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2024 | (성령강림후 제 24주 예배)
듣고, 깨닫고, 사랑하라 (Listen, Understand, and Love)
유민용 목사
마가복음 12:28~31
28 ○ 율법 교사들 가운데 한 명이 거기에서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답변을 아주 잘 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께 또 물었다. “모든 계명들 중에서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가장 중요한 계명은 이것이오. 곧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주께서는 유일한 분이시다. 30 그러므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31 그리고,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는 것이오. 이 두 계명보다 더 크고 중요한 계명은 없소.” (쉬운말 성경)
28 One of the teachers of religious law was standing there listening to the debate. He realized that Jesus had answered well, so he asked, “Of all the commandments, which is the most important?” 29 Jesus replied, “The most important commandment is this: ‘Listen,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the one and only Lord. 30 And you must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ll your soul, all your mind, and all your strength.’[g] 31 The second is equally important: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h] No other commandment is greater than these.” (New Living Translation)
종교개혁자 루터는 양심에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때 쉴새 없이 안간힘을 쓰며 고해성사를 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죄까지 어떤 때는 여섯 시간씩 고해성사를 했어요. 고해를 할 때에 십계명을 훑어 내려가며 자신의 일생을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그의 고해성사를 받아주던 스승 슈타우피츠 신부가 '이봐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화를 내시고 있는게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군요. 소망을 지니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잊었냐고 소리치며 그리스도께 용서를 받고 싶거든 자질구레한 죄가 아니라 다음에는 큰 죄를 짓고 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루터는 그렇게 죄를 고백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자신의 검열을 피해 빠져나간 죄로 인해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인간의 성품 자체가 타락해 있다는 사실과 씨름하며 깊은 괴로움을 경험했습니다. 믿음으로 고뇌하던 그 자리에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이라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루터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참된 믿음을 발견한 것처럼, 오늘 우리가 발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사건 이후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에 대해서 예수를 책잡으려고 하는 이들과 논쟁이 벌어집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과도 논쟁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지켜본 한 율법 교사가 예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듣고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가를 질문합니다.
12:28 ○ 율법 교사들 가운데 한 명이 거기에서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답변을 아주 잘 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께 또 물었다. “모든 계명들 중에서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질문을 들으시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은 이것이오. 곧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주께서는 유일한 분이시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한 율법 교사도 처음에는 듣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하나님은 시대마다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비유로 전하셨습니다.
첫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신명기 6장 5절을 인용한 것인데, 유대인들은 아이가 자라면서 말을 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쉐마’의 첫 절인 이 말씀을 가르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쉐마’라는 것은 ‘듣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입니다.
우리는 정말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소식도 어디서나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가 만들어 지기 전에 듣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아이들도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시간을 통해서 언어를 배우게 되잖아요. 하나님의 말씀도 먼저는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롬10:17)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때, 죽었던 믿음이 살아납니다. 신앙의 영적 상태를 평가하는 척도는 우리가 말씀을 듣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듣는 이들의 마음에 생명의 말씀을 주십니다.
포로 귀환 후 돌아온 백성들은 성벽을 재건한 뒤, 율법책을 읽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에스라가 큰소리로 말씀을 낭독할 때, 온 회중은 그 말씀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숨죽여 낭독하는 소리에 집중하며 듣다가, 읽기 시작하자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마음이 벅차올랐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기록된 말씀(the written Word)”, “계시된 말씀(the revealed Word)” "선포된 말씀(the preached Word)”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적으로 나타나셨고, 성경은 그 말씀이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 설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때 보이지 않는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신앙생활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보여야 믿겠다는 태도보다는, 기록되고 계시된 말씀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록된 것은 주님께서 역사의 일부가 된 것이고, 성도에게는 영생의 시간을 살아가는 세계가 펼쳐 졌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율법교사의 질문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영생은 보이지 않는 개념이며, 그 단어는 지극히 추상적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면 영생을 실제로 갈망하고 그로 인해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이는 계명의 본질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라는 법관원은 "귀 있는 자들아 들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평생 동안 율법을 읽었고, 높은 직책에 있었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야 하냐고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데 있습니다. 모든 나라에 교회가 세워지고 매주일 말씀은 선포되고 있지만,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온 그 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 가야 합니다.
둘째,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입니다.
루터는 깨달음을 통해 관점이 변화되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씨름하던 문제는 바로 회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영국에서 태어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Martin Lloyd-Jones, 1899-1981)은 촉망받는 젊은 의사였는데, 28세에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의사의 직업을 내려놓고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는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저는 살인이나 간음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시편 51편의 다윗의 회개가 제게는 와닿지가 않습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간음과 살인죄를 연속적으로 범한 사건(B.C. 991년경)에 대하여 나단 선지자 로부터 책망을 듣고 자기 죄를 참회하며 지은시입니다. 이때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Martin Lloyd-Jones, 1899-1981)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회개는 죄의 종류나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는 데 있습니다. 마음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인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자신이 전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고,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의지에서 비롯되는 행동이 곧 기독교 신앙입니다.
어느 날 요나에게 이방나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전에는 이방인들에게 가도록 보냄 받은 예언자는 없었습니다. 요나는 말씀을 듣고도 니느웨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느끼며, 그들이 구원받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화를 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용기가 없었던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로 도망가고 싶어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키셨고, 배에 있던 사람들은 각자의 신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선장은 요나에게도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풍랑이 일기 전 잠들어 있던 요나는 이제 위기 속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배에 있던 사람들에게 "나는 히브리 사람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나 때문에 풍랑이 일어 난 것이라 자백합니다. 사람들은 요나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며 노를 저어 보았으나, 풍랑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결국,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요나의 마음속에 얼마나 괴로운 씨름이 일어났겠습니까? 요나에게는 죽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구원의 물고기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요나는 깊은 바다, 물고기 뱃속에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러 비로소 구원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마틴로이드 존스(Martin Lloyd-Jones, 1899-1981)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옥에 보내시더라도 나는 변명할 입장이 없습니다. 그럴 만한 일입니다”라고 말하며, 이것이 진정한 회개라고 설명했습니다. 크리스챤에게는 주어진 길이 있습니다. 이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이 궁극적인 부르심은 우리가 일상속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점검하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첫째 계명으로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라고 하셨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가치입니다. 그러나 사랑만으로 갈등을 다 해결할 수 없고 사랑으로만 섬기는 것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12장 18절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여러분 쪽에서 먼저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도록 하십시오.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갈등 앞에 어려운 문제 앞에 사랑보다 더 큰 힘은 없을 것입니다. 갈등을 넘어서는 사랑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 두개의 계명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팀 켈러는 그의 책과 설교에서 율법주의와 상대주의를 인간이 진정한 복음을 대체하는 두 가지 잘못된 방식으로 자주 설명합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행위와 규칙 준수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사고방식입니다. 따라서 율법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데 집중합니다. 율법주의는 사람을 자만에 빠지게 하거나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반면에 상대주의자는 절대적 권위의 명령을 무시하고,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기준에 따라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고는 결국 하나님 없이 인간의 판단을 최우선으로 여기게 되어 잘못된 믿음을 형성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받은 선물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된 삶을 통해 열매 맺는 참된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사회의 관습을 뛰어넘는 진정한 이웃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이웃의 대상은 유대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강도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 설명하셨습니다. 유대인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이 오히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었음을 비유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가장 큰 계명안에 담긴 핵심이 무엇이냐는 것은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까지 아낌없어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613개의 규정이 있었고, 유대 랍비들은 어느 규정이 더 크고 무겁고, 어떤 것이 더 작고 가벼운지에 대해 끝없는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율법의 완성이 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쏜 죄악의 화살이 예수의 심장을 관통했을 때, 그 화살을 빼내어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 내시고, 그 사람에게 사랑으로 돌려주시며 사랑하는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 십자가 안에 정의와 사랑이 조화롭게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과 용서의 개념을 자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믿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시각으로만 상대를 바라보고 주관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내 편'과 '너의 편'이 나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나의 편'이 아닌 대상을 부정하거나 배척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이러한 시대에 참된 성도에게 필요한 믿음의 자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자신의 아들을 적극적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성도의 존재가 변화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가장 중요한 계명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예수께 표적을 요구했지만, 주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다른 표적을 보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바꾸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사랑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작은 노력일지라도 우리가 받은 사랑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지체들에게 손 내밀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을 통하여 놀라운 일들을 이뤄가실 것입니다. 한주도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듣고 깨닫고 사랑한 삶의 노력과 흔적을 지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