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30-34, 6:38-40

30 그러자 사람들이 마을에서 나와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31 그 사이 제자들은 예수님께 “선생님, 음식을 좀 드시지요”라고 청했습니다.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에게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음식이 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33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누가 예수님께 먹을 것을 갖다 드렸을까?”라고 말했습니다.
34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4:30-34)
38 나는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다. 나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그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40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영생을 얻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마지막 날에 부활시킬 것이다.”(6:38-40)

30 So the people came streaming from the village to see him.
31 Meanwhile, the disciples were urging Jesus, "Rabbi, eat something."
32 But Jesus replied, "I have a kind of food you know nothing about."
33 "Did someone bring him food while we were gone?" the disciples asked each other.
34 Then Jesus explained: "My nourishment comes from doing the will of God, who sent me, and from finishing his work. (John 4:30-34)
38 For I have come down from heaven to do the will of God who sent me, not to do my own will.
39 And this is the will of God, that I should not lose even one of all those he has given me, but that I should raise them up at the last day.
40 For it is my Father's will that all who see his Son and believe in him should have eternal life. I will raise them up at the last day." (John 6:38-40)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일상생활은 매우 분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의 하루 일과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 (5-6시경)에 갈릴리 바닷가로 가심, 거기서 그물을 깁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네 사람을 제자로 삼음, 오전 10시 경에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으로 가셔서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가르치심.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하나를 고치심. 오후 2시경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있는 시몬의 집으로 가셔서 열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치심.  오후 5시경 병 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와 온 동네가 예수님께 나온 것 같았음.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심. (예수님은 그날 저녁 11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드심) 새벽 4시경 자리에서 일어나신 예수님은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심. 아침 6시경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른 마을로 가심.

예수님의 이런 일과는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30-33살) 기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바쁜 일과를 모두 소화하셨을까?” “이렇게 많은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주어졌을까?”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영성 (spirituality)은 어떤 영성이었을까?” 이런 흥미 있는 질문들입니다.

오늘 저의 설교는 예수님의 영성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요즘 ‘영성(靈性)’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영성’이란 말은 예수님의 ‘영적인 성품’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spirituality’라고 합니다. 이 말은 ‘spiritual’이라는 말에 ‘-ity’라는 접미사가 붙었습니다. 그러므로, ‘spirituality’라고 하면, 그 사람의 영적인 성품의 수준, 영적인 성품의 질이라고 할까요?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 생각, 삶 전체에 미치는 영적인 성품의 정도를 말한다고 보면 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저 사람의 영성이 그 정도인 것을 알겠다!” “이 사람이 이렇게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의 영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겠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영성’이라는 것은 성령께서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지배할 때, 그 사람의 ‘영성’이 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성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영성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example (모범)’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영성을 계발하셨구나!” “예수님의 영성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이런 것이구나!” “예수님의 영성을 이렇게 내 삶에 적용할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영성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영성’에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영성’은 예수님의 가정을 통해서 성장했고, 꽃을 피웠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가정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남자 아이를 낳으면 8일만에 할례를 행하고, 그 아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요셉은 비둘기 두 마리를 드렸습니다 (누가복음 2:24).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린양을 드렸을 텐데, 요셉은 가난했기 때문에 비둘기 두 마리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비록 요셉과 마리아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지만, 이 부부는 매우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셉은 다윗의 가문에 속한 ‘의로운 사람 (a righteous man, 마태복음 1:19)’이었습니다. 요즘 많이 쓰는 말로 하면 ‘a man of integrity’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 역시 레위 가문의 품행이 바르고, 매우 순종적인 여자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전형적인 유대인 가정으로, 유대교의 율법을 충실하게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열 두 살이 되었을 때, 부모는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 때는 마침 유월절이라는 큰 명절이었습니다. 성경에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수님의 부모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열 두 살이 되었을 때에도 유월절 관습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누가복음 2:41-42)”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가 유대교의 관습을 충실하게 지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살 때라고 한 것을 강조한 것을 보면 아마도 ‘바 미쯔바 (Bar mitzvah)’라는 일종의 성인식을 받게 했던 것 같습니다. ‘바 미쯔바’는 보통 13살에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12살에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제 이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토라 (Torah)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유대인의 전통을 지키면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축하해 주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지고 있는 ‘innate spirituality (본래부터 타고난 영성)’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영성은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을 통해서 꽃을 피웠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영성’에 있어서 가정의 역할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무엘의 ‘영성’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기도의 어머니 한나에게서 온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디모데의 ‘영성’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물론 그의 멘토였던 바울을 만나면서부터 ‘영성’이 급성장한 것이 사실이지만, 성경을 잘 읽어 보면 디모데에게도 ‘innate spirituality’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의 타고난 ‘영성’은 경건한 어머니 유니게 (Eunice)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5).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까? 공부 잘 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돈 많이 버는 사람인가요? 많은 부모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자라기를 원하는 부모들이 있습니까? 크리스천 부모라면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영성’이 뛰어난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가정이 신앙적으로 바른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성경 해석은 틀에 박힌 해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멋대로 성경을 해석한 것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창의적인 해석 (creative interpretation)’이라고 할까요? 그 결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특별했습니다. “이것은 권위가 있는 새로운 교훈이다.” (마가복음 1:27)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그것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4:32, 마태복음 7:29)

예수님 당시에 모든 사람들은 ‘안식일 법’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규정에 얽매여 철저하게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최고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27).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받았을 충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은 지동설(heliocentrism)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 (Copernican Revolution)'과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어떻게 율법에 대한 이런 해석이 가능했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 안절부절 하고 있을 때, 어떻게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해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예수님께서 이런 해석을 할 수 있었었던 것은,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다는 성경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어기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안식일 법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안식일이라도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 6:9). 이것이 예수님의 성경 해석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하고 생각해 질문하는 것이 그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영성’은 구체적인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말씀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영성이 드러났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본문 말씀에 “나의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4:30-34)”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 (the will of God)’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Mission Impossible (불가능한 사명)’이었습니다.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말씀에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버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8절) 그러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길래 자기 목숨까지 바쳐서 수행해야 하는 것이었습니까? 요한복음 말씀을 계속해서 읽어 보면 그 ‘하나님의 뜻’이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영생을 얻는 것 (요한복음 6:40)”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드린 것입니다.

‘영성’ ‘spirituality’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그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흘러나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성’이 깊은 사람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그것이 느껴집니다. 반대로, ‘영성’이 얕은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한가지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해석 능력이 탁월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판에 박히지 않고, 틀에 얽매이지 말씀을 전하셨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사람을 구원하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기도생활을 통해서도 잘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교제(交際, fellowship)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에 전념하셨던 이유와 목적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사람을 구원하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7)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기도만 한다는 사람도 봤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영성’은 어떤 것입니까? 그 사람들의 ‘영성’이 말과 행동으로, 그들의 삶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 있는 그의 ‘영성’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의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y nourishment comes from doing the will of God, who sent me, and from finishing his work.”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 ‘my nourishment’라고 했으니까요. ‘nourishment’는 음식도 될 수 있고, 나에게 힘을 공급(供給)해 주는 어떤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생명을 유지 시켜 주는 어떤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그 뜻을 완수하는 것이 나에게는 음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삶의 에너지를 공급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영성’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이런 ‘영성’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사야 58:6-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바라는 금식은 너희가 부당하게 가두어 놓은 사람을 풀어 주고, 그들의 사슬을 끊어 주며, 억눌림 당하는 사람들을 풀어 주고, 그들이 하는 고된 일을 쉽게 해 주는 것이다. 너희 음식을 굶주린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하고 집 없는 사람을 너희 집에 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보면 그에게 너희 옷을 주고, 기꺼이 너희 친척을 돕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금식(禁食, fasting)은 ‘영성’을 드러내는 전통적인 한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영성’은 단순히 밥을 먹지 않는 극기훈련이 아닙니다. 금식을 통해서 길러진 ‘영성’은 세상으로, 이웃에게로 흘러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The Word became human and made his home among us (요한복음 1:14)”라고 고백했습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이것을 ‘인카네이션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몸 속으로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spirituality of incarnation (인카네이션의 영성)’입니다. 예수님의 ‘영성’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기도로 끝나지 않고, 설교로 끝나지 않고, 금식으로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삶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성경읽기 역시 ‘영성’을 기르는 방법입니다. 성경읽기를 통해서 길러진 ‘영성’은 밖으로 흘러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성’이고, 오늘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할 ‘영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