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2023 | 성령강림후 제 4주
성령의 3번째 사건, 고넬료 (Cornelius, The third event of the Holy Spirit)
유민용 목사
사도행전 10:1-4, 9-17
1 가이사랴 성읍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이탈리아 부대’로 알려진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2 고넬료와 그의 가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두터운 사람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생활을 했다. 3 어느 날 오후 3시쯤, 고넬료는 환상을 보았다.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와서 “고넬료야!”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4 고넬료는 두려움 속에서 천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주여, 무슨 일이십니까?” 천사가 말했다. “너의 기도와 가난한 이들을 향해 베푼 네 구제의 손길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 9 이튿날 정오 무렵 그들 세 사람이 욥바 근처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가 있었다.
10 베드로는 배가 고파 뭔가를 먹고 싶었지만, 식사는 아직 준비 중이었다. 그러던 중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져 환상을 보게 되었다. 11 환상 가운데서 베드로는,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네 귀퉁이가 동여매어진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12 그 보자기 안에는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뱀들이 있었고, 또 공중의 새들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네 발 달린 짐승들이 들어 있었다. 13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베드로야, 일어나서 그것들을 잡아먹어라.”14 베드로가 놀라 소리쳤다.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불결하고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입에 대어 본 적이 없습니다.”15 그러자 두 번째로 음성이 들려왔다. “어느 것이든, 더럽다고 하지 말아라. 모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이다.”16 이와 똑같은 환상이 세 번이나 반복되더니, 보자기는 갑자기 하늘로 다시 들려 올라갔다. 17 베드로가 그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척 궁금해 하는 동안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내어, 그 집의 대문 앞에 당도했다.(쉬운말 성경)
1 In Caesarea there lived a Roman army officer named Cornelius, who was a captain of the Italian Regiment. 2 He was a devout, God-fearing man, as was everyone in his household. He gave generously to the poor and prayed regularly to God. 3 One afternoon about three o’clock, he had a vision in which he saw an angel of God coming toward him. “Cornelius!” the angel said. 4 Cornelius stared at him in terror. “What is it, sir?” he asked the angel. And the angel replied, “Your prayers and gifts to the poor have been received by God as an offering! 9 The next day as Cornelius’s messengers were nearing the town, Peter went up on the flat roof to pray. It was about noon, 10 and he was hungry. But while a meal was being prepared, he fell into a trance. 11 He saw the sky open, and something like a large sheet was let down by its four corners. 12 In the sheet were all sorts of animals, reptiles, and birds. 13 Then a voice said to him, “Get up, Peter; kill and eat them.”14 “No, Lord,” Peter declared. “I have never eaten anything that our Jewish laws have declared impure and unclean. 15 But the voice spoke again: “Do not call something unclean if God has made it clean.” 16 The same vision was repeated three times. Then the sheet was suddenly pulled up to heaven. 17 Peter was very perplexed. What could the vision mean? Just then the men sent by Cornelius found Simon’s house. Standing outside the gate, 18 they asked if a man named Simon Peter was staying there.(New Living Translation)
냉전시대 세계사에서 러시아의 대표적인 문호 솔제니친은 인생의 목적은 번영이 아니라 영혼의 성숙함에 있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스탈린의 분별력을 의심하는 편지를 친구에게 썼다가 10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감옥소 생활을 쓴 글로 노벨상을 받고 결국 구소련에서는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20년동안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그는 한 인터뷰에서 미국이 기독교 국가인줄 알았는데 자기를 숭배하고 자기를 섬기는 나라라며 사회를 향해 쓴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 러시아 혁명으로 비극적인 피의 전쟁이 일어난 이유도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C.S Louise는 역사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게 되는 분기점이 ‘계몽주의 운동’이라고 설명합니다. 계몽주의 이전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 했는데,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세상의 중심이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인간의 지성으로, 과학의 합리적인 방법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다 보니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 없는 세상이 시작된 것이라고 했지요. 어쩌면 우리도 오순절 이전의 제자들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우리는 오순절 이후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성령의 능력이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십시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신만의 유익을 구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돈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학문적 업적을 쌓아 올리며 자기의 명예를 이루려 합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적 힘은 커질수록 다른 사람을 해치는 위험한 도구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황제를 주인이라 부르던 로마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극심한 탄압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침착하고 품위 있는 행동,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태도, 고문을 앞에 두고도 냉정을 잃지 않는 용기를 통해 불신자들에게도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이 느꼈던 성도들의 좋은 인상은 삶의 경계선을 무너뜨렸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도 가까이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만남을 갈망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찾아가십니다. 지금도 누가 진심으로 자신을 찾는지, 누가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2천년 전에도 알고 계셨고 지금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기 위해서 성령충만의 갈증이 있어야 합니다. 목마를 자에게 생수가 필요하지요. 타는 목마름으로 예배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지금도 찾고 계시지 않을까요? 누가 나를 필요로 하나 알고 계십니다. 요즘 기독교인들은 이기적이란 말을 듣지요. 기독교의 구원의 속성도 배타적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을 만난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0: 11-13절을 보면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기독교의 구원은 의를 얼마나 실천했는지, 얼마나 교양이 있는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하는 차별이 없는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죽은자’로부터 살리신 인류의 단 한분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의 힘을 믿는 이들은 성령을 의지하면서 전생애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책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3대 변화 사건을 보면, 야외예배때 살펴 본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의 성령강림사건입니다. 두번째는 지난주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회심 사건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고넬료의 이야기인데, 이는 예루살렘을 벗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에게 전달되는 ‘최초의 성령세례 사건’입니다. 만일 이 세상이 전부라면 신앙생활에는 이해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찾아올 때에 주안에서 기뻐하라, 평안하라고 하는 말씀이 이해가 될까요?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베풀며 살아가라는 메세지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뒷모습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며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어렵게만 느껴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는 무명한자 같으나 성경은 유명한 자라고 하시고, 가난한 자 같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내 능력과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이 과정은 현실은 암담하고 모든 소망이 끊어진 환경에서도 말씀으로 잘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그 자리에 하나님은 기다려주시고 품에 안아 주시는 경험입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끊임없이 작동하는 나의 욕망이 십자가에 날마다 못박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가?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통해서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만남이 이뤄집니다.
성경은 2천년전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며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이방인이 성령세례를 받는 사건을 소개합니다. 성경을 묵상하는데 이방인 고넬료가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착하게 살아간다고 다 성령세례를 받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고 성령세례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고넬료의 회심사건은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한 길이 있다는 것과 구원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갈망이 마음 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귀를 막고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서 멀어져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것은 고아처럼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서로를 낯선 사람인냥 바라봅니다. 경계심을 품고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경계심은 하나님의 사랑 조차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경계선이 많을수록 생명력은 약화됩니다. 마음의 한자락도 지키는 것이 어려운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시고 존귀한 자녀라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곳에 오신 여러분은 모두가 존귀한 자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편견으로 인해 이방인들을 벌레나 부정한 짐승처럼 불결하다고 여겼습니다. 당연히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은 매우 높았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행전 11장 3절이 전해줍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함께 유숙하며 음식을 먹었던 일에 대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교회에 보고를 하자, 유대인 신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당신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지요?” 하고 따졌다.(행11:3)
성령이 오셔서 하는 사역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들을 찾아가 제자 삼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세상속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보지 못한 미전도 지역에도 있고, 무심히 지나치는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넬료에게 성령께서 어떻게 임하는지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성장학이 관심을 끌던 시기에 많은 교회마다 부흥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홍보했습니다. 많은 불신자들을 결신시키고 교회가 부흥했다고 하면 그 전도 프로그램을 많은 교회들이 배우고 와서 적용하기도 했습니다. 적용하는 목적이 대부분이 교회 성장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새로운 율법주의 요소들입니다. 교회는 성숙한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가치와 경영 논리에 젖어 버리게 되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숫자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인원수를 채우는데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영성학자 리처드 포스터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변화를 위한 노력보다는 얕은 만족과 인스턴트 훈련 프로그램으로 심리적 명분을 세우기에 그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지 마십시요. 기대감을 갖고 듣는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켜 나갑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살고 있는 이방인으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가이사랴’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를 기념하여 지은 지명이며, 이곳에는 당시 로마 점령군의 본부가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백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로마 군대의 부사관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지배하는 로마부대의 지휘관이고 지배계층임에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고 하나님께 기도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은 가난과 욕망의 한계를 뛰어 넘게 하시고, 어려움을 견디게 합니다. 인간의 성품을 넘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기도를 하게 하시지요.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만 계시다고 생각하던 유대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최초의 이방인에게 어떻게 임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2개의 환상이 나옵니다. 첫번째 환상은 고넬료가 기도를 하는데 제 구시쯤이니 오후 3시이지요, 그가 하나님의 사자를 보게 됩니다. 기도하던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이 되었으니,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라고 말씀합니다. 욥바는 가이사랴에서 남쪽으로 약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해변 도시입니다. 성령께서는 해안가 무두장이의 집에 베드로가 유숙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에 고넬료가 집안의 하인 두명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욥바로 보내게 됩니다.
두번째 환상은 베드로에게 임했습니다. 고넬료가 환상을 본 다음날, 고넬료가 보낸 세사람이 욥바에 가까이 이르렀을때 쯤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 있었는데 그 시간이 제 육시였습니다. 오늘날 시간으로 낮 12시 입니다. 배도 고프고 식사할 시간이지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전날 오후 3시쯤 출발해서 다음날 12시쯤 도착했으니 하룻길을 걸어서 온 것입니다. 이들이 도착할때 쯤 베드로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 오는데,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내려옵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섞여 있었으며,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어서는 안되는 음식이 섞여 있었습니다.(레 11, 신 14:7-20)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베드로에게 일어나 잡아먹으라”고 명령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관례에 근거하여 부정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구원의 믿음은 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소리가 나는데 “어느 것이든, 더럽다고 하지 말아라. 모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이다.” 이런 일이 환상 중에 세번이나 반복되더니 그릇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행 10:19, 20절을 보면 “19 때에 베드로는 방금 본 환상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지금 세 사람이 너를 찾고 있는 중이다. 20 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지체 없이 그들을 만나,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거라. 그들은 내가 보낸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환상을 보고 그가 알고 있던 것과 너무나 달랐기에 혼란 속에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에 도착 합니다(17절) 베드로는 자신을 찾아 온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라고 묻지만(21절) 베드로는 이미 성령의 지시를 받았기에, 자신을 찾아 온 이유를 물음으로써 확인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후에 베드로는 그들을 불러 들여 집에서 유숙하게합니다. 이튿날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과 욥바에 있던 형제들과 함께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을 향하여 고넬료를 보러 가이사랴로 갑니다(23절) 베드로의 동행자들은 베드로 자신과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 3명과 욥바의 형제들 6명 총 모두 10명이었습니다. 10명의 사람들이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 이틀이 걸려 도착합니다(9절). 그곳에 도착하니 고넬료가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24절)
고넬료는 베드로를 보자마자 로마군대 지휘관임에도 베드로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지 알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찌할줄 몰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그를 일으킵니다. 고넬료는 이미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의 집에 들어가 입을 열어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방인이 모두 성령세례를 받게 됩니다.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 부어지는 성령으로 인해 놀라게 됩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35절에 나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모든 나라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신다” (35절)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죄사함 없이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세례를 받아야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신 줄 압니다. 사도행전의 곳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윤리적인 사람들, 즉 율법을 지키던 유대인들 조차 구원받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언급됩니다. 오순절에 유대인들은 “경건한 사람”(2:5)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경건한 유대인들도 회개하고 죄 사함을 위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외침으로써 그의 설교를 끝맺었습니다(2:38)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짐”은 단지 속되지 않거나 부정하지 않다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때에는 옛사람을 십자가에서 죽이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오순절 성령충만한 삶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저절로 체험되어 지지 않는 것입니다. 목자없이 방황하며 죽어가는 백성들이 우리의 눈에도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구원받기 위해 이 복음의 메시지를 들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10장 43절에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너희가 복음을 듣고 그를 믿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함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의 기도와 그가 삶에서 진리를 더듬어 찾는 것을 받으셨고 하늘에 상달되게 하셨습니다. 고넬로는 인생의 궁극적인 답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 중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은 모두가 복음의 빚진 자들입니다.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전해야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것이지요. 우리를 만나 주신 주님은 그들도 사랑하시는 주님이시고, 모든 이들을 위한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음이 깊어지는 것은 예수님을 홀로 두지 않고 매일 십자가 은혜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10:4 고넬료는 두려움 속에서 천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주여, 무슨 일이십니까?” 천사가 말했다. “너의 기도와 가난한 이들을 향해 베푼 네 구제의 손길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크고 놀랍습니다.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를 듣고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십시요. 주님의 힘이 우주를 가득 채웠습니다. 주가 지으신 세상을 바라 보십시요. 지저귀는 새들도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존귀한 자녀 삼으시려고 외아들을 아낌없이 세상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모든 죄에서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존귀한 자녀는 환경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비난하고 정죄하는 자리를 떠나십시오. 감정과 기분에 따라 사람의 말과 인정 받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겸손히 주님을 찬양하십시요. 성령의 사람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보다 한분의 평가와 인정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분이 알아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다시 또 목마르고 공허해 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존귀하다’ ‘사랑한다‘ 하십니다. 한주도 허락하신 삶의 자리가 예수님이 거하시는 푸른 초장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