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017 | 새해는 이렇게 산다 1
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김태환 목사
고린도후서 5:1-10
1 우리는 우리가 거하는 땅에 있는 천막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입니다.
2 우리는 이 천막집에 살면서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을 덧입게 될 것을 고대하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3 우리가 그것을 덧입게 되면 벌거벗은 몸으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4 우리는 이 천막집에서 사는 동안,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 삼킴당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이 천막집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하늘의 집을 덧입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5 이것을 우리에게 마련하시고 우리에게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6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7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8 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살기를 더 원합니다.
9 그러므로 우리가 몸을 입고 있든지 몸을 벗어 버리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10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각 사람은 몸을 입고 사는 동안, 행한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이나 자기가 행한 행위대로 거기에 알맞는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1 Now we know that if the earthly tent we live in is destroyed, we have a building from God, an eternal house in heaven, not built by human hands.
2 Meanwhile we groan, longing to be clothed with our heavenly dwelling,
3 because when we are clothed, we will not be found naked.
4 For while we are in this tent, we groan and are burdened, because we do not wish to be unclothed but to be clothed with our heavenly dwelling, so that what is mortal may be swallowed up by life.
5 Now it is God who has made us for this very purpose and has given us the Spirit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6 Therefore we are always confident and know that as long as we are at home in the body we are away from the Lord.
7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8 We are confident, I say, and would prefer to be away from the body and at home with the Lord.
9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 or away from it.
10 For we must all appear before the judgment seat of Christ, that each one may receive what is due him for the things done while in the body, whether good or bad.
2017년 새해가 되었습니다. 새해를 맞아 교우 여러분은 어떤 생각으로 한 해를 시작하기를 원하십니까? 중국의 어떤 왕은 세수 대야에 ‘일신일신우일신(日新日新又日新)’이라는 글을 새겨 놓고, 세수할 때마다 오늘도 새로워 지자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합니다.
담임 목사로서 새해를 맞는 교우 여러분들에게 권면하고 싶은 것은, 새해에는 늘 하던 대로가 아니라, 믿음생활의 핵심을 붙잡는 믿음생활을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형식적으로 드리지 말고 진심으로 예배를 드리고, 찬송 하나를 불러도 습관적으로 부르지 말고 가사의 뜻을 생각하면서 찬송을 부르고, 성경 말씀을 읽어도 생각 없이 읽지 말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삶을 살아가고, 기도를 해도 형식적인 말을 늘어 놓지 말고, 기도의 말 하나 하나에 우리의 진심을 담아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그런 믿음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존 번연 (John Buyan, 1628-1688)이 쓴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 이라는 소설을 읽어 보셨습니까? 지금으로부터 300여전 전에 나온 책이니까 지금 우리 시대와는 전혀 다른 청교도 혁명이라는 시대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라고 하니까 그만큼 크리스천의 삶에 끼친 영향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의 주체 세력이었던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 1599-1658)이 밀려나면서 청교도들에게 설교가 금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열렬한 청교도 신자였던 존 번연은, 계속해서 설교하다가 체포되어 12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됩니다. 존 번연은 감옥생활 중에도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하던 중에 ‘천로 역정’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책의 내용을 조금 소개 드린다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 책을 읽고 있다가 “아,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면서 크게 절망합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은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에게 실망한 ‘크리스천’은 등에 무거운 짐을 진 채 홀로 벌판을 거닐면서, 어제 읽고 있던 책을 계속 읽습니다. 그의 얼굴은 어제보다 더 큰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었습니다. 그 때 맞은 편에서 어떤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도자’였습니다. ‘전도자’가 말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 당신은 매우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크리스천’이 대답합니다. "저는 장차 무서운 심판이 있게 되리라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알았습니다. 이 책에 씌어 있는 대로 어서 피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 등에 매달려 있는 이 무거운 짐때문에 걱정입니다. 전 이 짐을 없애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에 '전도자'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왜 이곳에서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습니까?" "그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멸망을 피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전도자'가 멀리 보이는 넓은 벌판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저 쪽에 있는 좁은 문이 보입니까?" "어디요? 아니, 보이지 않는데요?" "그럼 저 찬란한 빛은 보이십니까?" '크리스천’이 대답합니다. "예, 보입니다. 아주 밝은 빛이 보입니다." '전도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빛이 보이는 쪽으로 계속 걸어가세요. 그 빛에 가까이 가면 작은 문이 보일 것입니다. 그 문을 두드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줄 것입니다."
저는 ‘천로역정’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어쩌면 그 책에 나오는 방황하는 ‘크리스천’의 모습이 오늘날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크리스천들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찬란한 빛이 있는 쪽으로 계속 걸어가라!”는 ‘전도자’의 말은, 적어도 저에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어디에 길이 있는지 혼란스런 때일수록 우리는 성경을 읽고, 성경이 가리키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 적어도 저에게는 이런 말씀으로 들립니다. 성경은 어두운 시대를 밝혀 주는 등불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 우리는 깜깜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고, 방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7절) NIV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저는 이 말씀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말씀이며, 동시에 이 말씀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속에 들어 있는 특별함이 어떤 것인지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스스로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가치들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은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크리스천의 삶의 가치를 포기하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저는 새해 첫 주일을 맞아 눈에 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는 이 성경 말씀의 의미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크리스천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중요성을 알고 그것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들을 얻으려고 애썼던 물질적인 것들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소유하는 것을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아직도 국정을 농단한 사람들에 대한 국정조사가 진행되고 있고, 특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국정을 농단한 사람들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이유를 알고 보면 결국 돈 때문이었습니다. 돈에 가치를 두고 있는 사람은 돈이 많이 소유할수록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하여 더 많은 돈을 소유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 진실, 섬김, 헌신, 희생, 천국, 하나님, 이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으니까, 또 귀로 들을 수 없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없으니까 이런 것들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를 확신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像)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證據)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1).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믿음은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을 확신하는 것이고,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런 것들을 추구해서 정말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 9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몸을 입고 있든지, 몸을 벗어 버리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9절)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 or away from it.” 살든지, 죽든지,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오늘 말씀을 전체적으로 읽어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추구하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두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따라 살았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들 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7-8)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그가 추구했던 것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이 발견했습니다.
둘째로,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각 사람은 몸을 입고 사는 동안, 행한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이나 자기가 행한 행위대로 거기에 알맞는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10절)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산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위선적(僞善的)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위선자를 영어로 ‘hypocrites’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원은 ‘stage actor (무대 위의 배우)’라는 뜻입니다. 자기는 각본에 나와 있는 대로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지만, 착한 사람처럼 연기를 해야 합니다. 자기는 슬프지 않지만 슬픈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는 연기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이렇게 위선적인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구하기 보다는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죄의 길을 따르지 않고 의의 길을 따릅니다. 다윗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끝까지 진실한 길을 걸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어떤 대가도 기꺼이 지불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확신하면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비록 그 길이 아무도 가지 않는 좁고 외로운 길이라고 할지라도 그 길을 기꺼이 선택합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이 눈으로 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하는 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청년의 나이에 어떻게 이렇게 돈을 많이 모를 수 있었는지 그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른 성경에 의하면, 이 청년은 그 나이에 이미 사회의 지도자였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18:18).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만일 네가 완전해지길 원한다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와서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9:21) 하지만, 이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청년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은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제시했던 “나를 따르라!”는 삶의 방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추구하는 새로운 방식이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왔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갈릴리 어부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어부들 역시 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어부들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어부들에게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나를 따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태복음 4:19) 이 말씀을 들은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결단을 미루어왔습니다. 여러 번 우리에게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단을 미룬 채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이젠 대답을 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수는 많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는 이 때에, 우리는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 없습니다. 결단을 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가장 큰 이유는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정말 나는 이렇게 살아서 행복할까? 만족할까?” 하는 질문이 계속 생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제가 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We are surrounded by such a great cloud of witnesses).” 이 ‘구름 떼’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눈에 보는 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살기로 결단했던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닙니다.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