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2023 | (성령강림절, 웨슬리 회심주일)
주님의 성령, 지금 이곳에 (The Holy Spirit of the Lord, Now Here)
유민용 목사
사도행전 2:1-4
2:1 [성령의 강림]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2:2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2:3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 앉았다.
2:4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새번역)
21On the day of Pentecost all the believers were meeting together in one place. 2 Suddenly, there was a sound from heaven like the roaring of a mighty windstorm, and it filled th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3 Then, what looked like flames or tongues of fire appeared and settled on each of them. 4 And everyone present wa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speaking in other languages, as the Holy Spirit gave them this ability.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며, 웨슬리 회심기념주일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함께 예배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야외예배를 준비하며 섬겨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자연속에서 느껴지는 바람결에도 성령님의 어루만지심과 쉼의 시간이 되시길 바라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격려해 주시며 마음껏 누리는 날이 되십시요.
회심(回心)은 세상으로 향하던 마음을 주께로 돌리고, 죄로 부터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문이 열리면 새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성령의 시대가 활짝 열려진 사건입니다. 교회사적으로도 보면 성령강림은 교회의 태동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19세기후반 케임브리지 지역은 공장들이 지어지면서 노동자 계층이 주를 이뤘습니다. 이후 20세기 후반부터는 도시가 탈바꿈하게 되고, 이로 인해 세계 나라에서 지식인들과 유학생들이 모여드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들은 더 강하게 성장하는 민족들에게 교회를 넘겨줌으로 새롭게 이어지는 복음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 창립 40주년 기념책을 보면서 우리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사진과 글로만 보아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느껴집니다.
당시 필그림 교회의 목사였던 벤드로스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우리는 경주를 뛰었고 선한 싸움을 싸웠고 우리의 빛에 믿음으로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겸손하게 필그림 교회의 커튼을 내릴때가 다가왔습니다. 이것이 1992년을 맞이하는 우리 앞에 놓인 과제입니다”.
우리 교회는 많은 기도가 쌓여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지켜온 누군가의 눈물이 남아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23년에도 변함없이 이 자리를 지키며 예배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의 특권이지요.
인간의 일생은 탄생과 성장을 거쳐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회도 역사도 무한한 발전이 아니라 쇠퇴되거나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수천년간 이어온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변화되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의학이 발달되어 100세 시대가 오고 사람들은 천수 (天壽)를 누린다고 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함’ 앞에 서면 모든 인간의 수명은 ‘Zero’에 가깝기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게 되면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때에 한국 교회는 어린이 여름성경학교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린이 새벽기도회도 있었구요. 정말 많은 어린이들이 새벽기도에 나와 은혜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너무 많은 이유들로 하나님의 일을 제한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재 모습입니다. 각자에게 주신 귀한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곳곳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가 내 마음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내 삶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로 한걸음 물러서 있다면 성령강림절기를 맞이하며 다시금 주님 안에서 내영이 기쁨으로 회복되길 원한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일만 바쁜 크리스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기쁨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팬대믹 기간을 거쳐오며 우리는 수많은 변화들을 몸소 경험했습니다. 온라인 공간에 모여서 삶을 나누고 기도회를 갖었지요. 마치 오순절날에 성령을 기다리며 한곳에 모였던 이들처럼 말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한곳에 모였더니’라는 구절을 묵상하며 너무도 설레였습니다. 2천년전에도 인종과 지역을 초월하여 믿는 자들이 ‘한곳에 모여’ 기도할때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처럼 인터넷이나 유투브가 없어서 한곳에 모이기가 쉽지 않던 시대인데 성령의 권능이 임하니까 세상을 뒤흔드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곳에 모여’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릴때 일어난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 ‘한곳에 모여’ 예배하는 곳에 지금도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약속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교회 공동체들 마다 믿음의 감격과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드리는 공예배, 새벽기도회, 가족모임, GT모임, 부서별 모임 안에서 성령을 사모하십시요. 하나님의 힘이 내면에 채워지도록 말입니다.
한가지 살펴볼 것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모든 사람이 일평생 단 한번 받는 구원사건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때에도 모든 민족이 모여 있을때 성령을 통해 장벽이 무너지고 진실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태동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 동시에 일어났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세례 이후에도 성령충만함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며 열망해야 합니다. 지상의 교회가 베푸는 물세례는 예수님을 진실로 믿지 않고 구원의 확신이 없어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세례와 성령의 충만함’은 우리의 마음을 정확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때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은 웨슬리 회심 주일입니다. 285년 전 하나님은 웨슬리의 마음을 붙드셨습니다. 루터와 칼빈이 중세시대 카톨릭의 부패 가운데 믿음의 기치를 들고 종교 개혁을 한 인물이라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종교개혁 있은 후, 200여년이 지난 18세기에 종교개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신학적 대안을 제시한 목회자입니다. 이를 통해서 웨슬리 신학은 19, 20세기 ‘미국 부흥 운동’을 이끌었고, 무엇보다 ‘성결운동’과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인생에 있어서 운명은 날은 1738년 5월 24일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그날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런던 올더스케이트(Aldersgate, London)거리에 있는 한 기도 모임에 참여합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을 낭독하고 있는데, 밤 9시 15분쯤, 그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데 웨슬리는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끼게 됩니다.
웨슬리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내가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바로 내 죄까지도 씻어주셨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내 안에서 생겼다.” 그 날 이후 웨슬리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의 생애를 거슬러 올라가면, 1709년 2월 9일 웨슬리가 5살 때 부모님과 함께 살던 사택에 화재가 났습니다. 웨슬리는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며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표현하곤 했습니다.(1737년 3월 7일자 일기, 1750년 2월 9일 송구영신 예배 중, 1753년 11월 26일 자신의 묘비명 epitaph등) 밤 11시쯤 모두가 깊은 잠이 들었을 때 사택에 불길이 번졌고, 가족들은 빠져 나왔지만, 어린 웨슬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무너졌기에 위층 옷장을 딛고 올라가 창문에 기대어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웨슬리 아버지가 그를 구하려고 들어 가려다가 불이 거세어 들어 갈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 기도하며 체념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어깨에 다른 사람을 올려 위층에 닿을 만큼 인간 사다리를 만들어 어린 웨슬리를 잡아 내리는 순간 안쪽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고 합니다. 그날의 기억은 웨슬리에게 잊지 못할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불속에서 살아남은 기억을 회상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의 생애를 보면 30대 이전에는 박식한 부모 아래에서 교육을 받으며, 가난한 생활 환경에서도 십대때에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마스터 했으며, 경건생활, 성경을 읽고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삶을 유지했습니다. 젊은날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 교수가 되고, 믿음과 삶에 있어서 그 어느 하나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 웨슬리에게 한가지 없었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구원의 확신’이었습니다.
웨슬리가 30대가 되었을 때, 그 당시 미국이라는 나라가 없었고, 식민지 개척자들을 영적으로 돌보고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친구의 권유에 따라 미국 조지아의 사바나(Savannah)로 선교사로 지원합니다. 당시는 선교지를 가다가 배에서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735년 10월 25일 일기에 보면, “바다의 파도가 얼마나 세고 무서운지, 마치 하늘에 닿았다가 다시 지옥으로 뗠어지는 것 같았고…배가 앞뒤로 심하게 흔들려…무엇을 붙들지 않으면 잠시라도 서 있을 수가 없었다…맹렬한 파도는 10분마다 배를 사방으로 때려 산산조각 낼 것만 같았다.” 이러한 공포스러운 상황속에서 이상하게도 배안에서 찬앙하고 기도를 드리며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독일의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웨슬리는 묻습니다. “당신네들은 겁나지도 않나요?” “감사하게도, 우리는 겁나지 않아요”라고 모라비안 형제들은 대답합니다. “그러면 당신네 아이들과 아내들도 겁나지 않나요?”라고 웨슬리가 되묻자, 아주 온유한 모습으로 모라비안 형제들은 대답합니다. “우리는 아이들도 아내들도 죽음을 겁내지 않아요.”라고 부드럽게 대답합니다. 무서운 풍랑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그들의 평온함에 웨슬리는 무서운 풍랑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조지아 주에서 웨슬리는 2년 4개월 만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때가 1738년 2월 1일이었습니다. 영국에 돌아와서도 그는 신앙의 고민 가운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나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장래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나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성령세례’입니다. 웨슬리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붙들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웨슬리를 사용하시기 위해 다가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맞이 한 날이 바로 1738년 5월 24일이었습니다.
웨슬리의 회심은 (1)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였으며 (2) 마음과 삶의 질적 변화이며 (3)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 체험이었습니다. 웨슬리가 깨달은 것은 죄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어려운 일을 만날때에 하나님이 마음을 붙들어주시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고 생각하시며 그 일을 마주하시기 바랍니다. 변화된 웨슬리의 마음안에 하나님은 영국 국교회의 갱신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는 영국 국교회가 금지한 옥외 설교에서 “온 세계가 나의 교구”라고 선언합니다. “내게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 열명만 달라. 그러면 세상을 뒤집어 엎어 보이겠다”라고 외칩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일은 헌신된 소수의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십삼만오천명의 미디안 군사 앞에 하나님이 선택한 300명의 용사들은 절대 초라한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부와 권세 앞에 성령의 권능을 경험한 이들은 미디안 대군 앞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주시는 힘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마음 안에 미워하는 감정, 부딪히려는 육신의 본성. 불신, 두려움이 사리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영혼들을 향한 긍휼한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성령이 내주하시는 증거입니다.
왜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까? 아무리 잘 믿는다 해도 우리는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듣고, 하고 싶은 대로 할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는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 권능을 받기 위해 늘 현재 진행형의 태도로 ‘한곳에 모여’ 성령의 권능을 받고 세상의 빛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도 이야기하고 ‘기도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성령을 간절히 기대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지체들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시대’를 살아갑니다.
교회와 목회자, 성도가 한마음으로 한몸 된 지체들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함께 써내려가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눅1:8)
여러분의 땅끝은 바로 이 자리 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지금 이곳에’ 함께 하고 계심을 믿으시며,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주와 함께 동행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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