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
50 예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베다니 앞에까지 가시더니 거기서 두 손을 들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5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중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52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경배하며] 기쁨에 넘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53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계속 성전에 있었습니다.
1:11 “갈릴리 사람들아, 왜 여기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말 성경)
46 And he said, “Yes, it was written long ago that the Messiah would suffer and die and rise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47 It was also written that this message would be proclaimed in the authority of his name to all the nations, beginning in Jerusalem: ‘There is forgiveness of sins for all who repent.’ 48 You are witnesses of all these things.
49 “And now I will send the Holy Spirit, just as my Father promised. But stay here in the city until the Holy Spirit comes and fills you with power from heaven.” (The Ascension) 50 Then Jesus led them to Bethany, and lifting his hands to heaven, he blessed them. 51 While he was blessing them, he left them and was taken up to heaven. 52 So they worshiped him and then returned to Jerusalem filled with great joy. 53 And they spent all of their time in the Temple, praising God.
Acts 1:11 “Men of Galilee,” they said, “why are you standing here staring into heaven? Jesus has been taken from you into heaven, but someday he will return from heaven in the same way you saw him go!”(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부활절 이후 마지막 주일입니다. 벌써, 사순절기를 지나 부활절 이후 7주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은 7일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복되게 하심으로 우주의 질서를 세우셨지요.(창2:2-3) 교회력으로는 승천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성령강림의 전주곡이기도 합니다. 이제 다음주일부터는 26주 동안 성령강림절기를 보내며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치게 되는데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슬픈 십자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기쁨이고 능력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믿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요.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하늘로 승천하심은 끝이 아니라 교회의 탄생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승천주일 말씀안에서 주가 주시는 메시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쓴 이후에 후속편으로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로 마치는데,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오심 이후에 제자들의 변화된 삶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완전히 돌변하게 됩니다. 그들은 환란과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죽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살아갑니다. 도대체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 보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도 했고,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호언장담(豪言壯談)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을 때 두려워 모두가 흩어졌습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본능입니다. 죽음은 실제로 두려운 것이며, 두려움의 근원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팬데믹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의 영에 눌려 있던 것도 죽음의 권세가 온 세상을 지배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길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후 10일이 지난 후 오순절 날이 이르며, 한곳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의 임하심으로 제자들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제자들의 변화만큼이나 예수의 부활의 객관적인 증거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2천년이 지난 우리들에게 주시는 증인 된 삶은 무엇일까요?
첫째, 증인은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1:11 “갈릴리 사람들아, 왜 여기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셨는 것은 예수께서 모든 임무를 다 마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다시 복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들에 계신 위엄 있는 분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으니” (히 8:1)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 16:9)
예수님은 다시 하나님의 차원으로 옮겨 가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시는 주님께서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자 하늘만 자세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갈릴리 사람들아, 왜 여기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라고 말씀하시며 이제 하늘을 그만 쳐다 보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쳐다본 하늘은 ‘빈하늘’이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 뿐 아니라 이제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빈하늘’은 욕망으로 인한 내적 공허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빈하늘’은 ‘삶의 의미’를 상실한채 소비 사회에 함몰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자아상이며, 물질 만능주의에 종속되어 부활의 기쁨을 상실해 버린 ‘허전함 마음’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빈하늘’만 쳐다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라고 하시는 주님의 마지막 부탁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의 길 끝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 자들의 마음 안에 계십니다. 주께서 40일 동안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삶은 이 땅에서 이기적인 것만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쫓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땅에 하찮은 사람, 보잘것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박한 이들 가운데도 생명의 가치는 위대한 것이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사람들은 우주 저 너머 한구석에 천국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승천은 장소의 차원도 아닙니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차원’의 개념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하늘로 승천하신 것은 세상과 다른 차원의 영역입니다. 1차원 공간을 사는 개미와 지렁이는 3차원 공간인 인간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뱃속 아이가 바깥세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의미를 우리는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우리가 지각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차원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눈이 열리면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의 주님께서는 동행했지만 이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식사하러 앉으셨을 때에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열려서 주를 알아보게 됩니다. 두 제자는 그제서야 부활의 주님과 연합이 된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진 것이지요.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경험한 성도들의 영적 변화입니다.
누가복음 24:16 “그들의 눈은 가려져서 주를 알아보지 못하더라”
누가복음 24:30,31 “그가 그들과 함께 식사하러 앉으셨을때에 빵을 가지고 축복하신 후,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그때 그들의 눈이 열려서 주를 알아보자 주께서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시더라”
인간은 누구나가 자신이 경험한 높이와 깊이만큼 이해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부활 이후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일상의 세계를 뚫고 부활의 세계를 받아 들이며 사도행전의 삶을 살았습니다. 누가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울의 삶속에 나타난 예루살렘에서의 증거, 사마리아에서의 증거, 땅끝까지 이르러 증거한 일을 자세히 기록한 것입니다. 누가는 바울의 1,2,3차 전도 여행과 하나님의 주권으로 로마까지 복음을 들고 간 일들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바울과 함께 하셨던 성령의 역사였으며,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 사도행전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님으로 인해 도래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 살아 있는 한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갈릴리 하늘만 쳐다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으로 인해 완성될 나라를 기다리며 절망의 현실을 주님과 함께 살아내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회개의 삶을 통해 전파 됩니다.
4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고 3일째 되는 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며
47 또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 모든 민족에게 그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받게 하는 회개가 전파될 것이다.
회개는 주님과 끊겨있던 마음이 다시 연결되어,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거짓된 삶에서 돌이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고자 하는 명예와 물질, 안정감과 풍요를 어떻게 벗어나겠습니까? 믿는 우리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때때로 미음이 무너져도 일어날 힘을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사함으로 통한 회개의 삶을 통해 일어납니다. 주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가운데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재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삶은 과거의 나의 흠을 지우려고 애쓰는 삶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아래에서 주도권을 주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보십시요.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는 고통과 수욕(受辱) 받는 자로 오셨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당연히 고난 당하시고 멸시 당하셨으며 십자가에 죽어야만 했습니다. 모든 이들로부터 버림받는 예수님은 손과 발이 잘려진 듯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외치셨던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예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모든 인간은 늙고 병들고, 결국은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것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그 운명이 십자가 처형과 다를 게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있었을때에 유럽의 한 교회 마당에 있던 예수상이 폭격을 맞았습니다. 전쟁 후 교인들이 교회에 와보니 예수님의 손과 발이 다 잘려 나간 것입니다. 교인들은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고, 결국 본질은 잃어버리고, 서로의 의견을 주장하다 싸움이 나게 생겼습니다. 그 때 한 장로님이 “여러분 우리가 바로 교회인데, 이렇게 싸우고 분열하면 폭격 맞은 예수상보다 더 비참한 것입니다. 예수상은 그대로 두고 전쟁의 아픔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순종하며 주님의 나라를 세워갑시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감사하게도 교회는 자신들의 생각과 분쟁을 멈추고, 폭격 맞은 동상 옆에 팻말 하나를 세웠습니다. “예수님!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과 발이 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서있는 자리에서 지혜와 사랑을 담은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문제로 다루는 사람입니까?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사람입니까? 이것이 교회와 공동체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릅니다. 세상처럼 세팅하고 세상의 방법으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경험한 성도들은 죽음의 권세를 깨고 승리하신 주님을 뚫어 보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에서 눈을 뜬 성도들은 부활의 안경을 끼고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작고 초라한 일에도 삶의 의미가 있고, 낮은 자의 모습에서도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보는 것이죠. 우리가 고통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에 주님은 그곳에 계시며, 배고픈 자들과 목마른 자들에게 빵과 물을 주는 그곳에도 계시고, 지극히 작은 자들을 대접하는 그곳에 주님이 거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도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은 주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보는 눈을 열어 줄 것입니다. 이웃은 하나님이 함께 살라고 주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좋은 교회는 모든 민족에게 생명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책임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벌써 2023년의 절반이 다가와 있습니다. 한해의 절반이 다가오는데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며 살기에 너무도 분주한 삶을 살고 계시진 않습니까? 우리가 마음을 돌이키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전파됩니다. 여러분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매주일 예배를 드리지만, 보스턴을 떠나는 이들에게 오늘의 예배는 특별한 예배일 것입니다. 교회 곳곳에 함께한 흔적들이 남겨져 있기에 그렇습니다. 힘들때 예배 했기에 그렇습니다. 이번주에도 많은 지체들을 만났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내는 그들의 삶이 저에게 도전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믿는 우리들의 만남이 공동체 안에서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만남 속에서 끊임없이 불평하고 험담하면 우리의 영혼은 메말라 가고 불평의 뿌리가 깊어져 가지만 받은 은혜와 사랑을 나누고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다보면 묶인 감정이 풀어지고 회복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실때에 불평하고 원망하셨다면 십자가는 사랑으로 남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지체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서있는 자리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어보십시오.
진정한 회개는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주신 영원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 1,2)
셋째,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49 보라.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우리의 최선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죄와 사망으로 묶여 있는 육체안에 성령이 들어오시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집니다. 성령의 능력은 초인적인 기적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 처럼 변화합니다. 영적인 눈을 열러 보면, 인생이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악한 자들과의 싸움이기에 성령을 의지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11:13)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명을 살리는 일에 환란과 핍박이 있어도 찬송과 기도로 기쁨 일에 참여한 것은 종의 신분에서 아들의 신분으로 변화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성화의 삶은 내가 거룩해 지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고 계시는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일주일은 말씀을 준비하고 성도들을 심방하고 항상 기도하는 자리, 준비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일이 되면 어렵습니다. 기쁨을 놓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삶에 초대되어 기도하는 삶도 저에게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됩니다. 성도들의 삶속 깊이 들어가 그들의 삶을 들으며 소통을 할 때마다 문자적 해석으로 제한되는 말씀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간절한 말씀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성경속에서 실감하고 삶을 통해 더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으로 부터 멀리 계시다면, 겉으로는 그럴듯 해 보여도 우리의 영혼은 점점 더 말라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권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 삶의 이유입니다. 젊은날 외국에 나와 이민자로 살아 보니까 고국을 향한 마음이 더 간절해 질때가 많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속에서 증거자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 나라를 향한 마음이 더 깊어 지지 않을까요? 성령의 일하심을 더 추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십시요. 그리고 세상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십시요. 케임브리지 한인교회는 교회가 주는 만족함 보다 세상과 사회를 걱정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크리스챤 인재들을 키우는 일에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모든 부서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관계할 때에도 경험이라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먹어봐야 소개 할 수 있고 가보아야 표현 할 수 있습니다. 해보고 느껴 봤기에 전해지는 힘이 큰 것입니다. 경험해 보기 전에는 사랑도 이해도 용서도 인간의 한계 안에서 인정하게 되지만 하나님을 경험하면 함께 걷는 은혜가 너무 커서 은혜만으로도 감격하는 삶이 됩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여러 사람들을 고치고 회복시키시고 살리셨습니다. 주님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공생애 동안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걷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셨습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결국은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표현해 주셨습니다.
승천주일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함께 일하고 계십니다. 이 시간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겠다고 결단합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한주도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삶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