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8/2016 | 대강절 메시지 2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Because He First Loved Us)
김태환 목사
요한일서 4:11-19
11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 역시 서로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12 어느 누구도 여태까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완전해질 것입니다.
13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의 성령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4 우리는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그것을 증언합니다.
15 만약 누구든지 “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요”라고 얘기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거하시고, 그는 하나님 안에 살게 됩니다.
16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그 사랑을 알 수 있고, 그 사랑을 굳게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이며,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17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전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날에 아무 두려움 없이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두려움도 있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18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9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11 Dear friends, since God loved us that much, we surely ought to love each other.
12 No one has ever seen God. But if we love each other, God lives in us, and his love is brought to full expression in us.
13 And God has given us his Spirit as proof that we live in him and he in us.
14 Furthermore, we have seen with our own eyes and now testify that the Father sent his Son to be the Savior of the world.
15 All who confess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have God living in them, and they live in God.
16 We know how much God loves us, and we have put our trust in his love. God is love, and all who live in love live in God, and God lives in them.
17 And as we live in God, our love grows more perfect. So we will not be afraid on the day of judgment, but we can face him with confidence because we live like Jesus here in this world.
18 Such love has no fear, because perfect love expels all fear. If we are afraid, it is for fear of punishment, and this shows that we have not fully experienced his perfect love.
19 We love each other① because he loved us first. / ①Greek We love. Other manuscripts read We love God; still others read We love him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 역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 주셨으며, 그를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9절). 우리는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그것을 증언합니다 (14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19절).”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사랑의 위대한 서사시(敍事詩, epic)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위대한 인물이나 사건을 기리는 비교적 긴 시를 서사시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사사시 가운데 기원 전 8세기 경에 만들어진 호머 (Homer)의 일리아드 (Iliad), 오딧세이 (Odyssey) 같은 작품들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서사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머의 서사시는 그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논쟁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요한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서사시는 ‘역사적인 사실 (historical fact)’에 근거한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고 합니다. 요한일서, 이서, 삼서는 그가 남긴 세 통의 편지입니다. 그는 이 편지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쓰려고 합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계셨으며, 우리는 그분에 대해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바 되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말씀에 관하여 쓰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보았으며, 또한 그분에 관한 증거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1:1-2)
자기가 경험한 것만큼 확실할 것이 없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본 것이라면 그것은 사실 (fact)입니다. 요한은 자기 앞에 나타난 그분을 이렇게 확실한 말로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을 그분과의 교제 (fellowship)로 초대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말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우리와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이 교제는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지는 교제입니다.” (요한일서 1:3)
후세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 요한을 가리켜 ‘사랑의 사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처음부터 ‘사랑의 사도’는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의 별명은 ‘보아너게 (Boanerges)’였습니다 (마가복음 3:17). 그 뜻은 ‘Sons of Thunder (천둥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요한에게 야고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두 형제가 똑 같았습니다. 그래서 ‘Sons of Thunder’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형제는 성격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고, 편협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두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새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경험한 이 변화를 다른 사람들도 함께 경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세 통의 편지를 써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교제 (fellowship with the Father and with his Son, Jesus Christ)에 초대했습니다.
오늘은 대강절 넷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촛불 네 개를 켭니다. 오늘 켜는 보라색 촛불은 ‘사랑의 촛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깜깜하던 세상에 사랑의 빛이 비쳤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빛이 비쳤기에 인류는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의 본질을 알려주는 진실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 무엇이 참된 사랑이고, 무엇이 거짓된 사랑인지 금방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보세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야 말로 진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10)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is is real love -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 sacrifice to take away our sins.”
요한이 말하는 참 사랑은 희생이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립 서비스로 “I love you”를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랑에는 희생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에는 희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요?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 sacrifice to take away our sins”라고 말하잖아요?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심으로 증명하셨습니다. 그것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sacrifice’ 희생제물로 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거짓된 사랑으로 우리 자신들을 속이는지 모릅니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 다가 가서 “하나님께서 형제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도할께요. 여기서 이렇게 있지 말고 어디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세요. 아유, 며칠 째 아무 것도 안 드셨는가 봐요? 끼니 거르지 마시고 꼬박꼬박 챙겨 드세요 (야고보 2:16)”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난 그래도 인정이 많아! 난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이렇게 아픈 걸!”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이 대단한 휴머니스트나 되는 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뭔가 그 사람에게 자기 것을 내 주고, 뭔가 자기 것을 희생할 때, 그 사랑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이 아들이 어떤 아들입니까? 성경에는 ‘독생자 (only begotten son)’라고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우리 말로 하면 ‘독자(獨子)’입니다. 이 아들을 우리를 죄를 용서하기 위해 희생 제물로 주신 것입니다.
제주도에 사는 김제박/이선경 부부가 있습니다. 이 부부에게 유나라는 딸이 있었는데, 2014년에 미국애리조나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딸이 그만 교통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올해 1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딸의 사고 소식을 듣고 미국으로 달려 갔는데, 딸은 의식 불명인 채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며칠 밤을 새웠지만, 딸이 깨어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딸의 손을 잡고 있는 어머니에게 불현듯 예전에 어디서 읽었던 기사가 생각났습니다. 병원에서 뇌사 판정을 받은 17세 소녀의 부모가 딸의 장기를 기증해서 여러 사람에게 새생명을 주었다는 기사였습니다. 정말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며칠 밤을 새웠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먼저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여보, 우리 유나 장기를 기증하면 어떨까?” 남편의 말에 아내는 선뜻 동의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딸 유나의 심장과 각막 등 장기가 27명에게 이식(移植) 되었습니다.
이렇게 딸을 보냈는데, 지난 달 11월 16일에 이 부부는 미국에 사는 어떤 여성으로부터 뜻밖의 편지를 한 통 받습니다. “귀한 따님의 심장 덕분에 9년 동안의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이 끝났습니다. 만나 본적도 없는 저의 생명을 구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이 여성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사는 외과 의사인데, 선천성 심장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다가 심장 이식 수술을 받고 새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 여성의 편지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제 동생 역시 저와 같은 병을 앓았지만, 심장 이식을 받지 못해서 3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생은 이 세상에 없지만, 제 기억 속에 살아 있기 때문에 따님 유나는 저와 제 동생 두 생명을 살린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앞으로 저는 외과 의사로서 더 많은 환자를 살리는 삶을 살겠습니다.” 전 이 기사를 읽으면서 “유나의 이야기가 바로 예수님의 이야기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라고 합니다. “He first loved us”라고 했습니다. ‘먼저 (first)’라는 말이 눈에 확 들어 옵니다. 저는 이 말씀 역시 진실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먼저’해야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인사도 먼저 해야 하고, 용서도 먼저 해야 하고, 화해의 손도 먼저 내밀어야 하고, 사랑도 먼저 해야 합니다.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맞는 줄 알면서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자존심(自尊心)이 우리를 가로 막습니다. “내가 왜 먼저 말을 해야 해? 걔가 먼저 나에게 말을 해 야지!” “내가 왜 용서를 해야하지? 그 사람이 먼저 용서를 빌어야지!” 이것이 우리들의 수준입니다. 어떤 때는 기껏 내가 먼저 손을 내 밀어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번번히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수준입니다.
여러분, 유명한 로마서 5:8 말씀을 아시지요?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NIV)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는 ‘still’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 말로 ‘여전히’ 또는 ‘아직’이라고 번역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우리는 계속해서, 지금도 죄인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 된 우리의 운명이었고, 이것이 죄인 된 우리의 연약함 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죄인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로마서 5:8 말씀은 이렇게 이어져야 합니다. “until God first demonstrates his love for us (하나님께서 먼저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전에는).”
여러분, 주변에 감동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습니까? 어떤 이야기입니까?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먼저 찾아가서 사랑을 보여 준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마더 테레사 (Mother Teresa, 1910-1997)의 삶이 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까? 그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출생한 알바니아 사람입니다. 테레사는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인도의 빈민들을 먼저 찾아가서 사랑을 베풀고, 19살의 나이로 인도에 가서 68년 동안 그들을 위해서 자기 인생을 모두 드립니다. 테레사 수녀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합니다. 그는 수상 소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헐벗고, 집이 없으며, 질병에 걸려서,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고 외면 받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상금을 받아 들고 “이 돈으로 몇 개의 빵을 살 수 있을까?” 하고 혼잣말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마치면서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And as we live in God, our love grows more perfect. So we will not be afraid on the day of judgment, but we can face him with confi-dence because we live like Jesus here in this world.”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 때, 우리의 사랑은 보다 완전하게 자라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심판의 날에도 두렵지 않게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현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그렇게 나와 있어도 실제로는 그 말씀대로 살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주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도 그렇게 말하잖아요? “because we live like Jesus here in this world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 같이 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같이 살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습니다. 살 수 없다는 사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요한은 이렇게 그의 사랑의 이야기를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진실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행동으로 이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요한일서 3:18) 여기서 요한이 말하는 진실한 사랑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도 똑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특권을 우리를 위해 모두 내려 놓고 ‘humble position (빌립보서 2:7)’을 취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소외된 사람들을 먼저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셨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찾아 가서 섬기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는 다른 마을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전하여야 한다. 내가 이 목적으로 보내심을 받았다.” (누가복음 4:42)
이제는 우리가 이런 사랑을 해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으로부터,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행동으로 우리의 진실한 사랑을 세상으로 흘려 보낼 수 있습니다. 2,000년 전에, 깜깜한 인류의 역사에 사랑의 빛이 비쳤던 것같이, 이제는 우리들의 진실한 사랑으로 이 암담한 세상을 밝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