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0/2024 | 성령강림후 제 25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36 작지만 가장 큰 마음 (A small but the greatest heart)
유민용 목사
막 12:38-44
38 ○ 예수께서 또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율법 교사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은 긴 예복을 입고,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인사 받기를 좋아합니다. 39 또한 그들은 회당에서 제일 높은 자리만 찾고, 잔칫집에서도 윗자리에만 앉습니다. 40 뿐만 아니라, 과부들의 재산을 가로채 빼앗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장차 더 엄중한 벌을 받을 것입니다.” 41 ○ 한번은 예수께서 성전 뜰에 있는 헌금함 맞은편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 넣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다. 많은 돈을 넣는 부자들이 적지 않았다. 42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헌금함에 넣었다. 43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넣었다. 44 다른 사람들은 넉넉한 가운데서 조금 떼어내어 넣었지만, 저 과부는 극히 가난한 중에서도 자신이 가진 생활비 전부를 바친 것이다.” (쉬운말 성경)
38 Jesus also taught: “Beware of these teachers of religious law! For they like to parade around in flowing robes and receive respectful greetings as they walk in the marketplaces. 39 And how they love the seats of honor in the synagogues and the head table at banquets. 40 Yet they shamelessly cheat widows out of their property and then pretend to be pious by making long prayers in public. Because of this, they will be more severely punished.” 41 Jesus sat down near the collection box in the Temple and watched as the crowds dropped in their money. Many rich people put in large amounts. 42 Then a poor widow came and dropped in two small coins. 43 Jesus called his disciples to him and said, “I tell you the truth, this poor widow has given more than all the others who are making contributions. 44 For they gave a tiny part of their surplus, but she, poor as she is, has given everything she had to live on."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 본문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율법교사와 가난한 과부입니다. 이 두 사람은 당시 사회에서 상반된 신분을 가진 인물들이었습니다. 율법교사는 부와 존경을 받으며 높은 지위와 명예를 누렸던 사람들이었고, 반면에 과부는 가난과 멸시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는데, 이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서 경건한 모습을 과시하는 것을 조심하라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드린 것은 주님께서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부유한 율법교사들이 가난한 과부의 재산을 착취하는 탐욕적인 마음과,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모든 것을 드린 과부의 마음은 분명하게 대비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섬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는 이 말씀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마음의 자세를 재조명하게 합니다. 물질의 소유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와 가난한 과부를 대조하면서 참된 경건의 본질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율법교사들은 외적인 모습과 사회적 지위를 과시한 반면, 가난한 과부는 모든 것을 드리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첫째, 참된 경건을 어떻게 채워가야 하는가?
하나님은 다윗의 연약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를 가르켜 '내 마음에 합한 자' 라고 칭찬 하셨는데, 다윗의 마음을 볼수 있는 기도문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역대상 29장 12절에서 14절입니다.
12 이 세상의 온갖 부요와 영광이 모두 주께로부터 말미암으니, 진실로 주께서는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강하고 위대하게 되는 것도 모두 주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13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높이 찬양합니다. 14 주여, 우리가 이토록 즐겁게 예물을 바칠 힘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저나 제 백성에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오직 주께로부터 나온 것이며, 우리는 주의 손에서 나온 것을 다만 주께 바쳤을 뿐입니다.(역대상 29: 12-14)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또한 다윗은 사람이 강하고 위대하게 되는 것도 결국 주의 손에 달려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의 기도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주님을 향한 찬양의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찬양과 감사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헌금은 결코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의 진실함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것을 넣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 벽을 따라 일렬로 놋쇠로 만든 나팔 모양의 헌금함이 13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성전 뜰에 있는 헌금함 맞은편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 넣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당시 모든 화폐는 금속을 주조하여 만든 동전이었기 때문에 헌금의 많고 적음을 소리로 쉽게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여러 부자들이 와서 많은 돈을 헌금하는 것은 인간적인 과시로 헌금을 했다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의 헌금과 과부의 헌금을 주목하셨습니다.
"많은 돈을 넣은 부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라는 구절에서 "넣다", "던지다"라는 단어는 ἔβαλλον (에발론)으로 미완료형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이는 부자들이 반복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자신이 부유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동전을 집어 넣은 모습을 묘사합니다. 아마도 놋쇠로 된 헌금함에 동전이 들어가는 소리가 길고도 크게 들렸을 겁니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가 넣은 두 렙돈은 ἔβαλεν (에발렌)으로 부정과거형으로 쓰여있습니다, 이는 과부가 동전 하나를 조용히 넣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때 과부가 헌금을 하며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유추해 볼수 있는 것은 동전 한개의 소리가 작고도 초라했을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진심으로 드린 과부의 헌금을 더 많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차이는 액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돈과 성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 다르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물질과 명예가 성공의 척도로 여겨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내면의 진실된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외식하는 자가 되기 쉽도록 모든 것이 세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쩔수 없이 세상속에서 높아지기 위해, 소유하며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추구하고 살아가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과 가정과 일터 그리고 모든 관계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살펴 보시고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의 걸음입니다. 내가 가진 마음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 아픈 마음도 먹먹한 마음도 주님 앞에 온전히 내어드리며 나의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회복되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둘째, 참된 경건은 출발점이 다릅니다.
세상의 섬김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성도의 섬김은 하나님을 위한 섬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서는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말씀 앞에 서서 자신의 죄와 내면의 연약함을 깨닫고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랑할 때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때, 그 사람의 내면의 동기가 변화하게 됩니다. 부족한 것이라도 채워주려는 마음,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2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여러분은 하나님을 닮는 자들이 되십시오." 5: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서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의 삶을 살아가십시오.(쉬운말 성경)
많은 사람들이 ‘경건’을 겉으로 드러나는, 눈에 띄는 말이나 행동으로 오해합니다. 경건의 삶은 먼저 마음의 동기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회개한 후에 그 동안 토색하던 물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절반이나 돌려 주었습니다. 이는 그의 물질관이 변화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경건의 삶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경건해질수록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들은 자신을 더 낮추며, 주님처럼 내어주는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율법교사들은 회당이나 잔칫집에서 항상 윗자리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를 길게 하는 등 외적인 경건을 중시했습니다. 물론 기도를 길게 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성전에서 일어난 마지막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앞장인 마가복음 11장에서 주님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에게 분노하시며,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강력히 질책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성전이 그저 상업적 이익을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으며, 이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거룩한 공간으로 회복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성전의 개념을 외형적인 건축물에서 신앙의 내적인 차원으로 확장하여 "마음의 성전"이라는 개념을 강조합니다.
고린도 전서 6:19-20절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KRV 고린도 전서 6:19-20)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 안에 충만히 임재하시면, 점차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외적인 모습에 치중하며 살아갑니다. 겉모습은 깨끗하고 화려해 보여도, 내면의 상태가 부패하면 결국 그 모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만일 겉은 깨끗한 컵이지만 안에 담긴 내용물이 오래되어 신선하지 않다면 결국 그 컵의 내용물은 썩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지도자였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1615 - 1691)는 ‘참목자상’이라는 책에서 '자아성찰'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첫째, 은혜의 역사가 자신의 영혼안에서 온전히 이뤄지고 있는지 살펴보라 둘째,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에 만족하지 말고, 그 은혜가 활기차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보라 셋째, 행동이 자신의 가르침과 배치되지 않는지 살펴 보라 넷째, 다른 사람의 죄는 지적하면서 자신은 혹시 그런 죄에 빠져 있지 않는지 살펴보라 다섯째 자신의 사역에 필요한 자격 요건을 갖추기 꺼려하지는 않는지 살펴보라
경건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삶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점차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도움을 줄 때에는 드러나지 않게 도우라고 하십니다. 드러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낮아져야 하는 것이 성경의 지혜입니다.
마태복음 6:3-4절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3 그러므로 당신이 친절을 베풀 때는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십시오. 심지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조차도 모르게끔 하십시오. 4 그렇게 해서, 당신의 자선 행위를 아무도 모르게 고이 숨겨 두십시오.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는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쉬운말 성경 마 6:3-4)
교회의 주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시선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형식과 겉모습만 남고 그 본질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Oswald Chambers, 1874-1917) 는 '제자도'라는 그의 책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실 때, 아무도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하는지를 정확히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영광을 구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자리가 신앙인들에게 위험한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자리가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유혹의 자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도 교만과 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교사들의 경건이 형식적이었던 이유는 그들이 사회적 존경을 받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종종 자신의 위엄과 지위를 과시하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 했습니다. 물론 모든 율법교사들이 다 경건의 형식만 추구한 것은 아닐겁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교훈해주셨습니다.
믿음의 시선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며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가 진정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려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원리입니다. 믿음의 본이 되신 주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진실한 믿음의 길 앞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걸어 가다보면 고난 앞에서 울 수 밖에 없고, 매일의 마음의 넘어짐 앞에서 주저 할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나의 연약함까지도 내어 드리며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작은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큰 믿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그 진실한 마음 붙들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순전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교우들의 삶에 이번 한주도 주님의 평안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