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2016 | 조국의 위기적인 상황을 보면서
너희는 나의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 (Are You Able to Drink My Cup of Suffering?)
김태환 목사
마가복음 10:35-45
35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기 원합니다.”
36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
37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저희가 주의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선생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허락해 주십시오.”
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리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예,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40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자리들은 정해 놓은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41 이 말을 듣고,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4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것처럼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44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35 Then James and John, the sons of Zebedee, came over and spoke to him. "Teacher," they said, "we want you to do us a favor."
36 "What is your request?" he asked.
37 They replied, "When you sit on your glorious throne, we want to sit in places of honor next to you, one on your right and the other on your left."
38 But Jesus said to them, "You don't know what you are asking! Are you able to drink from the bitter cup of suffering I am about to drink? Are you able to be baptized with the baptism of suffering I must be baptized with?"
39 "Oh yes," they replied, "we are able!" Then Jesus told them, "You will indeed drink from my bitter cup and be baptized with my baptism of suffering.
40 But I have no right to say who will sit on my right or my left. God has prepared those places for the ones he has chosen."
41 When the ten other disciples heard what James and John had asked, they were indignant.
42 So Jesus called them together and said, "You know that the rulers in this world lord it over their people, and officials flaunt their authority over those under them.
43 But among you it will be different. Whoever wants to be a leader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44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among you must be the slave of everyone else.
45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지난 주일 설교에서 국정을 농단(壟斷)하는 사람들 중에 크리스천들은 없을까 하는 부끄럽고 불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는데, 최순실, 최순득 자매가 2012-2013,년 2년 동안 한국의 어느 교회의 서리 집사였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름만 올려 놓은 집사였지, 교회 일에 적극적로 참여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 교회는 작은 개척교회였는데, 그 교회 담임 목사의 말에 의하면, 그 때는 한 사람이 귀했기 때문에 서리 집사 직책을 주면 좀 더 열심히 나오지 않을까 해서 서리 집사로 임명했다고 합니다. 두 자매는 평범한 중년 여성으로 보여 그 자신도 이 두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두 자매는 예배 시간에 늦는 경우가 많았고, 예배가 끝나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교인들 간에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없었고, 그저 안내위원들과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의 말은 “그 두 사람이 우리 교회를 찾아오고 설교를 들어준 것은 고마운데, 이런 일이 있고 보니 미리 알았더라면 신앙적으로 지도를 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개척교회를 했었기 때문에 그 교회 담임 목사에게 돌을 던질 생각은 없습니다. 그 목사의 말처럼 개척교회는 한 사람이 귀합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저는 서울의 신월동이라는 가난한 동네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결혼하자마자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정말 그 목사의 말처럼 한 사람이 새로 나오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이런 개척교회의 목회자들의 마음을 잘 알고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목회하던 동네는 버스 종점이었는데, 한번은 한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는 버스 운전 기사라고 했습니다. 충청도 어디에서 살다가 아이들 교육 때문에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나가던 교회 목사로부터 받아 온 추천서를 보여줬습니다. 자기가 이곳에 와 보니 크리스천 안내양들 20여명이 나갈 교회를 결정하지 못하고, 나름대로 십일조 헌금을 모아 놓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다음 주에는 이 안내양들을 데리고 저의 교회로 나오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순간적으로 “야, 이런 날이 오는구나. 안내양들 20명이 한꺼번에 교회에 나오면 성가대로 만들 수 있고, 주일학교에서 가르칠 수도 있겠구나. 이 안내양들이 십일조 헌금도 모아가지고 있다는데, 교회 재정도 잘 돌아가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어리석었던 과거 이야기를 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사람은 개척교회 목회자들의 약점을 알고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돈을 뜯는 전문 사기꾼이었습니다. 저도 많은 돈은 아니지만, 돈을 좀 뜯겼습니다.
저는 최순실 씨가 교회의 집사였다는 언론의 보도를 보면서 크리스천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크리스천의 책임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너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 (로마서 13:12, 14)”고 했는데, “왜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왜 우리는 성경에서 배운대로 살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이 시점에서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아파트 건축 붐이 일어난 것은 1970년대부터 입니다. 서울이 강남으로 확장되면서 논밭이던 곳이 속속 아파트 단지로 조성되었습니다. 재래식 집에 살던 사람들은 강남에 들어서는 고급 아파트들을 보면서 우리도 저런 집에서 잘 살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 때 교회 목사들을 유혹한 것이 소위 ‘번영신학 (Prosperity Gospel)’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번영신학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성공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번영신학’을 가지고 설교하는 목사들의 메시지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습니다. 그런 교회로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그래서 강남에 대형교회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습니다. 교회마다 목사들은 로버트 슐러 (Robert Schuller, 1926-2015) 목사의 ‘적극적인 사고 방식 (positive thingking)’을 흉내내기에 바빴습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번영신학’은 정통신학이 아닙니다. 정통신학에서 변질된 신학입니다. 성경의 내용과도 배치(排置)되고, 무엇보다도 번역신학을 가지고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번영신학을 설교하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성경 이야기가 별로 없고, 모두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번영신학’이 그렇게 오랫동안 한국교회를 지배했던 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성공에 대한 야망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슐러의 설교나, 그런 설교를 흉내내는 설교들을 들어 보면 모두 인간의 마음에 들어 있는 성공에 대한 야망을 교묘하게 부추깁니다. 그 설교를 들을 때는 마치 나도 대기업의 회장이 된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오늘 마가복음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 두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저희들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그래?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묻습니다. 두 사람은 “주님이 다스리실 나라에서 우리 두 사람이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주님께 부탁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 두 사람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그런 부탁을 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0:21).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두 사람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습니다.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의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價値)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는 이 세상의 가치와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 백년을 믿어도 이런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모두 허사가 되고 맙니다. 교회는 꼬박꼬박 나오고, 성경을 배우고,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내려 놓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보세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들은 지나갔고, 보십시오, 새 것들이 와 있습니다 (Anyone who belongs to Christ has become a new person. The old life is gone; a new life has begun).” (고린도후서 5:17) ‘이전 것들’ ‘the old life’는 예수 믿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세상의 가치관을 말합니다. ‘새 것들’ ‘a new life’는 예수를 믿고 난 후에 나에게 생긴 새로운 가치관을 말합니다. 이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새로운 피조물 (a new person)’이 아닙니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이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고,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빌립보서 3:7) 누구의 말입니까? 바울의 말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고백한 말입니다.
요한과 야고보 이 두 사람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배웠는데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면서도 여전히 성공에 대한 야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안타깝지만, 아직 이런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모두 ‘맛을 잃어버린 소금 (마태복음 5:13)’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밖에 버려져서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수치를 당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리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8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ou don't know what you are asking! Are you able to drink from the bitter cup of suffering I am about to drink? Are you able to be baptized with the bap-tism of suffering I must be baptized with?"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는 말은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자기들을 앉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이 두 사람이 그런 요청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을 수 있는지 그 길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 보세요. “내가 ‘고난의 쓴 잔’을 마시려고 하는데, 너희 두 사람은 나와 함께 이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예수님은 지금 두 제자에게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을 수 있는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고난의 쓴 잔 (the bitter cup of suffering)’이 십자가를 말하는 것은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쓴 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인 줄 알고 이 잔을 마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빌립보서 2:9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최고로 높은 자리 (the highest place)’에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주어진 ‘최고로 높은 자리’가 곧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34).
제가 기회 있는대로 본 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저는 신학교 시절에도 그의 대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이번에 도서부에서 책을 구입하는데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본 회퍼의 책 3권을 추천했습니다. 요즘에 부쩍 본 회퍼에 대한 관심이 더 생깁니다. 그 이유는 본 회퍼가 이미 70년 전에 살았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책임 있게 살아야 하는 오늘의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많은 영감(靈感, inspiration)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가슴이 철렁했던 구절이 있습니다. “When Christ calls a man, he bids him come and die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을 부르실 때, 그는 그에게 와서 죽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것은 나와 함께 죽자고,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지자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지 않습니까? 그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Being a Christian is less about cautiously avoiding sin than about courageously and actively doing God’s will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조심해서 죄를 피하는 것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용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 대한 것을 말한다).”
우리 한국교회가 교회의 부흥에 목적을 두고 ‘번영신학’을 설교하면서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야망을 부추기는 대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책임 있는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설교하고, 십자가를 통한 영광의 삶을 설교했더라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크리스천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이유와 목적을 알고,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책임 있는 사람들로 살았더라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성경을 배운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내려 놓고, 성경이 보여 주는 가치들을 따라 살았더라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조국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우리 자신들을 돌아 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제 2, 제 3 최순실이 계속 나올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이름을 가지고 국정을 농단하면서도 죄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계속 나올 것입니다. 목사들은 정신 차려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알고 설교하고 있는지 자신을 통렬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이니, ‘삼박자 구원’이니 하면서 ‘번영신학’에 매달렸던 과거를 회개해야 합니다. 복음을 제대로 설교하지 않았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자기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 성공에 대한 야망, 권력에 대한 야망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살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는 영광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서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선명(鮮明)하게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아는 것처럼 세상의 통치자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정치인들도 사람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42-4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