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1/2016 | 마가복음 강해설교 50
즐겁게 말씀을 듣는 사람들 (Those Who Are Listening to Him with Great Delight)
김태환 목사
마가복음 12:35-40
35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어째서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36 다윗 자신은 성령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내 주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37 다윗 자신도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습니다.
38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을 주의하여라. 이들은 긴 옷을 입고 걸어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
39 이들은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도 윗자리를 좋아한다.
40 이들은 과부의 집을 삼키며,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35 Later, as Jesus was teaching the people in the Temple, he asked, "Why do the teachers of religious law claim that the Messiah is the son of David?
36 For David himself, speaking under the inspiration of the Holy Spirit, said, `The LORD said to my Lord, Sit in the place of honor at my right hand until I humble your enemies beneath your feet.'① / ①Ps 110.1
37 Since David himself called the Messiah `my Lord,' how can the Messiah be his son?" The large crowd listened to him with great delight.
38 Jesus also taught: "Beware of these teachers of religious law! For they like to parade around in flowing robes and receive respectful greetings as they walk in the marketplaces.
39 And how they love the seats of honor in the synagogues and the head table at banquets.
40 Yet they shamelessly cheat widows out of their property and then pretend to be pious by making long prayers in public. Because of this, they will be more severely punished."
예수님의 생애는 사생활 (the private life)과 공생애 (the public life)로 나눌 수 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예수님의 생애를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시절에 예수님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서른 살 이후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삼 년간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서는 네 복음서에 비교적 상세하게 잘 나와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마태복음 4:23, “Jesus went throughout Galilee,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preaching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and healing every disease and sickness among the people”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가르치는 사역 (teaching ministry), 설교 (혹은 선포) 사역 (preaching ministry), 치유 사역 (healing ministry), 이 세 가지로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알기 쉽게 잘 정리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치는 사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떤 점에서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과 달랐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이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어째서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35절) 여러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동방박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탄생한 아기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그 아기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시민들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이 헤롯 왕에게 들어갔습니다. 헤롯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불러 모으고,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베들레헴이란 마을입니다. 예언자들의 기록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미가 선지자 (미가 5:2), 이사야 선지자가 모두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 (이사야 11:1)으로 온다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들의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가장 강렬했던 때였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모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여리고 (Jericho)에 살고 있던 바디매오 (Bartimaeus)라는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람은 “A blind beggar named Bartimaeus, the son of Timaeus (디매오의 아들 소경 거지 바디매오)”였습니다. 이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향하여 "Jesus, Son of David, have mercy on me!" 하고 소리 지르지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예수님 당시에 율법학자들과 같은 지도자들이나,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나, 바디매오와 같은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나 모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어째서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질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당신들 아무 생각 없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치는데, 이런 성경 말씀을 읽어 보았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시편 110:1 말씀을 한번 보시죠. “For David himself, speaking under the inspiration of the Holy Spirit, said, `The LORD said to my Lord, Sit in the place of honor at my right hand until I humble your enemies beneath your feet.' Since David himself called the Messiah `my Lord,' how can the Messiah be his son?" (다윗 자신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나의 주님께 내가 너의 발 아래 너의 원수를 굴복 시킬 때까지 이리 와서 나의 오른편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아라.’ 그러면 다윗 자신이 메시아를 가리켜 나의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그의 아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베들레헴 다윗의 고향에서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셨는데,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당연히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인간적인 관점 (a human point of view)에서 본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정리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은 인간의 족보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로마서 1:3-4)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맞지 않습니다.
한번 정리를 해 볼까요? 예수님의 teaching은 전통이나 관습,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임에도 불구하고 시편 말씀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말씀을 전체적으로 보시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teaching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똑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은 당시의 사람들이 얽매여 있던 안식일 법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하셨습니다. 이 새로운 해석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보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율법 조항에 매여 있을 때에, 예수님은 비록 안식일이라도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 보시죠.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마가복음 3: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es the law permit good deeds on the Sab-bath, or is it a day for doing evil? Is this a day to save life or to destroy it (율법은 안식일에 선한 행위를 하도록 허용하고 있느냐? 아니면 악한 일을 하도록 하고 있느냐? 안식일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날이냐? 아니면 생명을 파괴하기 위한 날이냐)?"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아세요?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명쾌한 말씀에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But they remained silent).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teaching에 대한 그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주의 깊게 읽어 보았습니다. 마가복음에 이렇게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것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분처럼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22)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people were amazed at his teaching, for he taught with real authority-- quite unlike the teachers of religious law.”
이 말씀에서 주의 깊게 읽어야 할 것은 예수님의 교훈은 율법학자들의 교훈과 달랐다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의 교훈에서 볼 수 없었던 권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입는 옷도 보통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나오지 않습니까? “이들은 긴 옷을 입고 걸어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 이들은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도 윗자리를 좋아한다. 이들은 과부의 집을 삼키며,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길게 기도한다.” (38-40절) 간단히 말하면, 율법학자들의 권위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권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오는 권위는 ‘real authority (진정한 권위)’였다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지금은 연세가 많으셔서 글씨 쓰는 일을 그만 두셨지만, 한동안 붓글씨에 심취 하셨습니다. 예전에 서당 교육을 받으셨으니까 붓글씨 기본이 되어 있긴 하셨는데, 은퇴하신 후에 뉘늦게 붓글씨에 심취하셨습니다. 붓글씨 대회에 나가셔서 입상하신 경력도 있으십니다. 저에게도 친히 쓰신 글을 몇 점 주셨습니다. 그 중에 ‘진광불휘(眞光不輝)’라는 글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진짜 빛은 찬란하지 않다’ 이런 뜻입니다. 공자의 말입니다. 가짜는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서 화려하게 치장을 합니다. 그러나, 진짜는 화려하게 치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빛은 나지 않지만 진짜입니다. 율법학자들의 권위는 사람들이 만든 인위적인 권위였습니다. 진짜 권위처럼 보이기 위해서 긴 옷을 입습니다. 어디 가면 윗자리에 앉습니다. 기도 할 때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길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참된 권위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 속에 들어 있는 참 권위를 발견했습니다.
또 마가복음 1:27에는 사람들의 이런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가 있는 새로운 교훈이다. 더러운 귀신들도 저 분의 명령에 복종하는구나!” (마가복음 1:27)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hat sort of new teaching is this? It has such authority! Even evil spirits obey his orders!” 그동안 율법학자들이 가르치는 판에 박은 듯한 교훈만 들어왔는데, 예수님의 교훈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new teaching with authority (권위 있는 새로운 교훈)’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말씀에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나와 있습니다. “The large crowd listened to him with great delight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즐겁게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이 사람들이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즐거워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entertainment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즐거워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감추어진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아하, 그리스도,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긴 하지만,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다윗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를 ‘주님 (Lord)’ 이라고 불렀구나!” 이런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사람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도 작은 나라이지만, 이스라엘은 더 작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면적이 큰 나라는 러시아이고요. 캐나다, 중국, 미국 브라질 순입니다. 우리나라는 100,210km2로 107위입니다. 북한은 우리나라보다 조금 큽니다. 이스라엘은 20,770km2로 149위입니다. 우리나라 면적의 1/5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삽시간에 온 나라에 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는 이른 새벽부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 말씀이 요한복음 8:2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성전 뜰로 가셨습니다. 온 백성이 그분 주변에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But early the next morning Jesus was back again at the Temple. A crowd soon gathered, and he sat down and taught them.” (NLT) “At dawn Jesus appeared again in the temple courts, where all the people gathered around him, and he sat down to teach them. (NIV)
1세기에,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열광했습니다. 이른 아침도 마다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빈 들, 광야도 마다하지 않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성경의 기록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5:32).
그 때, 그 사람들은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들은 여러가지 일로 분주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다양해졌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즐거움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진리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즐거움을 잃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너무 많은 일 때문에 걱정하며 안절부절하는 구나. 그러나 필요한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누가복음 10:41-42) 우리의 삶에 절대적으로 ‘오직 필요한 한가지 일 (only one thing worth)’ 이것이 무엇일까요? 이 말씀 뒤에 마리아의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한가지 일’은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인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을 대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바꾸어 보십시오. 이 책 속에 온갖 지루한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 속에 내가 다 아는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 속에 나와 아무 상관 없는 것들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저에게 성경은 무슨 책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사람답게,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성경 속에 여러분의 삶을 가치 있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길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즐거움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회복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