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16, 에베소서 2:10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개역성경) For God loved the world so much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요한복음 3:16,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착한 일 을 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이미 오래 전부터 선한 일을 계획해 놓 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선하게 되도록 그렇게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에베소서 2:10, 쉬운성경) 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에베소서 2:10, New Living Translation)

“왜 크리스천들이 비난을 받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전문가들이 내놓는 중요한 것 두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크리스천들이 사회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마태복음 5:13-14)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크리스천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의 신앙이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고, 교회 밖에서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영어 단어에 무슨 뜻이 있는지 아십니까? 웹스터 영어 사전에 One who professes belief in the teachings of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다른 사전들도 약속이나 한듯이 똑 같은 크리스천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김대건(1821-1846)’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탄생(2022)’을 보았습니다. 아주 잘 만든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습니다. 이 영화의 압권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기 전 마지막 남긴 말입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주인을 알지 못하면 보람이 없고, 살아도 쓸 데가 없습니다. 천주께서 곧 나보다 더 착실한 목자를 끊임없이 보내 주실 것이니, 서러워 말고 큰 사랑 을 이루어 한 몸같이 천주를 섬기다가, 영원한 천주 대전에서 만나 길이길이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김대건’은 불과 15살에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현종(顯宗)은 라틴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지리, 측량 등 다방면에 박학했던 그의 재능을 몹시 아까워서 살리고 싶었지만 결국 김대건 신부는 25 세의 나이로 순교 했습니다. 저는 그가 마지막 남긴 말에서 강한 크리스천의 향기가 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이런 감동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그대는 나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과 살아가는 방식과 삶의 목적, 그리고 나의 믿음과 인내와 사랑, 끊임없이 노력하는 나의 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0) 바울의 삶은 분명했습니다. 그가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 그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제자 디모데가 보기에 바울의 삶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 세대에 와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는지, 왜 크리스천들은 세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비난을 받는지, 왜 크리스천들이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욕을 먹고 있는지, 한번 그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 이유가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잘못되었다면, 그 결과가 나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모든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소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 또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다 보면 병이 낫기도 하고, 어렵던 사업이 잘 되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를 믿는 모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식들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어서 자식들이 잘 되기만 한다면 자기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교회에서 권사직까지 받은 사람이었는데요. 하도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답답해서 그 사람에게 물어봤습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그랬더니 이 사람이 “저야 뭐.....” 하면서 말꼬리를 흐리더니 “제 와이프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하고 저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이유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이 질문은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질문(the foundational question)’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을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크리스천들은 철학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하고, 질문하고, 대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다행히 오늘 본문 말씀에 그 이유와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우리가 ‘영생’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맞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 ‘영생’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한자로는 ‘永生’이라고, ‘길 영, 날 생’자를 씁니다.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영생’이라는 말이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삶의 ‘길이’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영생은 곧 한 분이신 참 하나님과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 영어 성경에는 좀 더 분명하게 이 말씀의 뜻이 나와 있습니다. And this is the way to have eternal life-to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the one you sent to earth (이것이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즉 오직 참된 하나님이신 당신을 알고, 당신이 세상에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알다’라는 말은 ‘γινώσκω(ginōskō)’라는 그리스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의 어원은 ‘지식’을 뜻하는 ‘γνῶσις(그노시스)’입니다. 그러므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지각을 이용하여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get a knowledge of perceive, feel). 단순히 ‘know’라는 영어 단어를 가지고는 그 뜻을 완전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영생’을 ‘길이’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인 개념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착한 일을 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이미 오래 전부터 선한 일을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선하게 되도록 그렇게 계획해 놓으셨습니다(For we are God's master- 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 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에베소서 2:10)

 

성경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저는 이 말씀이 로마서 3:21 말씀과 함께 복음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매스터피스’입니다. ‘매스터피스’는 작가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작곡가 헨델(Georg Friedrich Handel, 1685-1759)의 ‘매스터피스’는 ‘메시아(Messiah)’입니다. 헨델은 이 작품을 쓸 당시 끼니를 잊을 정도로 몰입했다고 합니다. 가끔씩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울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자필 악보에 “그는 멸시를 당하였다(He was despised)”는 부분에는 그의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메시아’ 악보의 맨 끝에는 자필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Soli Deo Gloria)”이라고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작곡가 헨델의 ‘매스터피스’가 ‘메시아’인데, 성경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매스터피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죄가 들어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대로 우리가 살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밀한 교제의 삶을 통해서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창조가 일어납니다.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창조가 우리 속에서 일어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삶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러분의) 옛 모습을 벗어 버리십시오. 옛 사람은 한없는 욕망으로 점점 더 눈이 어두워져 더 악하고 더러운 모습이 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모습처럼 선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십시오. (에베소서 4:22-24)

 

누가 저에게 왜 예수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제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저의‘인간성'이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인간성’을 회복한다는 말은 ‘참 사람’, ‘참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거짓말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불의 앞에서 분노할 줄 알고, 눈 앞에 있는 작은 이익을 탐내지 않고, 사람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사람, 이런 사람으로 살기 위해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우리의 ‘인간성’이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 수 있고,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생활의 성패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밀한 삶에 달려 있습니다. 그 밖에 다른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날마다 나누는 ‘펠로우십(fellowship)’ 에 모든 힘을 쏟아야 우리의 ‘인간성’이 회복됩니 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각이 어느 새 나의 생각이 되고, 성경이 제시하는 삶의 가치들이 어느 새 나의 가치관이 되어 그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끝으로,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배워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면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폴 워셔(Paul David Washer, 1961- 미국)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여러분의 삶을 비교하지 말고, 자신을 성경과 비교하십시오 (Stop comparing yourself with others who call them-selves Christians. Compare yourself to the Scripture).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나는 저 사람보다 훨씬 낫다는 우월감 에 빠지게 쉽고, 반대로 열등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마땅히 행동을 해야 할 때에도 “저런 사람도 가만히 있는데, 내가 뭘......” 하면서 주저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성경과 비교하면, 자신을 반성하게 되고, 때로는 말씀을 통해 격려를 받기도 하고, 용기를 얻게 됩니다.

 

저는 요즘에 음악을 많이 듣습니다. 전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까 음악을 듣게 됩니다. 클래식도 듣고, 팝송도 듣습니다. 어느 채널에서 1970년 대에 유행했던 사이먼 앤 가펑클이 부른 ‘El Condor Pas(엘 콘도르 파사)’라는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가사가 전과는 다르게 들렸습니다. “나는 달팽이가 되느니 차라리 참새가 되고 싶다. 나는 못이 되느니 차라리 망치가 되고 싶다.“차라리 참새가 되고 싶다” “차라리 망치가 되고 싶다” 라는 가사가 강력한 메타포(은유)로 제 귀에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느리고, 게으르고, 항상 제 자리를 맴도는 수동적인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훌륭한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소망하면서 오늘 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