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2024 | (주현 후 제4주, 당회주일)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시리즈 4 '기쁨 공동체' (The Joy community )
유민용 목사
빌립보서 4:4-9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한 번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은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너그러움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십시오. 주께서 가까이에 계십니다. 6 어떤 일이든,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을 당할지라도, 오직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뢰도록 하십시오.7 그렇게 하면, 모든 인간적인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8 ○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형제들이여, 무엇이든 참된 것과 무엇이든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 옳은 것과 무엇이든 거룩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거기에 무슨 덕이나 칭송이 있든지 모쪼록 그런 것들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살도록 하십시오.9 그리고 여러분은 내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실천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쉬운말 성경)
4 Always be full of joy in the Lord. I say it again rejoice! 5 Let everyone see that you are considerate in all you do. Remember, the Lord is coming soon. 6 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7 Then you will experience God’s peace, which exceeds anything we can understand. His peace will guard your hearts and minds as you live in Christ Jesus 8 And now, dear brothers and sisters, one final thing. Fix your thoughts on what is true, and honorable, and right, and pure, and lovely, and admirable. Think about things that are excellent and worthy of praise. 9 Keep putting into practice all you learned and received from me—everything you heard from me and saw me doing. Then the God of peace will be with you.(New Living Translation)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네번째는 기쁨 공동체입니다. 기쁨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바라는 감정입니다. 사람들은 기쁨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기쁘다, 즐겁다’라는 한자가 쾌(快)입니다. 쾌락(快樂) 이라고 하면 기쁠 (쾌), 즐거울 (락)이니 풀어보면 ‘몹시 즐겁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쾌락 하면 기쁨의 근원 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을 받게 되는데 육체적, 감각적인 쾌락만을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쾌(快) 라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 놓은 범위를 벗어나 욕망을 숭배한 결과가 본능적, 감각적, 말초적 쾌 (快) 로 전향이 되어 인간다움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철학자들의 도시 아덴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에 에피쿠로스 학파와 논쟁을 했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주의 철학자들입니다. 서양에서 쾌락주의 학파는 많은 추종자 들을 거느렸을 뿐 아니라 일종의 고통으로 부터 해방하는 사상이기도 했습니다. 쾌유(快癒) 주의자 들에 가깝습니다. 창시자 에피쿠로스(342-270 B.C)는 소아시아 사모스 섬에게 출생했는데 아덴으로 이주하여 시민권을 획득하고, 30대 중반의 나이에 에피쿠로스 아카데미를 세워 30여년간 제자들을 양성하며 그의 사상적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쾌(快)라는 것을 행복한 삶을 형성하는 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본 것입니다. 에피쿠로스가 전한 쾌락주의는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이루기 위한 고통과 근심을 제거하는 정적인 쾌락(快樂)쪽에 가깝습니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 선비 문화 속에는 자연의 신비속에서 즐거움을 얻고, 선비들은 그 마음의 양심을 지키며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소박한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풍류 안에 담긴 삶의 가치를 찾은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강조하며 편지합니다. 항상이라는 말이 앞에 붙어 있는데, 모든 삶의 여정에 담긴 희노애락 속에서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쾌(快)의 근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본질은 주님께로 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첫번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의 즐거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즐거움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6편 11절을 보면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깊은 관계속에서 기쁨의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관계가 친밀해지고 충분한 신뢰속에서 있다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고통이 끝나는 곳에서 진정한 기쁨이 시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더라’라고 감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창조의 신비 앞에 서게 될 때에, 피조물 가운데 지문처럼 남겨놓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래전 선물 받은 책 중에 배우 김혜자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에 소개된 글을 잠시 소개합니다. “만일 내가 비라면 물이 없는 곳으로 갈거야. 그곳 사람들에게 ‘내가 곧 갈께’하고 말할거야 그래서 그들이 내미는 그릇들을 물로 가득 채워 줄거야.” 인도 소녀 무시트라가 쓴 글입니다. 지구상의 60억 인구 중에서 12억 인구가 하루 1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들 중 대부분은 가뭄과 전쟁과 빈곤의 희생자들입니다. 또한 1억5천명의 아이들이 거리에서 자고, 먹고, 일하고, 뛰어 다니고 꿈을 꿉니다. 만일 내가 비라면 나도 수미트라와 함께 물이 없는 곳으로 갈 겁니다. 만일 내가 옷이라면 세상의 헐벗은 아이들에게 먼저 갈 겁니다. 만일 내가 음식이라면 모든 배고픈 이들에게 맨 먼저 갈 겁니다. (굶주린 아이들을 위한 모금 연설에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이 무엇인지 찾아내신 분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자랑거리가 쌓이고 명예와 지위가 주는 기쁨을 맛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참된 기쁨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품에 안아 주는 것, 하나님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고 자부심을 느끼는 것,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만나 전인격적인 변화가 내안에서 시작되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내가 옷이라면 세상의 헐벗은 아이들에게 먼저 가고 싶은 것, 내가 음식이라면 배고픈 이들을 찾아가고, 내가 만난 하나님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품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의 마음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우리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주안에서 흘러 나오는 것임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바른 생각속에서 기쁨이 솟아남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어 주신 구원의 희망은 깨어진 세상을 향한 한줄기 빛이요, 생명의 물줄기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안에 참 기쁨이 있고, 성령의 열매에 희락이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속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거짓을 경험할 때마다 우리가 누려야 하는 진짜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기 보다 스스로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인생의 주인이 되려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이 편지를 읽고 있는 빌립보 교회 교우들도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이들로 인해 두려운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빌 1:28) 교회 내부적으로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믿음의 여인들이 교회안에서 크게 다투었습니다.(4:2)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교회 안에서 함께 일하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주의 일에 열심을 내어도 다투고 갈등이 생기면 무엇을 해도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의 일을 할 때에 주안에서 함께 조화를 이루며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두여인을 향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함께 섬기는 공동체는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 누리는 기쁨은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을 때에 비로소 느껴지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자주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고통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을 생각하시고, 홀로 있는 골방에서도 주안에 있는 즐거움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일상의 삶에서 무엇으로 인해 기뻐하며 살고 있는지도 틈틈이 살펴 보아야 될 것입니다.
둘째, 기쁨은 상호 관계속에서 누리게 됩니다.
바울은 5절에서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너그러움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라고 했습니다. 인류 역사속에서 분열과 전쟁, 배신으로 인한 상처는 대부분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너그러움을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인자한 마음과 용서할 준비를 주안에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제시할 수 있는 좋은 삶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천국으로 부터 흘러 나오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이 찢기고 물과 피를 쏟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인식하게 될 때 기쁨이 생겨납니다. 매주일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도 기쁨을 잃어 버린다면 우리는 편협하고 옹졸한 태도로 삶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예배하며 주께서 가까이 계심을 느껴보십시오.
몰트만은 96세에 자신이 남길 마지막 책에서 그동안 자신이 견지해 왔던 성도의 부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바꾸고, 죽음속에 있는 부활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묘지석에 사망한 날짜를 쓰지 않기로 합니다. 그가 이러한 결정을 한 이유는 2016년 사망한 아내 엘리자베트 때문이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이 죽음과 부활에 대한 그의 신학적 성찰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감쳐져 있는 미래의 생명을 믿고, 사망의 날짜는 없다. 내게는 부활의 날짜가 있음을 말했습니다. 성도들은 슬픔으로 인생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이 오늘과 내일을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걱정하기 보다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불평하기 보다 주어진 일들에 감사하며, 기쁨의 길, 희망의 길을 지속적으로 걷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 많은 우리를 용납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보다 더 크시며, 실패와 배신, 연약함을 덮고도 남음이 있는 크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무한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 안에는 우리의 연약함을 덮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고백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내 기준과 내 편견의 그릇에 담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희망의 신학은 세상속에 있는 기쁨을 담으려고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세상과 연결되어 질 때에 진정한 기쁨이 솟아나게 됩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순간 세상에서 느낄 수 없는 기쁨의 충만함을 얻게 됩니다. 다윗은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11) 헨리나우웬은 춤추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고통을 직시한다고 했습니다. 시편 119편 92절을 보면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고난은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고 가지만 그때마다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되면 고난도 이길수 있게 됩니다.
고난 중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인식하시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주님의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고, 아들은 자기 목숨을 모든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에게 성령께서는 새 힘을 허락하십니다.
셋째, 생각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을 통해 기쁨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현대사회는 여러가지 일들로 인해서 근심과 두려움에 빠지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뉴스를 보면 우울함을 주는 소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부정적인 일들에 노출시켜 버리면 마음이 흐려지고 기쁨을 빼앗겨 버립니다. 현대의학은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하면 뇌와 마음의 건강을 위협한다는 통계를 제시해 줍니다. 몸에 난 상처라면 시간이 흐르면 치유가 되겠지만 생각이나 마음이 병이 나면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반응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린 처방은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거룩한 것, 사랑스러운 것,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 속에 깊이 생각하라고 명령법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덕목들은 우리가 아름다운 삶을 형성시켜 나가는데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생각만 하지 말고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실천하라고 명령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묵상이라면 실천하는 것은 삶의 적용입니다.
이것이 뇌에 대한 수많은 연구 결과가 있기 전에 바울이 주는 치료 방법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세운 과정을 보면 2차 전도여행 중에 환상 가운데 마게도냐 한사람이 나타나서 그를 불렀고, 성령의 인도함으로 건너가 처음 세운 교회입니다. 상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성령님께 인도함 받고 세운 교회이니까 바울이 교회를 세우고 무엇을 전하고 교우들은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성령이 하시는 일에 대한 성경공부를 했을 것입니다. 전도 여행중에 바울은 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더 큰 사랑으로 사명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잠긴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을 충분히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빌립보서 서두에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빌립보 교우들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는데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고 고백합니다.(빌 1:8)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져야 합니다. 심장에서 피를 공급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지녀야 그리스도의 피를 공급받게 되고, 서로가 한 피를 나눈 한 형제,자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쁨의 공동체는 실패를 두려워하기 보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변하여 욕망과 혈기의 피가 그리스도의 피로 순환되어야 합니다. 몸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원활해 지는 것은 성령의 다스림 받는 것입니다.
갈등이 분쟁을 낳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통한 성장을 경험하는 공동체입니다. 마음의 광야에 자리하고 있는 불안, 욕심, 미움, 편협함, 비난, 정죄, 교만의 뿌리를 뽑아내는 일이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단비로 인해 진정한 기쁨이 임해야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 집니다.
누군가가 무디(D.L. Moody, 1837~ 1899)목사에게 물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잘 깨달아 지지 않고 하나님이 의심되면 어떻게 하지요?" 그때 무디는 다음과 같은 적절한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성경책을 놔두고 뛰쳐나가 전도하고 지나가는 손수레라도 밀어주십시오, 무슨 일이든지 찾아서 봉사하십시오, 그리고 돌아와서 성경을 읽으면 해석이 잘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배운 대로 실천할 때 성경말씀을 가장 잘 배울 수 있으며,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로 인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일상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통해 숨이 막힐 듯 힘들었던 지체들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어주고, 혼자라고 생각했던 그 자리에 기도로 든든히 함께 해주며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기뻐하고 축복해 줄 수 있는 공동체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두 팔이 있는 것은 많이 안아주고 품어 주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케임브리지 한인교회가 두 팔 벌려 품어 안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진정한 기쁨은 세상의 어떤 기쁨으로도 채울 수 없는 기쁨이 우리 안에서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진정한 기쁨은 우리가 누리고자 했던 목표와 목적을 바꾸어 줍니다. 우리의 기도의 자리를 통하여 섬김과 봉사의 자리를 통하여 항상 기쁘고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는 진정한 기쁨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