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2016 | 사순절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자.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김태환 목사
히브리서 12:1-6
1 우리에게는 이렇게 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말고 우리 앞에 있는 경주를 열심히 합시다. 우리의 삶 속에서 방해가 되는 것들은 다 없애 버리고, 우리를 쉽게 옭아매는 죄를 벗어 버립시다.
2 우리 믿음의 시작이며, 또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모든 부끄러움을 참아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기쁨을 기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분은 하나님 보좌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3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그를 미워해서 악한 일을 할 때에도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지칠 때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본을 따르기 바랍니다.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고 있지만, 아직 죽을 정도까지 싸워 보지는 않았습니다.
5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격려하듯이 말씀해 주신 것을 잊었습니까? “내 아들아, 주의 훈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실 때,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벌을 주시고, 그의 아들로 받아들인 자들을 채찍질하신다.” (쉬운성경)
이제 사순절이 막바지로 접어 들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한마디로 예수님에게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고, 몸과 마음을 예수님께 고정하는 기간입니다. 이번 사순절 새벽기도에서 히브리서 강해를 선택했는데, 말씀이 어렵다는 평도 있고, 재미 없다는 평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 자신은 어려운 말씀에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기 때문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예수님께 우리 시선을 고정하고 사순절을 보내는데 가장 적합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 중에 “예수님만을 바라 봅시다 (2절)” 이런 말씀이 나오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3절)”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언제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한 적이 있었습니까? 언제 우리가 예수님을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까? 놀랍게도 그런 시간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생각한 적이 많았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충격적입니다. 그만큼 오늘 우리에게는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You are worried and bothered about so many things (넌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들이 너무 많구나)!” (누가복음 10:41)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르다 (Martha)라는 여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꼭 오늘 우리들의 삶을 지적해서 하신 말씀 같이 들립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을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자는 말이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 “Consider him”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consider’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알고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히브리서 저자의 말을 ‘consider’라는 말로 번역했을까 하고, 이 말을 사전에 찾아 봤습니다. 의외로 이 단어에 중요한 뜻이 많이 있었습니다. ‘to think carefully about, especially in order to make a decision (결단을 하기 위해 이것저것 깊이 생각하다)’ 이런 뜻입니다. 또 ‘to pay attention to (생각을 집중하다)’라는 뜻도 있고, ‘to think deliber-ately (의도적으로 생각하다)’ 이런 뜻도 있습니다.
또 비슷한 말입니다만, “예수님만 바라보자”라는 말은 “예수님에게 우리의 희망을 두자” 혹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자” 이런 뜻이 있습니다. 저는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정말 이 히브리서 저자만큼 예수님을 생각했던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그에게는 예수님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에게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탁월성을 증명하는 것을, 특별히 자기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탁월성을 증명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강해하면서 한 절 한 절 꼼꼼하게 설명을 한다고 했지만, 뒤에 다시 그 말씀을 읽어보면 “아, 이 말씀을 더 강조 했어야 했는데....... 이런 말씀들이 참 많았습니다. 히브리서 8:6이 그런 말씀입니다. “But now Jesus, our High Priest, has been given a ministry that is far superior to the old priesthood, for he is the one who mediates for us a far better covenant with God, based on better promises (하지만, 지금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예전 유대교의 제사장들보다 훨씬 더 위대한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보다 좋은 약속에 기초한 훨씬 더 좋은 새언약을 위한 우리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가 그렇게 예수님께 대한 열정을 가지고 쓴 편지 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왜 그가 그렇게 목소리를 높여서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자고 했는지, 왜 그가 그렇게 예수님을 심각하게 생각하자고 했는지, 우리는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그의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예수님께 우리 생각을 집중하면 예수님이 보입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모든 부끄러움을 참으신 예수님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2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He endured the cross, disregarding its shame (그는 십자가의 수치를 상관하지 않고 참으셨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두 강도가 같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도 두 강도와 같은 부류로 취급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강도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 말 성경에는 강도라고 나와 있으니까 사회적으로 용서 받을 수 없는 나쁜 짓을 한 것 같습니다. ‘robbers’이면 남의 것을 훔친 사람들이고, ‘revolutionaries’이면 혁명가들입니다. 로마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폭력과 살인을 일삼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그 사람들과 동급으로 취급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한번도 남의 것을 훔친 적이 없고, 한번도 폭력을 사용한 적이 없는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야 했습니까? 그것도 ‘Via Dolorosa’라는 골고다로 올라가는 언덕을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야 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23)”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을까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것처럼 수치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이 희랍어 원문에는 ‘a stumbling block’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 말로 ‘걸림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라고? 그 사람이 누군데? 뭐,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더 이상 나에게 그 사람 이야기 하지 마!” 이런 말입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그만큼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는 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왜 그런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부분이 우리에게는 mystery입니다.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God’s mystery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1, 2:7, 에베소서 1:9, 골로새서 1:27). 이 하나님의 비밀이 구약 시대에는 감추어져 있었다가 신약시대에 와서 풀렸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비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God has now revealed to us his mysterious plan regarding Christ, a plan to fulfill his own good pleasure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그리스도와 관련된 비밀스러운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계획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시기 위한 계획입니다).” (에베소서 1:9)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 계획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시는 수치와 모욕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수치와 모욕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하는 수치와 모욕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치가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성경의 메시지를 들을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유명한 찬송가 작가인 영국의 아이작 와츠 (Isaac Watts, 1674-1748) 평생 수많은 찬송시를 썼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찬송가 149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도 아이작 와츠가 가사를 쓴 찬송입니다. 그는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할 때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라고 썼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묵상하면 세상에 대한 욕심, 명예, 돈, 권력, 이런 것이 다 쓸 데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묵상하면 나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 (inspiration)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가사를 쓸 수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자랑도, 우리가 추구하는 명예도,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욕심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 십자가의 주님을 제대로 발견한 사람이라면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치를 모두 감당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된 일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치를 당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이런 메시지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너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겠느냐?”
잘 살아야 합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만을 위한 selfish한 삶이 아니라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더 행복해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십자가에서 들려 오는 메시지입니다.
이 말씀을 한 번 들어 보세요. “To leave the world a bit better, whether by a healthy child, a garden patch, or a redeemed social condition; to know that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have lived - that is to have succeeded.”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에머슨은 보스턴 콩코드 (Con-cord) 출신입니다. 미국이 낳은 최고의 철학자입니다. 미국의 지성사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입니다. 모든 철학자들이 그렇듯이 에머슨도 “무엇이 행복이냐? 무엇이 성공이냐? 무엇이 잘 사는 것이냐?” 하는 질문에 답했습니다. “성공적인 삶이란 (that is to have succeeded), 세상을 조금이라고 더 좋은 세상으로 남겨 주는 것입니다. 아기를 건강하게 잘 키운다든지, 정원을 아름답게 가꾼다든지, 사회 환경을 좀 더 좋은 환경으로 만든다든지, 당신이 세상을 살았기 때문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좀 더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성공적인 삶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좀 나이가 드신 교우들은 그 나름대로 지금의 삶을,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길을 찾는 사람에게는 그 길이 보입니다. 그러나, 찾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사는 것이지요. 젊은 청년들은 지금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십시오. 삶의 목적을 먼저 정하고, 그렇게 살기 위한 계획을 세우십시오. 지난 주에 한국 뉴스를 보다가 김종필씨가 뉴스에 나왔습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 보였습니다. 이번에 ‘증언록’을 내면서 자기 소감을 말하는 자리였습니다. “이제 저는 모두 용서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저의 부덕의 소치로 본의 아니게 상처를 드린 일이 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의 소감을 들은 한 컬럼니스트가 “변혁에서 시작해서 혁명을 거쳐, 모호함으로 끝을 맺다”라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그렇게 정보부장을 지내고, 큰 권력을 손에 쥐었던 사람이 결국 모호함으로 인생을 마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 하는 얘깁니다. 그 컬럼니스트는 자기 글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의 야망과 처신을 위해 희생된 많은 사람들에 대한 사죄의 표현으로는 좀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되면 안 되잖아요? 많은 사람이 그의 야망 때문에 희생을 당하고, 이에 대한 사죄도 뭔가 미흡하고, 이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분명하지 않고 모호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안 되잖아요?
둘째로,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아이작 와츠는 이렇게 찬송시를 썼습니다. “못 박힌 손발 보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우리의 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했습니다. “우리의 죄가 어떻게 양과 염소의 희생제물로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면 우리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9:14) 우리의 죄가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아무 것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희생제물이 되어 대속물 (ransom)이 되지 않으면 용서 받을 수 없는, 우리가 그런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부어졌다고 했습니다 (God has poured out his love into our hearts., 로마서 5:5).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4:11)”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십자가에서 흘러나와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메시지를 들어야 비로소 십자가의 메시지를 제대로 들은 것입니다.
잘 살아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성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 될 수 있습니다. 겉에서 보기에 아무리 화려하다고 성공적으로 보일지라도 나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애매모호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삶의 목적이 선해야 하고, 나의 삶의 방식이 정당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상처 받고, 나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통로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보혈에 흠뻑 우리 자신을 적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보혈의 공로를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나머지 사순절 기간 동안 여러분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하십시오. 예수님을 심각하게 생각하십시오. 생각이 잘 안 되면 ‘의도적으로 (intentionally)’ ‘일부러 (deliberately)’라도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