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0/2023 | 성령강림후 제 12주
바울의 고별설교 2 (Paul's Last Sermon 2)
유민용 목사
사도행전 20:24, 32-38
24 그러나 주 예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일,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 일을 완수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32 이제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온전히 맡깁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의 신앙을 바로 세워 줄 것이고, 또한 하나님을 위해서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 상속받는 유산을 여러분도 차지하게 해줄 것입니다.33 지금까지 나는 다른 사람의 금이나 은이나 의복을 탐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34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나는 나의 두 손으로 열심히 일을 해가면서 생활에 필요한 것들과 동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손수 마련해 왔습니다.35 또한 나는 연약한 자들을 돕는 일에 늘 본보기가 되려고 애써 왔습니다. 할 수 있는 한, 힘껏 일해서 연약한 자들을 도우려고 애썼습니다. 이처럼 내가 본을 보였으니, 여러분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마땅히 연약한 자들을 힘껏 도와야 할 것입니다.”36 말을 마치고서, 바울은 무릎을 꿇고 장로들과 함께 기도를 드렸다.37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작별을 슬퍼하면서, 모두가 크게 소리 내어 울면서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38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바울의 말에, 장로들은 몹시 가슴이 아팠다. 그들은 무척 슬퍼하면서 배 타는 곳까지 바울을 전송하였다.(쉬운말 성경)
24 But my life is worth nothing to me unless I use it for finishing the work assigned me by the Lord Jesus—the work of telling others the Good News about the wonderful grace of God. …32 “And now I entrust you to God and the message of his grace that is able to build you up and give you an inheritance with all those he has set apart for himself.33 “I have never coveted anyone’s silver or gold or fine clothes. 34 You know that these hands of mine have worked to supply my own needs and even the needs of those who were with me. 35 And I have been a constant example of how you can help those in need by working hard. You should remember the words of the Lord Jesus: ‘I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36 When he had finished speaking, he knelt and prayed with them. 37 They all cried as they embraced and kissed him good-bye. 38 They were sad most of all because he had said that they would never see him again. Then they escorted him down to the ship.( New Living Translation)
바울의 고별설교 가운데 내 목숨보다 귀하다고 고백했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이 어떤 것이었을까?라는 생각이 한주 동안 제 마음에 머물렀습니다.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많은 설교도 했었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이 죽음의 고난 속으로 들어가며 담아 내고자 했던 그 깊은 고백을 함께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24절에 보면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완수 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다.’(24절) ‘이제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온전히 맡깁니다.’(32절) 바울 인생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무언가에 이끌려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울에게 ‘은혜와 사랑의 길’은 자신의 생명 보다 더 귀한 어떠한 힘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습니다. 그 원동력이 현대교회에는 사라진 것일까요?
32절을 개역개정으로 보면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라고 번역 합니다. 바울은 은혜의 말씀께 부탁을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말씀에 인격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하나님의 인격이 담겨져 있다는 것은 우리가 설교를 듣거나 말씀을 묵상할 때에 말씀의 큰 가치를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바르트 (K. Barth : 1886-1968)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선포된 말씀, 기록된 말씀, 계시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선포된 말씀은 매주일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지는 말씀이고, 기록된 말씀은 우리가 묵상하는 성경을 가르키며, 계시된 말씀은 말씀이 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배에 나와서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는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는 뿌리를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젊은 세대는 권위와 전통의 뿌리를 거부합니다. 수세기 동안 내려온 전통을 받아 들이기 보다는 스스로 미래를 선택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권면한 말씀은 우리에게 참된 교훈이 됩니다.
바울은 말씀을 존경하는 사람으로 의인화 하듯 문학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말씀이 마음 안에 담겨 질수록 한개인의 인격은 아름답게 빚어지게 됩니다. 마치 향수를 뿌린 사람이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그 향을 맡게 되듯이. 바울에게는 죽음의 향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가 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 안에 가득 찬 것들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로 가득 찬 바울에게서 흘러 나온 것이 바로 ‘은혜와 사랑의 복음’이었습니다. 우리가 관계에 목말라 하거나 관계를 떠나 홀로 있는 것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진짜 사랑에 대한 목마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것처럼 누군가를 진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인간은 은혜가 없으면 철저하게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경쟁사회속에서 뒤쳐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원래 율법적인 사람이었는데 율법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기를 원하지만 오히려 마음 안에 죄가 가득하다고 곤고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지요. 바울이 말씀 안에서 인격적 관계 안으로 초대되어 보니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가 된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뛰어난 성과를 이루고 높을 성적을 받게 해주는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은 속상한 일, 참기 힘든 사람을 만날때에도 그래서 마음이 어렵다가도 주께서 오래 참아 주신 일들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맡길 때에 신앙이 바로 세워 질 것이고,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 상속 받는 유산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은 세상에서 경험한 것들로 오염되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믿음도 학습된 생각 경험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도덕적 교만에 갇히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된 칸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성경을 묵상해도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의 연약함이 보이지 않으니까 말씀을 알아도 거룩한 종교성만 유지하게 되는 형식만 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고 조롱하는 이들에게 결국 십자가에서 찌르는 창과 못을 다시 빼서 사랑으로 그 피를 손수 닦아 주시며 자신을 찌르냐고 얼마나 힘들었니? 하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심방을 가면 은혜와 사랑으로 정성을 다해 대접해 주시곤 합니다. 이 큰 사랑을 받아도 될까하는 마음이 들지만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하늘가족 안에서 하나됨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말을 건네지 않아도 하늘 가족으로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서로를 이해하는 다른 조건들이 없어도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입술의 말은 한없이 가벼워 지고, 작은 시련과 핍박에도 믿음이 요동치듯 흔들립니다. 마음이 상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가야할 길 조차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자녀를 낳고 실제적으로 키우다 보면 비로소 부모의 은혜를 느끼는 때를 경험합니다. 삶을 통해서 부모의 헌신을 실제로 경험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닮아 갈수록 우리는 교만하고 독선적인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겸손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리더십들에게 사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25-31절에서 (1) 자신을 먼저 살피기 전에 양떼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2) 예수의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라고 합니다. (3) 교회 내에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눈물과 겸손으로 세워졌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세울때에 3년을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이제 자신이 떠난 후에 교회 공동체를 공격하는 자들이 들어 올 텐데, 그들을 흉악한 이리떼에 비유합니다. 이리떼는 흉악하고 잔인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와 대조되는데, 양떼를 늑탈하고 어그러진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리디머 교회를 개척한 팀 켈러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는 남들보다 윤리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사는 이들이 아니라 제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구세주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깨닫는 이들에게 임한다’라고 했습니다. 1989년 뉴욕의 리디머 교회를 설립한 팀켈러 목사(1950-2023)가 하나님 품으로 가기 전에 몇주 전에 녹화한 영상 메시지를 교회 리더십들에게 공유를 했는데요. 그는 3가지 메세지를 남겼습니다. 첫째는, 사명자는 칼날 위에 서라는 것입니다. 세상속에 참여하되 동화되면 안되고 구별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소비만 하지 말고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뉴욕에 와서 이력서도 넣고, 행복한 교회 경험도 하고 싶고, 좋은 음식점도 가고 싶겠지만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 일에 시간과 돈과 인생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팀 켈러는 자신과 교회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이름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림으로 죄의 값을 치른 예수님을 전하며 살라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남긴 세번째 조언은 자신의 이름을 위한 명성과 자격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역의 성공과 명성을 그리스도인들이 정체성으로 삼을 경우에 이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조언했습니다.
교회도 세상과 다르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을 하면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합니다. 세상만큼 성과를 내야하고 세상보다 더 그럴듯 하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니까 교회가 세상의 방법으로 사람을 대하고 경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과 다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세워가려는 순간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참된 리더들이라면 교회를 세우는데 나의 생각과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한마디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야기 해야 합니다. 자신의 태도에 있어서는 엄격하게 점검하고, 다른 이에게 향하는 마음은 관대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는 전제하에 타자를 바라 보는데 이러한 관점은 은혜의 인격성을 파괴하는 뿌리가 되지요.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내가 본을 보인 것처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라는 것을 깨닫고 연약한 지체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하는 은혜의 말 한마디가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작은 것에서 부터 받는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 보내는 삶이 복인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싸움을 싸우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주님의 거룩함을 세상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푯대를 향하여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사명자에게 꺾이지 않는 마음은 예수님의 겸손을 겸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여길때 하나님이 누구인지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을 현실로 받아 들이는 것은 어쩌면 믿음의 경주자가 되어 부상을 당할 위험한 순간에 놓이기도 하고, 고난과 핍박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남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흔적이 사명자의 영성을 더 깊어지게 합니다.
이제 바울은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예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생이 끝나는 죽음은 언젠가 모든 사람이 홀로 통과해야 할 관문입니다. 죽음과 헤어짐의 두려움이 바울이라고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우리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이길 믿음이 있을까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떤 열심과 어떤 사명을 기억할 수 있을까요?
믿음은 그리스도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을 통과 할 때에는 사랑하는 가족도 대신 할 수 없고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의 죄로 인해서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예수님만이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땅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풍랑, 경제적 풍랑, 인생의 문제의 풍랑이 몰려올때에 주님이 함께 계심을 알고, 잠잠히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풍랑은 멈추게 됩니다.
바울은 마지막 설교를 마친 후에 무릎을 꿇고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합니다. 이 구절만으로도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다 울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항구에서의 뜨거운 눈물 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울고 에베소 장로들도 울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달려갈 길을 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때가 있지요? 그러나 주님이 보이신 길은 좁은 길이고 생명의 길입니다.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함께 기도하는 그 장면이 너무 진하게 그려집니다. 바울은 가야할 길이었기에 함께 했던 장로들을 뒤로하고 밀레도 항구로 갑니다. 다시 오지 못할 그 길이지만 그의 영혼은 성령에 이끌려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의지를 사로잡은 성령의 힘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뜨거운 역사는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에게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설교를 마친 후에 모두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의 교회가 사랑으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시며 여러분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복음과 은혜, 사랑과 눈물의 현장을 품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길은 우리가 계속 가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항해하며 바라 본 그 바다는 주가 주신 은혜와 사랑의 강물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탄 배는 방향 없이 떠다니는 배가 아니라, 항구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키를 잡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돛에 바람을 불게하여 인도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항해였을 것입니다. 한주도 인생의 바다속에서 주와 동행하시며 승리하는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