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2016 | 성령강림절 후 열 세 번째 주일
안디옥 교회 (The Church Of Antioch)
김태환 목사
사도행전 11:19-26
19 스데반의 일로 발생한 박해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베니게와 키프로스와 안디옥까지 피해 가서는 오직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했습니다.
20 그들 중에는 키프로스와 구레네 출신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은 안디옥에 이르러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21 주님의 손길이 그들과 함께 하셨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22 이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지자,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습니다.
23 그는 안디옥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굳게 하여 주님을 의지하십시오”라고 격려했습니다.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25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갔습니다.
26 사울을 찾은 바나바는 사울을 안디옥으로 데려왔습니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교회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쉬운성경)
구약성경 이사야 55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8-9절) “My thoughts are nothing like your thoughts, and my ways are far beyond anything you could imagine. For just as the heavens are higher than the earth, so my ways are higher than your ways and my thoughts higher than your thoughts.” (New Living Translation)
또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우며,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 보다 더 강합니다.” (고린도전서 1:18, 25)
또, 빌립보서 4:6-7에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고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아뢰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어느 누구도 측량할 수 없는 평안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 가운데 풍성히 임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 이란 말은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이란 말입니다. ‘transcend’라는 말이 ‘뛰어 넘는다’ ‘초월(超越)하다’라는 뜻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불안하고, 초조할 때는 그 하나님의 평안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며, 그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준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사도들이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그 과정 속에 함께 하시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급성장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3,000명쯤 되더니 (사도행전 2:41), 곧 그 수가 5,000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사도행전 4:4). 그러더니 나중에는 더 이상 숫자가 나오지 않고, “날이 갈수록 제자들의 수는 늘어만 갔습니다 (사도행전 6:1)”라고 나옵니다.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 순교자가 나오고, 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스데반의 일로 발생한 박해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베니게와 키프로스와 안디옥까지 피해 가서는......” (사도행전 11:19)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옵니다. “Meanwhile, the believers who had been scattered during the persecu-tion after Stephen's death traveled as far as Phoenicia, Cyprus, and Antioch of Syria.” ‘Phoenicia’는 유대나라의 서쪽 지중해 연안을 말합니다. ‘Cyprus’는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가서 터키 밑에 있는 지중해의 섬입니다. ‘Antioch of Syria’는 시리아에 있는 지중해 연안의 도시입니다. 제가 안디옥에는 가 봤습니다. 무척 더웠습니다. 지금은 무슬림들 천지(天地)고요. 지금 시리아 난민들이 문제가 되고 있는 그 나라입니다. 1세기에 시리아의 안디옥은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바울은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을 모두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마지막 선교여행이었던 3차 선교여행은 안디옥을 출발하여 안디옥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과정 속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믿는 사람들의 수가 불어난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을 흩으시려고 했던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서 지중해 연안으로 도망쳐 숨은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게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영감(靈感)을 얻어야 합니다. 바울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의 목적대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이 ‘work together (합력해서)’ 좋은 일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솔로몬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때에 따라 아름답게 이루어 놓으시고 모든 일에 기한도 정해 놓으셨으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지 못하도록 하셨다.” (전도서 3:11) 당장에는 왜 우리가 박해를 받아야 하느냐고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을 유대 나라를 떠나게 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시려고 계획 하신 것입니다.
시리아 안디옥에 몇 사람의 신자들이 모였습니다. 키프로스와 구레네 출신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습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이들은 왜 안디옥으로 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정황으로 봐서 이 사람들도 박해를 피해서 키프로스와 구레네로 갔던 사람들인 것 같은데, 왜 다시 안디옥으로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me of the believers who went to Antioch from Cyprus and Cyrene began preaching to the Gentiles① about the Lord Jesus.” /①Greek the Hellenists (i.e., those who speak Greek); other manuscripts read the Greeks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이 그리스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1세기에 시리아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에 대하여 몇가지 꼭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로, 안디옥 교회는 최초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열린 교회였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처음에 박해를 피해서 지중해 연안으로 숨은 신자들은 현지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19절에 나오잖아요? “They preached the word of God, but only to Jews.” 그런데, 키프로스와 구레네에서 안디옥으로 온 신자 몇 사람이 그리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유대인들은 본능적으로 이방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이방인에게 가까이 접근하고, 대화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 키프로스와 구레네에서 온 신자들은 열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에 이민 와서 사시는 분들이나, 유학생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축복은 이곳에서 열린 사고를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다양한 인종,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통해서 우리도 모르게 열린 사고를 하게 됩니다. 나와 다른 것들의 가치를 존중하게 되고, 인정하게 됩니다. 제가 이번에 한국에 나가서 한 2주 있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많이 답답하고 했을 텐데, 이젠 한국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린 사회’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이 키프로스와 구레네에서 온 신자들은 열린 생각을 가지고 그리스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시리아 안디옥 교회는 이 사람들 덕분에 이방선교의 센터가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러분들에게도 이 ‘열린 사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여러분 속에 여러분도 알지 못했던 보물이 들어 있습니다. 키프로스와 구레네에서 온 신자들은 이 선물을 이용하여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선물을 어떻게 하나님의 일에 사용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둘째로, 안디옥 교회는 인재를 기르는 교회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바나바 (Barnabas)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에 파견한 조사관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에 이방 사람들이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어떻게 된 일인지 조사하기 위하여 바나바를 파견한 것입니다. 바나바의 눈에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보였을까요? 유대인과 이방인이 같은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이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시지요. “그는 안디옥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굳게 하여 주님을 의지하십시오”라고 격려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23-24절) 바나바의 눈에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유대교를 믿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같이 믿음 생활하는 것을 보고,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나바는 그가 보고 느낀 대로 예루살렘교회에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바나바는 한동안 안디옥 교회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나바는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때 사울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자기 고향 다소 (Tarsus)에 은둔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있었지만, 고향에 은둔하고 있는 사울을 불러낸 것이 바나바였습니다. 둘이서 함께 일년 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안디옥 교회는 인재를 알아 보고 기르는 교회였습니다. 저는 우리교회도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기르는 교회요. 아무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등용되어서 리더십을 기르고, 간사로 부름을 받아서 쓰임을 받고, 자기가 가진 재능을 하나님의 사역에 사용할 수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맡고 있는 작은 일이라고 하찮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알지 않습니까? “참 잘했구나. 너는 착하고 신실한 종이다. 네가 적은 것에 최선을 다했으니 내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너에게 맡기겠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마태복음 25:21, 23) 우리교회가 이 말씀을 실험하고 실천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로, 인디옥 교회는 베푸는 교회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참여하는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 헌금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말씀 다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자기들만 아는 이기적인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알고 그 아픔을 함께 나누는 교회였습니다. 지금 영국의 브렉시트 (Brexit)를 결정하고 유럽 연합 (EU)에서 탈퇴한 배경에 그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살기 어려운데 유럽 연합에 계속 남아 있으면 우리가 더 힘들어진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결정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결정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지금은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잖아요? 안디옥 교회는 나만 살자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구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 들이는 교회, 그들의 아픔을 품고 기도하고, 필요하다면 헌금을 보낼 수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Christian’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교인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은 ‘크리스천들 (Christians)’이다” 이렇게 부른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처음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중에 로마 시대에 크리스천들이 대대적으로 핍박을 받았을 때는 혹시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이 말이 사용되었을 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말로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습니다. 칭찬을 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는 예수를 따라 사는 사람들인데,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야. 우리가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이야!” 이런 칭찬을 들었습니다.
제가 이 ‘Christian’이란 말을 보면서 느낀 점은, 처음에 이 말이 사용되었을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동일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이름이 붙어 다닙니다. 여러분은 이 이름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이름인지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깁니까? 혹시 여러분은 이 이름에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Christian’이란 말과 반대되는 말은 ‘Non-Christian’이란 말이 있습니다. 뜻으로 보면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Non-Christian’처럼 살고 있다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