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024 | 부활절 두번째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8 '부활의 공동체 2' (Community of Resurrection 2)
유민용 목사
고린도 전서 15:20-28
20 ○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듯이, 이제 죽은 자의 부활도 다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들어옵니다. 22 곧 한 사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이제 다른 한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23 하지만 죽은 자의 부활은 각각 순서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장 먼저는, 모든 죽은 자들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24 그 후에 세상 종말이 임할 것인데,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의 모든 권력과 권세와 권능을 다 멸하신 후, 그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 것입니다. 25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완전히 굴복시킬 때까지, 그리스도께서는 왕으로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26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굴복시킬 원수는 죽음입니다. 27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켰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굴복시키신 모든 것에는 그 ‘모든 것’을 굴복시키신 하나님 자신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28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굴복시킨 그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도 모든 것을 자기 발아래 굴복시키신 하나님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녕 ‘모든 것의 주님’이 되실 것입니다. (쉬운말 성경)
20 But in fact, Christ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He is the first of a great harvest of all who have died. 21 So you see, just as death came into the world through a man, now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has begun through another man. 22 Just as everyone dies because we all belong to Adam, everyone who belongs to Christ will be given new life. 23 But there is an order to this resurrection: Christ was raised as the first of the harvest; then all who belong to Christ will be raised when he comes back 24 After that the end will come, when he will turn the Kingdom over to God the Father, having destroyed every ruler and authority and power. 25 For Christ must reign until he humbles all his enemies beneath his feet. 26 And the last enemy to be destroyed is death. 27 For the Scriptures say, “God has put all things under his authority.”(Of course, when it says “all things are under his authority,” that does not include God himself, who gave Christ his authority.) 28 Then, when all things are under his authority, the Son will put himself under God’s authority, so that God, who gave his Son authority over all things, will be utterly supreme over everything everywhere.(New Living Translation)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풋볼을 무척 좋아해서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풋볼 팀에 들어갔는데 늘 후보 선수였기 때문에 한번도 경기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팀이 경기가 있는 날이면 소년의 아버지는 어김없이 경기장의 관중석에서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했습니다. 아들이 대학에서도 풋볼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을 아버지는 앞으로 4년 동안의 대학 풋볼 경기 입장권을 한꺼번에 샀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여전히 단 한번도 주전으로 나가지 못했고, 아버지는 관중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졸업을 얼마 앞둔 어느날 그 아들은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속해 있던 팀이 경기에서 지고 있었는데, 늘 후보 자리를 묵묵히 지키던 그가 감독에게 제발 한번만 출전 시켜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래서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기적처럼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그가 울먹이며 감독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시각 장애인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이제껏 모든 경기를 보러 오셨지만 내가 뛰지 못한 것을 모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처음으로 제가 경기하는 모습을 하늘에서 보실 수 있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누리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은 죽음 앞에 무력한 존재이지요. 죽음은 참으로 강력한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말하며 죽음을 빼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힘이 죽음을 삼켜 버릴 정도로 강력하기에 부활의 빛은 죽음까지도 소멸시킵니다.
바울은 12절로 19절에서 가정문을 사용하여 부정을 다시 강하게 부정하는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에 대해서 진리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했는데도,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13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한 채 아직도 죽은 상태로 계셔야 할 것입니다. 14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한 채 아직도 죽은 자들 가운데 그대로 계신다면, 우리가 전한 것은 아무 쓸모없는 헛된 것이며, 여러분의 믿음 또한 헛됩니다. 15 더 나아가, 우리 모두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못하셨는데도, 우리가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해왔기 때문입니다.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하고 아직 죽은 상태로 계셔야 합니다.
17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하셨다면, 여러분의 믿음도 몽땅 헛된 것이고, 여러분은 여전히 죄 가운데에 있게 됩니다. 18 그렇게 되면, 이미 세상을 떠난 그리스도인들도 다 멸망해 버렸을 것입니다.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우리의 소망이 단지 이 세상의 삶만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다른 모든 세상 사람들보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들이 걷는 길이 진리라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과 진리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추상적인 차원에서 믿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절대로 실제적일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12절로 19절의 말씀을 부정하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그리하여 모든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선언합니다.
첫째, 모든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첫 열매’라고 번역한 헬라어 ‘아파르케’(ἀπαρχὴ)는 시간적으로 '창조'라는 뜻의 아르케(ἀρχή)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첫 열매'라는 것은 '새창조 사건'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가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첫번째 열매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서 일어날 대표적 의미를 갖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까지도 죽음 이후 몸의 부활에 대한 약속입니다. 예를 들어 농부가 봄에 씨를 심어서 가을에 첫열매를 얻게 되었다면 이후에 우리는 그 나무에서 열매가 지속적으로 열릴 것을 알게 됩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듯이, 이제 죽은 자의 부활도 다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들어옵니다. 22 곧 한 사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이제 다른 한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절망이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말하며 고통과 고난을 빼놓지 않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의 숨결을 느끼며 주어진 때를 살아가게 합니다. 세상이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져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첫열매가 되신 주님의 행렬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속에도 잘됨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고통의 시간, 원하지 않는 때를 맞이할 때도 있는데 하나님은 인생의 어두운 날도 회피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받아 들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때 나사로는 이미 죽어서 장례를 치른 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부활 때에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안다고 대답합니다. 언뜻 보면 그녀가 부활하게 될 것을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녀는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주님께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11:25~26)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셨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나사로는 다시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은 앞으로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믿음을 주시기 위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죽음의 권세까지 굴복하신 주님께서 마음의 주인으로 자리하고 계신가요? 기독교는 지적이거나 윤리적인 차원의 종교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만이 인생의 길과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심을 정말로 믿는 것입니다. 인생의 분명한 답이 바로 부활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부활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답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세상에 없습니다. 한치 앞을 알수 없는 인생길 주님께서는 우리의 빛이 되어 주십니다.
둘째, '이것을 너희가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고백이 믿는다라는 것입니다. 매주일 사도신경을 고백하며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부활의 신비는 누군가가 전해 주니까 믿어 주는 것도 아니고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어서 믿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묻고 계시는 주님의 질문에 정직하게 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간 '너희가 이것을 믿느냐? 라고 다시 물으십니다.
이 사실을 잊고 산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일에만 급급하게 될 것이고 나이가 들수록 인생의 허무함만 더해 갈 것입니다. 지나 온 인생을 보며 후회만 남는다면 한없이 절망하게 되고 속절없이 감정의 파도에 끌려 다니게 됩니다.
주님은 부활의 소망을 굳게 믿고 살아가라고 죽은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마음에 참된 안식이 찾아 옵니다. 잠자고 있던 영혼이 깨어나고, 상처로 인해 단단해진 마음에 주님의 위로하심이 있습니다. 이 신비는 우리가 우리 힘으로 고통의 현실 속에서 부활의 능력을 끌어 당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소망하고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현실과 영적인 것 사이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신앙생활의 문제는 진정으로 믿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흙에 속한 자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가리키는 죽음의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 보아야 합니다.
죽음은 우리가 접해 보지 않고 경험해 보지 않았다고 해서 다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 가운데 본래적인 것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인간에게 찾아 왔습니다. 인류 역사속에서 이 죽음을 해결할 방법이 없기에 살아가면서 사망의 권세는 우리를 가장 두렵게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이유는 대부분 애착하는 것으로 부터 분리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바울은 죽음 이후에 일어날 사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23절부터 26절을 읽겠습니다.
23 하지만 죽은 자의 부활은 각각 순서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장 먼저는, 모든 죽은 자들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24 그 후에 세상 종말이 임할 것인데,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의 모든 권력과 권세와 권능을 다 멸하신 후, 그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 것입니다. 25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완전히 굴복시킬 때까지, 그리스도께서는 왕으로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26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굴복시킬 원수는 죽음입니다.
각각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질서 있게 이 일이 진행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때에는 초림때 비천한 상황에서 태어나신 것과 달리 왕중의 왕으로 영광과 권위를 지니고 임하실 것입니다. 이때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이 세상의 완전한 종말이 온다는 의미입니다.(마 13:39, 계 14:15) 바울에 따르면 두가지 일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을 다 심판하시고 악의 세력이 파멸될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하나님의 나라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만 그날에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품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현실을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새로운 창조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부활의 신비가 역사적 사실임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은 믿지만 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부활 이후의 말씀도 그대로 다 받아 들여야 합니다. 예수의 생애에서 실제로 부활이 일어났고, 성경은 우리도 그렇게 될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착하게 산다고 해서 죽음을 극복할 수 없고, 오랜 시간 수행의 삶을 산다고 죽음을 이길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믿으려 하고 이해하려고 하면 믿어지지 않고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거꾸로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이 길을 신뢰하며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그 길을 따르게 되면 하나님께서 성경의 말씀을 계시적으로 깨닫게 해 주십니다.
초대교부들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태양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에 자주 비유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태양을 온전히 살필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지성과 이성이 하나님의 신비를 다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통해서 삶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숨겨진 깊이를 볼 수 있도록 열어 주시지만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닫혀진 우리의 영적 시각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굳게 닫힌 돌문이 열리고 주님께서 나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나셨다는 것은 죽음의 의해 삼켜진 그리스도의 생명이 다시 역전되어 죽음을 삼킨 생명의 사건인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어떤 순종을 원하실까요?
27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켰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굴복시키신 모든 것에는 그 ‘모든 것’을 굴복시키신 하나님 자신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28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굴복시킨 그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도 모든 것을 자기 발아래 굴복시키신 하나님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녕 ‘모든 것의 주님’이 되실 것입니다.
굴복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강압에 의한 복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의미에서 순종입니다. 주님은 찬양 받으실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새창조를 이루셨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며 순종하셨습니다. 깨어진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들이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안에서 버려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도들은 고통중에도 십자가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만 있게 될 그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종말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이제껏 살아온 삶으로 부터 단절시키는 것 같고,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잊혀지는 것 같고, 이제껏 쌓아 올리며 살았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종말은 미래에 일어날 우리에게 펼쳐질 영광의 자리이며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인생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늘 내게 주어지는 일들을 부정적으로 받아 들여서는 안됩니다. 비록 주어지는 환경속에서 고통과 고난이 있더라도 찬송의 노래를 부르며 부활의 몸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찬양은 사망을 이기고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몸은 날로 쇠잔해 지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몸은 날마다 새사람으로 살아납니다. 바울은 자신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공동체 안에서 어떤이들은 새새명을 낳고 탄생의 기쁨을 누리기도 하고 동일한 시기에 누군가는 부모와의 헤어짐을 경험하며 아픔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품을 때도 있고, 내려 놓고 떠나 보내게 될 때도 있지만 모든 시간과 모든 날들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의무적이거나 강압에 의한 복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는 것은 현실에서 넘치게 채워주실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의 인생에 넘치도록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믿음은 정해진 기계적인 삶이 아니라 모든 환경속에서 우리를 설계하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십자가에서 이루신 죽음을 우리도 삶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앞으로 우리에게 펼쳐질 인생이 이미 정해졌다는 숙명론자가 아니라 부활의 노래를 부르며 앞으로 하실 하나님께 매일 묻고, 삶속에서 펼쳐질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갈망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믿음생활 가운데 평탄한 길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몸을 함께 지니게 될수록 주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며 부활의 신비를 경험해 갈 것입니다. 인생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시작과 마지막을 운행하고 계시니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으로 사려 깊게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들이 인생을 설계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책임있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