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56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
김태환 목사
마가복음 14:22-31
22 식사를 하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23 또 잔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잔을 주어, 제자들이 마셨습니다.
24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 쏟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2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실 그 날이 올 때까지는 결코 다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
26 예수님과 제자들은 찬송을 부른 뒤, 올리브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2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은 흩어질 것이다.’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
29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모두가 버릴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30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말할 것이다.”
31 베드로는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22 As they were eating, Jesus took some bread and blessed it. Then he broke it in pieces and gave it to the disciples, saying, "Take it, for this is my body."
23 And he took a cup of wine and gave thanks to God for it. He gave it to them, and they all drank from it.
24 And he said to them, "This is my blood, which confirms the covenant① between God and his people. It is poured out as a sacrifice for many. / ①Some manuscripts read the new covenant
25 I tell you the truth, I will not drink wine again until the day I drink it new in the Kingdom of God."
26 Then they sang a hymn and went out to the Mount of Olives.
27 On the way, Jesus told them, "All of you will desert me. For the Scriptures say, `God will strike① the Shepherd, and the sheep will be scattered.' / ①Greek I will strike. Zech 13.7
28 But after I am raised from the dead, I will go ahead of you to Galilee and meet you there."
29 Peter said to him, "Even if everyone else deserts you, I never will."
30 Jesus replied, "I tell you the truth, Peter—this very night, before the rooster crows twice, you will deny three times that you even know me."
31 "No!" Peter declared emphatically. "Even if I have to die with you, I will never deny you!" And all the others vowed the same.
오늘 말씀은 유월절 만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유월절 만찬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드신 마지막 만찬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오늘 말씀에서 영감을 얻어 (다빈치는 요한복음 13:22-30을 소재로 하여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깁니다. 이 그림은 가로 910cm, 세로 420cm의 매우 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다빈치의 후원자였던 루도비코 마리아 스포르차 (Ludovico Maria Sforza)의 요청으로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의 옛 수도원 식당의 벽면에 꽉 차게 그린 그림입니다. 유월절 식사 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주님,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설마 저는 아니지요?” 하면서 말을 주고 받고 있는 장면을 포착해서 그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좌우의 제자들이 식사하다 말고 예수님의 말씀에 깜짝 놀라는 표정들이, 아주 역동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다빈치는 이 그림을 1495년에 그리기 시작해서 1498년에 완성 했습니다. 르네상스의 전성기 때입니다.
유대인들의 유월절 만찬은 철저하게 매뉴얼에 따라서 진행이 됩니다. 먼저 촛불을 켜고, 포도주 잔을 돌립니다. 식사 사이 사이에 세 차례 더 포도주 잔을 돌립니다. 먹는 음식으로는 희망의 상징인 파슬리 (parsley)를 쓰라림과 눈물의 상징인 소금물에 찍어서 먹고, ‘마로르’라는 쓴나물을 ‘하로셋 (haroseth)’라고 하는 달콤한 소스에 찍어 먹습니다. ‘쓴나물’은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고통 받았던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의미가 있고, 쓴나물을 달콤한 하로셋에 찍어 먹는 것은, 자유의 달콤함을 알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짜’라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과 ‘구운 양고기’를 먹습니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틀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서 식구들이 나누어 먹습니다. 남기지 않고 다 먹어야 합니다. 재미 있는 것은, 식사 중에 제일 어린 자녀에게 네 개의 질문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질문1) “왜 오늘밤은 누룩이 들어 있지 않은 빵을 먹어야 하나요?” (질문2) “다른 날은 맛있는 나물들을 먹는데, 왜 오늘 밤은 쓴 나물을 먹나요?” (질문3) “다른 날은 음식을 어디다 찍어 먹지 않는데, 왜 오늘 밤은 두 번, 쓴나물은 하로셋에, 파슬리는 소금물에, 찍어 먹어야 하나요?” (질문4) “다른 날은 간단하게 먹는데, 왜 오늘 밤은 특별한 잔치를 하나요?” 매년 똑 같은 질문을 하게 되어 있고, 매뉴얼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질문과 대답의 요점은, 과거의 고통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 또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에 감사하면서 능동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만찬은 ‘할렐’ (시편 115-118편)과 ‘대할렐’ (시편 136편)을 노래함으로써 끝이 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찬송을 부른 뒤, 올리브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26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때 불렀던 찬송이 바로 ‘할렐’과 ‘대할렐’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 그림을 보면서 다빈치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예술가의 영감 (inspiration)에 감탄했습니다. 다빈치가 이 그림 제목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지 않은가 생각 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이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드신 식사가 세상에서 드신 마지막 식사였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붙였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다빈치는 이 그림을 통해서 유대교의 전통으로서 지켜 왔던 유월절 만찬이 이제 끝이 났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에 마지막 만찬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간절하게 원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원했다.” (누가복음 22:15)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유월절을 준비하여라 (누가복음 22:8)” 하고 부탁하셨습니다. 주님이 유월절 음식 먹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것은, 그 식사가 세상에서 드시는 마지막 식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식사를 통해서 뭔가 말씀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마가복음에서도 알 수 있지만, 유월절 음식이 제대로 준비된 것 같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구운 양고기를 준비한 것 같지 않습니다. 쓴나물도 준비한 것 같지 않고요.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마짜’를 준비해야 하는데, ‘마짜’를 준비한 것 같지 않고 보통 먹는 빵을 준비한 것 같습니다. 포도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포도주는 제대로 준비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 예수님께서 그 때 하신 식사가 정말 유월절 만찬이 맞느냐 하는 논쟁이 있을 정도입니다.
다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실까요? 식탁 어디에도 구운 양고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식탁에 군데 군데 놓여 있는 빵도 누룩 없는 ‘마짜’가 아닙니다.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은 납작 하게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리고, 다빈치가 그린 그림에는 양고기 대신 뜻밖에도 생선이 놓여 있습니다. ‘구운 양고기’ 대신 다빈치는 그림의 한 중앙에 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원근법을 사용하여 예수님에게 시선이 집중되도록 했습니다. 다빈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래 전부터 가져왔던 유월절 만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 한 것입니다. 그런 의에서 그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드신 만찬은 유대교의 유월절 만찬의 마지막임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예수님과 함께 먹는 새로운 만찬의 시작을 알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함께 먹었던 그 날 저녁 유월절 만찬은 여러가지 면에서 색다른 것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빵을 떼 주시면서 “받아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만찬에서 먹는 빵은 누룩 없는 ‘마짜”입니다. 이것은 고생했던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의미에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먹는 빵의 의미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빵을 나누어 먹은 사람들과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빵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또 우리가 나누어 먹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빵은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빵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우리는 한 몸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6-17)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when we break the bread, we are sharing in the body of Christ. And though we are many, we all eat from one loaf of bread, showing that we are one body.”
유월절 만찬에 모두 4번의 포도주가 나옵니다. 여기서 포도주는 단순히 축배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나누었던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포도주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 쏟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24절) 이제 포도주는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 사이에 맺는 ‘새로운 언약 (The New Covenant)’의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포도주 잔의 의미를 해석했습니다. “This cup is the new cove-nant between God and his people-- an agreement confirmed with my blood. It is poured out as a sac-rifice for many (이 잔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맺은 새언약이다. 나의 피로 합의를 확인한다).” (고린도전서 11:25) 그리고,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생의 미션 (mission)을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만, 누가복음을 보면, 주님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Do this in remem¬brance of me)’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기념하라’는 말씀을 단순히 반복하라, 되풀이하라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 보세요. “For every time you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you are announcing the Lord's death until he comes again (이 빵을 먹을 때마다, 그리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해야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26)
모든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계속해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It is poured out as a sacrifice for many (많은 사람을 위한 희생제물로 피를 쏟아 부은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이라는 말 속에 저의 여러분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죽음에 ‘빚 (debt)’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 빚은 우리가 평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인지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세상에 드러내면 됩니다.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면서 사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미션은 한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관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식사를 마친 예수님과 제자들은 같이 찬양을 하면서 올리브 산으로 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과 제자들이 불렀던 찬양이 무슨 찬양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식사 후에 부르는 찬양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시편 136편을 노래로 불렀을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십시오. 주는 선하시고,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모든 신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 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모든 주들의 주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홀로 위대한 기적들을 행하시는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1-4절) 이 시편이 26절까지 있는데요. 매 절마다 “His faithful love endures forever”라는 가사가 후렴처럼 반복됩니다. 제자들은 눈치를 못 챘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 날 저녁 식사가 세상에서 드신 마지막 식사인 것을 아셨던 주님은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는 말씀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 왔을 것입니다. 그럴 때 가슴이 울컥한다고 하잖아요? 아마 주님도 이 찬양을 부르면서 가슴이 울컥했을 것입니다.
올리브 산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말할 것이다.” (30절) 참 신기하게도 닭은 새벽에, 매일 일정한 시각에 두 번 ‘꼬끼요' 하고 웁니다. 시계가 없던 때에도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이 말은 ‘짧은 시간 안에’ 이런 뜻입니다. 닭이 한 번 울고, 약간의 짬 (interval)을 두고 또 한번 웁니다. 그 interval이 길지 않습니다. 기껏 길어야 한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이 짧은 시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베드로가 펄쩍 뜁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31절) 옆에 있던 다른 제자들도 다 같은 말을 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제자들은 주님과 같이 자고, 주님과 같이 먹고, 주님이 일하시는 동안 늘 옆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먹었습니다. 주님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시면서, 빵을 떼 주시고, 포도주 잔을 돌리셨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주님을 배반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내가 그럴 리가 없다 고 하면서 펄쩍 뛰었던 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사실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대로, 한 제자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고,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 갔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크리스천의 담대한 삶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담대하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의 도를 선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난 죽어도 주님을 배반하는 일은 없을거야!” 이렇게 큰 소리친다고 담대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먼저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을 싸워도 다 이길 수 있다는 명언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장 나약할 때는 자신의 나약함,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죄 성을 모르고 큰 소리 칠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장 강할 때는 자신의 나약함과 죄성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은혜를 구할 때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위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의 약한 것들을 더욱 기쁘게 자랑합니다.” (고린도후서 12:9) 이 말씀이 사순절에 드리는 우리교회의 신앙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