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2024 | (성령강림후 제 16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9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Seeing the World Through God's Eyes)
유민용 목사
야고보서 2:1-10
2:1 나의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2 이를테면, 만일 여러분의 회당에 값비싼 옷을 입고 금반지를 낀 어떤 사람과 남루한 옷을 걸친 어떤 가난한 사람이 함께 들어왔다고 합시다. 3 그런 상황에서, 만일 여러분이 값비싼 옷을 입은 그 사람에게는 특별한 관심과 호의를 나타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라고 친절하게 말하고, 반면에 남루한 옷을 걸친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에 서 있든지, 내 발판 밑에 앉든지 하시오.”라고 퉁명스럽게 말한다면, 4 바로 여러분이 악한 마음을 품고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여 차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 ○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나아가 자신을 사랑하는 그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물려주신 것이 아닙니까? 6 그런데도 여러분은 그런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을 학대하는 자들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또한 여러분을 재판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도 역시 부자들이 아닙니까? 7 뿐만 아니라, 주 예수를 믿음으로써 여러분에게 주어진 고귀한 이름을 비방하는 자들도 역시 부자들이 아니고 누구란 말입니까? 8 여러분이 성경 말씀에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으뜸가는 율법을 지킨다면, 여러분은 정말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9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외모를 보고 사람을 차별한다면, 여러분은 죄를 짓는 것이고, 따라서 율법은 여러분을 범법자로 판정할 것입니다. 10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다 지키다가도 그중 한 가지만 어기게 되면, 율법 전체를 어긴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쉬운말 성경)
1 My dear brothers and sisters,[a] how can you claim to have faith in our glorious Lord Jesus Christ if you favor some people over others? 2 For example, suppose someone comes into your meeting dressed in fancy clothes and expensive jewelry, and another comes in who is poor and dressed in dirty clothes. 3 If you give special attention and a good seat to the rich person, but you say to the poor one, “You can stand over there, or else sit on the floor” well, 4 doesn’t this discrimination show that your judgments are guided by evil motives? 5 Listen to me, dear brothers and sisters. Hasn’t God chosen the poor in this world to be rich in faith? Aren’t they the ones who will inherit the Kingdom he promised to those who love him? 6 But you dishonor the poor! Isn’t it the rich who oppress you and drag you into court? 7 Aren’t they the ones who slander Jesus Christ, whose noble name you bear? 8 Yes indeed, it is good when you obey the royal law as found in the Scriptures: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d] 9 But if you favor some people over others, you are committing a sin. You are guilty of breaking the law.10 For the person who keeps all of the laws except one is as guilty as a person who has broken all of God’s laws. 11 For the same God who said, “You must not commit adultery,” also said, “You must not murder.” So if you murder someone but do not commit adultery, you have still broken the law. (New Living Translation)
성령강림후 열여섯번째 주일입니다. 이시간 예배하는 교우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안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야고보서가 쓰여진 1세기는 계급과 사회적 신분에 따른 차별이 뚜렷했던 시대였습니다. 야고보는 당시 회당에서 일어나는 빈부에 따른 차별 행위를 강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유대 사회속에서 사람들이 겪었던 차별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차별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이슈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나무위키 백과사전에서 차별금지법의 내용을 찾아보니까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생활영역에서 합리적 이유가 없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법을 말한다."라고 정의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차별에 대해 공감하며, 이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의 제정에도 불구하고, 실제 차별의 문제는 복잡한 양상을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차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보시겠습니다.
첫째, 야고보가 말하는 차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절)
1절에서 야고보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어서 그는 차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두 사람에 대한 묘사를 가정해서 설명하는데, 한 사람은 값비싼 옷을 입고 금반지를 끼었습니다. 권세가 있거나 유력한 부자를 비유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남루한 옷을 걸친 가난한 사람입니다. 대조적인 두 사람이 회당에 들어 왔는데 부자들에게는 좋은 자리를 권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자리는 커녕 퉁명스럽게 서 있든지 발판 밑에 앉으라고 홀대합니다. 외적인 것에는 신분이나 성별, 경제적 능력, 인종, 나이, 학력, 외모 등 여러 조건에 따른 것들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에 의해 차별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서울 강남의 8학군 지역은 교육의 성지로 불립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대학 진학률을 기준으로 학교의 서열이 정해지며, 학군 중심의 집값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합니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가정은 8학군 지역에 진입하기조차 어려운 실정입니다.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고자 하는 부모의 심리로 인해 지역 사회에서는 부에 따른 차별이 심화됩니다. 편애에 따른 차별의 예로,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의 편애로 인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요셉을 시기하여 노예상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방탕한 삶을 살고 돌아온 동생을 받아주며 잔치를 벌였고, 이로 인해 큰아들이 화를 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결정이 자신을 차별한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녀를 키우다 보면, 일을 더 잘하는 자녀에게 더 자주 부탁을 하거나 칭찬을 해줄 때가 있기도 합니다. 관계 속에서 완전한 형평성과 공정함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의 일부를 아버지 밑에서 열심히 일한 대가로 더 많이 받을 줄 알았다면,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호의가 부당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믿는 자들이 얻게 된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야고보가 차별을 금하라고 하는 이유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외적인 요소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나타난 크고 작은 죄를 판단하셔야 했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1세기나 21세기나 여전히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내용이 세상속에서 차별하는 가치와 부딪히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차별의 내용을 윤리적인 차원, 공정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신앙적 차원, 진리의 문제를 지켜나가는 고백과 결단의 의미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규범을 따르는 것을 넘어,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과정입니다. 이 회복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이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더 의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삶의 결핍과 비교의식이 느껴질때마다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고 극복할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은 차별을 피하기 위해 더 높은 지위와 풍요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나만을 위한 명예와 성공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믿는 믿음은 어떤 삶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1절에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의 믿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낮아지시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영광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야고보 사도는 스스로 낮추고 소외된 자들을 높이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영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주하는 현실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차별하는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피하지 말며,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믿음의 태도를 바르게 유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는 역사 속에서 수시로 변화하지만, 우리는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공정하신 분임을 믿고 현실 속에서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차별의 근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5-7절)
야고보는 차별의 근본적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옹호하시고, 부자에 대해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가난한 자가 믿음이 좋고 부자가 불의하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당시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 학대하며 재판장으로 끌고 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부자들의 횡포를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본문에서 부자들을 비판하는 두 가지 측면을 묘사합니다. 첫째는 잔혹하게 가난한 자를 재판장으로 끌고 가는 부자들의 악독함이며, 둘째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어진 고귀한 이름을 비방하는 불신입니다. 이는 단순히 윤리적 차원을 넘어 근원적인 마음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즉, 부자들 마음 안에 있는 교만함과 인간 본성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돈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중립적으로 다루기도 합니다. 물론 돈은 위험성이 클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돈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셨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기록된 부자청년의 이야기는 그 청년이 소유하고 있던 돈이라는 것이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방해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사랑하셨고 그가 어려서 부터 모든 율법을 다 지켰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이 청년은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질문합니다. 이때 주님은 그에게 십계명의 다섯가지 계명을 열거합니다. 부자 청년는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1절입니다. "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네게 있는 것들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비워내는 종교가 아닙니다. 주님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청년의 마음을 아시고 구원은 너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로 인해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주님을 떠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재물을 사용한다고 결단했다면 이 청년에게는 하늘의 평화와 구원의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주님은 영생에 대한 관심을 갖는 청년에게 단순히 계명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요구를 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깨닫습니다. 이후에 자신이 지녔던 외적인 조건을 배설물 처럼 여기며 주를 위한 영광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맘몬의 신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돈은 무조건 멀리하라는 의미 보다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의 고백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가난도 부함도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장애가 된다면, 그것은 우상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한량없는 사랑으로 회복하셨다면 우리가 가야할 길은 현재 주어진 것들을 사랑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인해 결핍과 차별의 마음이 자리 잡게 된다면, 이러한 감정들은 마음의 우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소외받는 사람들을 신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한마리의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계산법입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고아와 과부 객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바탕으로 고아원, 양로원, 학교, 병원 등이 세워졌습니다. 성경적 명령과 원칙을 실천하려는 노력의 결과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입니다. 반면에 믿는 사람들은 현실을 동일하게 바라보면서 그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구하며 그분의 뜻을 구하게 됩니다. 같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어도 상황을 해석하는 시각이 전혀 다릅니다.
우리 하나님은 회복할 수 없는 이들의 억울함을 들으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사랑이 주님 안에서 온전하게 드러났습니다. 십자가의 원리는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뒤집는 사건입니다.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구원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십자가의 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원리는 세상의 교양과 지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이며, 믿음 안에서 차별의 모든 근본적인 원인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기적을 요구했고, 그리스 사람들은 바울에게 철학적 지혜를 구했지만 야고보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 답이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셋째, 야고보는 차별의 결과 대해서 말씀합니다. (9-10절)
차별의 결과는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기에 죄는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계명 중에 어떤 것은 지키고 다른 어떤 것은 소홀히 하는 태도를 취했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모든 율법은 빠짐없이 지켜야 함을 밝힘으로써 율법의 가볍고 무거움을 따지는 태도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율법의 모든 계명을 다 지키다 가도 그중 한 가지만 어기게 되면, 율법 전체를 어긴 셈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마지막 심판은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고 있는가 날마다 점검해야 합니다. 한주만 시동을 걸지 않아도 자동차의 엔진 상태가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세상의 성공만을 향해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으뜸가는 율법을 지킨다면, 정말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율법과 사랑은 대조적이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을 으뜸이 되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이 법은 구약의 레위기 19:18절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빠지면 율법주의가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이 사랑의 법을 삶의 지표로 삼고 실천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차별하지 말라는 것은 삶의 표준이 되는 명령입니다. 차별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해법은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땅히 심판받을 자들에 대해 긍휼하심을 보임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께도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마 5:7) 따라서 자비로운 마음은 사랑의 새계명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적용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율법을 긍휼의 관점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억지로 가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주의 길을 걷는자에게 함께 해 주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성취 하셨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은 좁고 협착한 길이라 느껴질지라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영광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길을 걷는 이들에게 주님은 영광의 보좌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함을 지닌다면, 하나님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깨달음을 주시고 자비를 실천하는 여러분에게 새힘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