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9:23-27

23 나는 복음이 주는 복에 참여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고 있습니다.
24 경기장에서 경주자들이 다 달려가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명뿐인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25 경기를 하려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자기 절제를 하는 법입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면류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합니다.
26 이처럼 나는 목표가 없는 사람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나는 허공에다 주먹을 휘둘러 대는 사람처럼 싸우지 않습니다.
27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했으나, 정작 나 자신은 자격 미달이 될까 두렵습니다.

23 I do everything to spread the Good News and share in its blessings.
24 Don't you realize that in a race everyone runs, but only one person gets the prize? So run to win!
25 All athletes are disciplined in their training. They do it to win a prize that will fade away, but we do it for an eternal prize.
26 So I run with purpose in every step. I am not just shadowboxing.
27 I discipline my body like an athlete, training it to do what it should. Otherwise, I fear that after preaching to others I myself might be disqualified.

여러분은 오늘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의 중간에서 조금 뒷 부분을 읽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복음 밖에 몰랐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내려 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 2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복음이 주는 복에 참여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고 있습니다.” “I do all this for the sake of the gospel, that I may share in its blessings.” (New International Version)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헌신하는 일, 십자가를 지는 일,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전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일은 전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일이라면, 우리 중에 누가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우리에게 인정사정 없는 희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복음의 원리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어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 것이 복음의 원리입니다 (마가복음 8:35)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의 원리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는 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음이 주는 ‘축복 (blessings)’을 ‘share in (함께 나눈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는 복음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한 주일 후면 사순절 새벽기도가 시작됩니다. 원래는 이번 주 수요일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우리교회에서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합니다. 이런 특별한 절기를 앞두고 있으면 설교자에게는 고민이 생깁니다. 교인들에게 어떤 도전적인 (challengeable) 설교를 해야 할까 하는 고민입니다. 지금 새벽기도에서 고린도전서 말씀을 읽고 있는데요. 그 말씀을 읽다가 “와우!” 하면서 제 눈이 확 떠졌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25절 말씀입니다. “경기를 하려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자기 절제를 하는 법입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면류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합니다.”


시합에 나가는 선수들이 얼마나 자기 관리를 잘하는지 아시지요? 평소에 근육을 키워서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체중 조절을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운동이 체중이 많이 나가는 것보다는 적게 나가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것을 먹지 않고 참아 가면서 체중 조절을 하는 것입니다. 또 그래야 최상의 몸 컨디션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한번 읽어 보세요. “All athletes are disciplined in their training. They do it to win a prize that will fade away, but we do it for an eternal prize.” 경기에 나가는 운동선수가 트레이닝을 열심해서 자신을 단련 시키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 (we)’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 자신을 포함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모든 사역자들을 말합니다.

운동선수들은 상을 받기 위해서, 메달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피나는 훈련을 합니다. 하지만, 그 상은 영원한 상이 아닙니다. ‘a prize that will fade away (없어질 상)’입니다. 며칠 전에 일본의 삿보로에서 동계 아시안 게임이 열렸었는데, 이제 막 끝이 났습니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냈다고 합니다. 쇼트트랙 선수들이 잘해서 금메달을 많이 땄고, 스피드 스케이팅에서는 이승훈이라는 선수가 금메달을 무려 4개를 따서 이 부문에서 한국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한 대회에 나가서 3개 금메달을 딴 것이 기록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자 피겨스케이팅에서 최다빈이라는 17살 먹은 고등학생이 한국선수 최초로 금메달을 땄다고 합니다. 금메달을 딴 선수들은 아시아에서 최고의 선수가 된 것인데, 선수 본인들에게는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성경에 보니까 그 상은 영원한 상이 아니라 곧 ‘없어질 상’이라고 합니다. 

계속되는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but we do it for an eternal prize (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상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한다’는 말은 열심히 자신을 훈련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도 운동선수들처럼 열심이 훈련하는데, 우리가 훈련하는 목적은 ‘없어질 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상 (an eternal prize)’을 얻기 위해서 훈련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그렇게 훈련을 강조합니까? 그 이유가 27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했으나, 정작 나 자신은 자격 미달이 될까 두렵습니다.” “I discipline my body like an athlete, training it to do what it should. Otherwise, I fear that after preaching to others I myself might be disqualified.” (NLT) “운동선수들이 몸을 단련 시키는 것처럼, 나도 내 몸을 훈련합니다. ‘to do what it should (내 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런 뜻 아닙니까? NIV 성경에는 이 말씀이 “I beat my body and make it my slave”라고 나와 있습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나의 노예로 만든다”는 뜻이 잖아요? 내 몸이 원하는 대로 내가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몸이 나를 따르도록 훈련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대단한 영성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대단한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인정하니까 그가 쓴 편지들을 성경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런 영성을 가지기까지 어떻게, 어떤 식으로 자신을 훈련 시켰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영성훈련은 자기 몸을 훈련 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컨트롤 할 수 있도록 훈련 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훈련의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Otherwise, I fear that after preaching to oth-ers I myself might be disqualified.”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한 후에 나 자신은 자격 미달이 될까 두렵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퀴즈 문제 하나 낼까요? 우리가 말하는 구원은 영혼의 구원입니까? 아니면, 몸의 구원입니까? 아니면 몸과 영혼의 구원입니까? 우리가 말하는 구원은 몸과 영혼의 ‘전인적인 구원 (holistic salvation)’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금욕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의 몸이 좋아하는 것을 끊고 영혼의 즐거움을 얻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을 훈련해서 몸과 영혼의 전인적인 구원을 얻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움직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몸은 게으른 것을 좋아하고, 편하고 안락한 것을 좋아하고요. 먹는 것을 좋아하고요. 자극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잖아요? 시험 공부를 하다가 잠이 옵니다. 지금 자면 안 됩니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잠이 옵니다. 내 몸이지만, 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영성 훈련은 우리의 몸을 훈련 시켜서 내 말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내 몸을 내가 원하는 대로 컨트롤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한 후에 나 자신은 자격 미달이 될까 두렵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훌륭한 크리스천들이 이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에 disqualified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몸을 훈련 시켜서 자기에게 복종 시키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disquali¬fied될 수 있습니다. 성경도 많이 알아요. 인품도 좋아요. 교회에서 존경도 받아요.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하지만, 자기 몸을 훈련 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면 disqualified 됩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그렇게 될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은혜로운 설교로 많은 사람을 감동 시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선교의 업적을 많이 남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막상 자기 자신은 disqualified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제 다음 주부터, 우리는 40일 동안의 새벽 기도에 들어갑니다. 벌써 20년 넘게 해 온 일입니다. 우리교회 사역 가운데 제일 크고 의미 있는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했습니다. 광야 (wilderness)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제대로 된 풀한포기 자라지 못하고,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고, 잘 곳이 없습니다. 돈이 있어도 소용이 없고, 지식이 있어도 쓸모가 없는 곳이 광야 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인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광야에서 무려 40년을 지내면서,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갈 길을 인도하시는 것을, 낮에는 구름 기둥을 보고 따라가면서, 밤에는 불 기둥을 보고 따라 가면서 확신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본격적으로 사역에 들어가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의 방향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의 내용에 대하여 하나님께 물었을 것입니다. 이 때, 사탄의 세가지 시험 (temptation)이 있었습니다. 만일 이 때 예수님께서 이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 하셨더라면, 예수님의 사역의 방향과 내용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안락하고 편한 길을 따라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드렸던 40일 간의 기도가 예수님의 사역의 방향을 결정했고, 사역의 내용을 결정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40일 간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40일 간의 기도야 말로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거든요? 우리 모두가 잘 살고 싶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을 가지고, 가치 있게, 보람 있게,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적(利己的)인 인간이 아니라, 남에게 베풀 줄 알고, 자기 것을 나눌 줄 아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보스턴이 낳은 미국 최고의 지성이라고 칭송을 받는 월터 왈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What is success? To leave the world a little better, whether by a healthy child, a garden patch or a redeemed social condi-tion; To know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have lived; This is to have succeeded.” “성공이란 무엇인가? 건강한 아이를 낳거나, 정원을 가꾸거나, 사회 환경을 개선하거나,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으로 남겨 주고 떠나는 것이다.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말미암아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더 행복해 지는 것, 이것이 성공이다.”

에머슨의 말이 감동적이긴 하지만,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에머슨의 말을 뛰어 넘는 그 이상의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다른 사람을 감동 시키는 삶을 사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기도하심으로써 자신의 삶의 목적을 바르게 설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내용을 확정하셨습니다. 기도가 주는 유익함이란 이런 것입니다. 어쩌면 2017년 사순절에 여러분이 새벽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여러분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순절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새벽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면서, 상쾌한 기분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크리스천의 삶에 주는 유익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to teach us what is true and to make us realize what is wrong in our lives. It corrects us when we are wrong and teaches us to do what is right. God uses it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 to do every good work.”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숨을 불어 넣은 것입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가르쳐 주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깨닫게 해 주는 데 유용합니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는 우리를 바르게 잡아 주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사용하셔서 그의 백성들이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십니다.”

창세기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코에 하나님의 숨을 불어 넣었더니, 사람이 ‘living being (살아 있는 존재)’이 되었다고 합니다 (창세기 2:7). 그 하나님의 숨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사용하신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숨 (breath)’을 불어 넣으심으로, 우리를 ‘living being’으로 살게 하십니다.

40일 동안 매일 드리는 새벽기도의 자리가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모이는 자리가 광야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회개와 눈물의 자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주님의 위로와 격려를 받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내 몸이 새벽에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몸을 단련 시켜서 나에게 복종시켜야 합니다. 내 몸을 복종 시켜서 기도하는 자리에, 말씀 듣는 자리에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8을 함께 읽고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을 주지만, 경건의 훈련은 모든 일에 유익합니다. 경건은 이 세상에서의 축복뿐만 아니라, 앞으로 올 세상에서의 축복도 약속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