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0/2023 | 대림절 두번째 주일
기다림 시리즈 2 "이제 만나러 갑니다 : 수가성의 여인" (On the way to meet you : Village of Sychar Woman)
유민용 목사
요한복음 4:6-14
6 이 동네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고, 예수께서는 여행길에 피곤하셨으므로, 그 우물가에 앉아 쉬고 계셨다. 때는 낮 12시 무렵이었다. 7 ○ 그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오자,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을 거셨다. “나에게 물을 좀 주겠소?” 8 (당시 제자들은 모두 음식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으므로,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께 대답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저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 예수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셨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사를 알고, 또 당신에게 물을 청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당신이 그에게 생수를 청했을 것이고, 그러면 그가 당신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오.”11 여자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두레박도 없는데다, 이 우물은 굉장히 깊지 않습니까? 어디서 생수를 길어다 주신다는 말입니까?12 이 우물물은 우리 조상 야곱은 물론이고, 그의 자녀들과 가축들이 즐겨 마시던 물입니다. 이 우물물을 우리에게 주신 야곱보다 당신이 더 위대한 분이란 말입니까?” 1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곧 다시 목마를 것이오. 14 하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나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참 샘물이 될 것이오.”(쉬운말 성경)
6 Jacob’s well was there; and Jesus, tired from the long walk, sat wearily beside the well about noontime. 7 Soon a Samaritan woman came to draw water, and Jesus said to her, “Please give me a drink.” 8 He was alone at the time because his disciples had gone into the village to buy some food.9 The woman was surprised, for Jews refuse to have anything to do with Samaritans.[b] She said to Jesus, “You are a Jew, and I am a Samaritan woman. Why are you asking me for a drink?”10 Jesus replied, “If you only knew the gift God has for you and who you are speaking to, you would ask me, and I would give you living water.”11 “But sir, you don’t have a rope or a bucket,” she said, “and this well is very deep. Where would you get this living water? 12 And besides, do you think you’re greater than our ancestor Jacob, who gave us this well? How can you offer better water than he and his sons and his animals enjoyed?”13 Jesus replied, “Anyone who drinks this water will soon become thirsty again. 14 But those who drink the water I give will never be thirsty again. It becomes a fresh, bubbling spring within them, giving them eternal life.”(New Living Translation)
대림절기 기다림의 두번째 여인은 라합에 이어 수가성의 한 여인입니다. 성경에는 이 여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녀가 왜 자신의 마을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긷지 않고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여인은 불행한 과거를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다섯명의 남편과 헤어지고 여섯번째 남편과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물 한모금 달라는 요청에도 까칠하고 야박한 대화속에서 다른 사람을 편하게 대하지 못하는 아픔과 상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들로부터 받은 공허함과 인간적인 배신감이었을까요? 지역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였을까요? 이 여인은 인생을 살면서 벼랑 끝에 서는 기분을 수차례나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태양이 뜨겁게 내려째는 낮 12시 무렵에 물을 길러 온 것 아니겠습니까. 이 우물가 여인의 이야기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설교나 찬양으로도 한번쯤 다 들어 본 것입니다.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참 샘물을 마실 때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대림절기를 보내며 예수님과 이 여인의 대화속에 담겨진 은혜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갈증이 없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어느 깊은 경지의 단계에 올라 무소유로 삶고 살고 계신가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소유의 목마름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구를 내려놓기 보다 지나친 욕망을 절제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창조적 인간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는 비워 내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채우는 삶입니다. 거룩한 갈증과 거룩한 목마름으로 세상의 욕망을 대체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4장의 말씀은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연속선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일곱가지 표적 및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계시에 대한 보도입니다. 2장에서는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기적이 나옵니다. 3장에서는 지체 높고 존경받는 대법관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예수를 찾아와 거듭남에 대해서 질문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태앙이 내려 쬐는 한낮에 천대받고 부도덕한 여인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해 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이 먼저 우물가에 계셨습니다. 이후에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뜨러 옵니다. 예수께서는 우물가에서 이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신앙의 신비는 예수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며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셨구나. 주님이 먼저 이곳에 계셨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구원의 신비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한 인생 시간표를 만들어 놓으시고, 나를 향한 인생의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영적인 눈이 열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 매일 살아가는 것이 영성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보자이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1) 예수께서는 목마름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역과 유대지역을 왕래 할 때에 가장 빠른 경로인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멀리 우회하였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말도 섞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에 사마리아인들은 종교적으로 혈통적으로 혼합되어 부정한 민족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금기를 깨시며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단지 빨리 가고자 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기록한 ‘예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는 말씀안에는 유대인들만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마름의 자리는 우리와 같이 피곤함을 느끼는 완전한 사람의 몸을 지닌 자리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적인 연약함을 경험하고 사셨다는 것입니다.
4:6 이 동네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고, 예수께서는 여행길에 피곤하셨으므로, 그 우물가에 앉아 쉬고 계셨다. 때는 낮 12시 무렵이었다.
여러분은 목마름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십니까? 추운날 따뜻한 차 한잔이 얼었던 몸을 녹여주듯 , 지쳐 있던 마음에 진정한 사랑의 지체들의 위로가 마음이 힘이 되는 것처럼 믿음은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고 예수께서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을 함께 해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모든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의 목마름과 갈증, 아픔과 고뇌를 친히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의 자리, 두려움의 자리, 낙심의 자리에 함께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이 경험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날이 갈수록 건조해질 것입니다. 마음이 메말라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은 다른 행성이나 우주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더 알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마음에 찾아오시는 주님에 대한 감각은 모조리 잃어 버리고 살아갑니다. 현대인들은 더 편리하고 물질적인 대상은 열렬히 추구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는 의심도 많고 냉소적입니다. 작은 소자를 보면서 주님이 보여지고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볼 때에 우리와 함께 울기도 하시고 웃기도 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이 보여 지기를 소망합니다.
7 ○ 그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오자,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을 거셨다. “나에게 물을 좀 주겠소?
‘나에게 물을 좀 주겠소?’라는 요청에 ‘내가 목이 마르다’라고 하신 십자가의 장면이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사이에서 목이 마르다고 외쳤습니다. 이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실 사이의 간격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애타는 목마름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피를 힘입어 나아갈 수 있게 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갈망하고 있으신지요?
대림절기에 주님의 탄생을 기억하고‘주의 다시 오심'을 깨어 기다리고 계시는지요?
(2) 경계를 너머 만나는 것은 서로 하나가 되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나는 곳’입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면서 하늘문이 열리고 친히 내려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나는 곳입니다. 유대인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이른 대낮에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요청할 때에 이 여인은 마음을 닫은 채 묻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저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까칠한 반응이지요. 이에 예수님은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사를 알고, 또 당신에게 물을 청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당신이 그에게 생수를 청했을 것이고, 그러면 그가 당신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오.” 대답합니다. 이 여인은 다시 퉁명스럽게 되묻습니다.
“당신에게는 두레박도 없는데다, 이 우물은 굉장히 깊지 않습니까? 어디서 생수를 길어다 주신다는 말입니까? 이 우물물은 우리 조상 야곱은 물론이고, 그의 자녀들과 가축들이 즐겨 마시던 물입니다. 이 우물물을 우리에게 주신 야곱보다 당신이 더 위대한 분이란 말입니까?” 그러자 주님은 내가 주는 물은, 사람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나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참 샘물이 될 것이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자 여인은 정색을 하고 “선생님, 그 물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러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후에 예수님은 뜬금없이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우물가의 여인은 당황했는지 아니면 마음이 불편했는지 나에게는 남편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시치미를 땐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17절 18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소. 남편이 없다고 말한 당신의 말이 옳소.
당신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그 남자도 사실은 당신 남편이 아니오. 그러니 방금 당신이 한 말이 맞소.” 우물가의 여인은 눈이 열려지고 예수가 메시아임을 비로소 보게 됩니다.
20절에 보면 예수님과의 대화 끝에 여인은 예배하고 싶은 열망에 질문을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느껴질 때 우리 마음에서 끓어 올라오는 마음은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은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람은 경험하는 만큼 알게 됩니다. 배고픈 경험이 없는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픈 사람들의 마음을 어찌 알겠으며, 타는 목마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물의 소중함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환대는 배고픈 자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리의 삶은 상품이 아닙니다. 다 쓰고 나서 일의 가치가 떨어지면 버려지는 소모품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친 주님은 거룩한 삶의 변화의 자리까지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은 과거에 비해 바쁘게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여인의 다섯 남편처럼 사회적인 업적과 취미생활 등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마음은 더 공허해져만 갑니다. 소비주의문화는 예배까지도 행위로만 여기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행위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기다리십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수고해서 길러내는 물이 아니라 실제적 삶으로 먼저 찾아 오신 주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우물물은 우리의 노력과 공로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참 샘물은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씻겨 주시고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힘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은 종교일 뿐입니다. 그 길은 수고와 고통 뿐입니다. 열매가 열리는 것 같아도 영원히 지속되지 못합니다. 은혜가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은혜로 구원을 유지시켜 줍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 세상을 보면 많은 아이들이 헤롯 왕의 손에 아무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헤롯왕은 자신의 왕권에 위협을 느끼고 베들레헴 인근에서 태어난 두살 아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이고 명령했습니다. 그의 권력욕과 거친 성격으로 인해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죽어가는 갓난 아이의 부모였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예수가 성장해서 자신이 태어날 때에 일어난 이 비극적인 일들을 알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 느꼈을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가 공생애 기간 동안 슬퍼하고 탄식하는 이들을 찾아가는 원동력이 되었겠지요. 우리가 잘 알듯 세상은 불의와 폭력에 의해 언제나 선한 사람들이 희생량이 되는 일들을 적잖게 보게 됩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말로 할 수 없는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시고 온전하십니다. 때로는 우리 앞에 절망의 파도 근심의 파도 두려움의 파도가 몰려 올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진행 과정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세상의 시스템에 의해서 무고한 희생량이 되었습니다. 깨어진 세상속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점점 차가워져 가고 세상의 기준과 잣대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심을 받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도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홀로 고립된 채 내몰리는 연약한 이들에게 찾아가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의 삶을 추적해 보면 삶의 면면에 따뜻함이 묻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상처는 우리의 상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인생의 상처와 멸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자리였고, 남편과의 헤어짐 이후 새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반복하고 지속하면서도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 가는 여인의 삶은 우리 모두의 갈증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메시아로 만난 여인은 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증언합니다. 그분을 만나 보라고 전도를 합니다.
대림절기의 기다림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관계에서 있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품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 기도의 자리가 더 깊어질 것입니다. 성도의 사랑과 선행은 주님을 더 깊이 알게 하기 위한 자극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홀로 고립된 채 물을 길러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늘 가족이 되어 함께 동행하니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깊은 만남은 숨기고 가리던 것이 드러나는 자리이고 마음이 열리는 자리입니다. 주님과 더 깊이 사귀십시요. 그리고 우리를 만나러 이미 와 계시는 주님과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메말라 무뎌져 있던 나의 마음과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복음이 전해지면 희미하게 느껴졌던 삶의 방향이 선명해짐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덮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에 물질이 있으면 그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결과와 성과만을 위한 길을 걷게 되면 그 안에 무수히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주님이 계시다면 우리가 만나는 일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대림절의 기다림 속에서 삶을 화해하게 하는 평화의 주님을 따라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