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58
배반의 입맞춤 (The Kiss of Betrayal)
김태환 목사
마가복음 14:43-52
43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가 다가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보낸 많은 무리들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유다와 함께 왔습니다.
44 예수님을 넘겨 주는 자가 사람들과 신호를 정했습니다. “내가 입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체포하여 데리고 가시오.”
45 유다가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이라고 말하면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46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에게 손을 대어 체포했습니다.
47 그러나 곁에 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 귀를 잘랐습니다.
4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강도를 잡는 것처럼, 나를 잡으려고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왔느냐?
49 내가 매일 성전에서 너희들과 함께 있으면서 가르칠 때에는 너희가 나를 잡지 않았다. 그러나 일어난 이 모든 것은 성경을 이루려고 일어난 것이다.”
50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떠나 도망갔습니다.
51 어떤 젊은 사람이 맨몸에 홑이불을 걸친 채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잡았습니다.
52 그러자 홑이불을 벗어 던진 채, 벌거벗고 도망쳤습니다.
43 And immediately, even as Jesus said this, Judas, one of the twelve disciples, arrived with a crowd of men armed with swords and clubs. They had been sent by the leading priests, the teachers of religious law, and the elders.
44 The traitor, Judas, had given them a prearranged signal: "You will know which one to arrest when I greet him with a kiss. Then you can take him away under guard."
45 As soon as they arrived, Judas walked up to Jesus. "Rabbi!" he exclaimed, and gave him the kiss.
46 Then the others grabbed Jesus and arrested him.
47 But one of the men with Jesus pulled out his sword and struck the high priest's slave, slashing off his ear.
48 Jesus asked them, "Am I some dangerous revolutionary, that you come with swords and clubs to arrest me?
49 Why didn't you arrest me in the Temple? I was there among you teaching every day. But these things are happening to fulfill what the Scriptures say about me."
50 Then all his disciples deserted him and ran away.
51 One young man following behind was clothed only in a long linen shirt. When the mob tried to grab him,
52 he slipped out of his shirt and ran away naked.
돈 리처드슨 (Don Richardson, 1935, 캐나다)이 쓴 뉴기니아 사위 (Sawi) 부족 (tribe)에 대한 선교 보고서 ‘화해의 아이 (PEACE CHILD)’라는 책을 알고 계시나요? 이 책은 27개국 언어로 번역되었을 정도로 선교학에서는 교과서처럼 통용되는 책입니다.
사위 부족은 적의 머리를 사냥하여 해골을 베고 자는 야만적이고, 전투적인 부족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위 부족은 배반(背反, betrayal)을 덕목으로 알고 사는 특이한 부족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상대방을 배반하는 방식은, 먼저 상대방과 우정을 쌓아서 상대방을 안심 시켜 놓고, 때가 되면 상대방을 배반하고 죽인다고 합니다. 이것을 그들의 용어로 '투위 아소나이 마카에린 (tuwi asonai makaerin)'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우정으로 살해 대상을 살찌운다는 것입니다.
리처드슨이 이 사위 부족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이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 넘기는 장면에서 환호했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룟 유다야말로 그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그만하면 됐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보아라!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겨진다. 일어나자! 가자! 나를 넘겨 줄 사람이 오고 있다 (41-42절)” 이렇게 말씀하실 때, 유다가 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보낸 성전 경비원들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유다와 함께 왔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과의 마지막 만찬 도중에 밖으로 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그 때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 빵을 접시에 찍어 주는 자가 나를 배반할 자이다’ 하시면서 빵 조각을 집어서 접시에 찍어 가룟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유다가 빵 조각을 받자마자, 사탄이 그에게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빨리 하여라!’ 거기 앉은 사람 중에는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받고, 곧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때는 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26-30)
예수님께서 식사를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시면서 올리브 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을 때, 밖으로 나간 유다는 성전 경비대원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온 것이 분명합니다. 유다는 경비원들에게 미리 말해 두었습니다. “내가 다가가서 입맞추는 사람이 바로 예수란 사람이오.”
유다는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어디 계시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셔서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뒤따라 갔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n, accompanied by the disciples, Jesus left the upstairs room and went as usual to the Mount of Olives.” ‘as usual’이란 말이 ‘늘 하던 대로’라는 뜻이 잖아요? NKJV에는 ‘as He was accustomed’ ‘그에게 익숙했던 대로’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도 저녁 식사를 하시면 올리브 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가는 그런 예수님의 습관이 자신이 본받아야 할 습관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이 자리에 앉은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 베드로는 훗날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베드로전서 2:21) 그가 받으신 고난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고, We must follow in his steps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인 것처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도의 습관도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남기신 발자취를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습관이 배신의 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의 습관을 알고 있었던 유다는 (요한복음 18:2), 겟세마네 동산으로 성전 경비대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넘겨 주는 자가 사람들과 신호를 정했습니다. ‘내가 입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체포하여 데리고 가시오.’ 유다가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이라고 말하면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에게 손을 대어 체포했습니다.” (45-46절)
복음서마다 조금씩 이 장면에 대한 기록에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곧바로 유다는 예수님께 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그러면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구여, 무엇 하러 여기에 왔느냐?’ 하고 묻자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마태복음 26:49-50)
제가 퀴즈 문제 하나 낼까요? 유다가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인사했을 때, 유다의 목소리가 어떤 목소리였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①아무 일 없다는 듯한 능청스러운 목소리였다. ②매우 긴장된 목소리였다. ③조금은 과장된 흥분된 목소리였다. ④자기 선생님을 경멸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제가 생각한 정답은 3번입니다. NASB에 보면 유다가 이렇게 예수님께 인사했다고 합니다. “Hail Rabbi!” 굳이 우리 말로 번역한다면 “선생님, 여기 접니다. 안녕하셨습니까?”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왕 퀴즈를 낸 김에 하나 더 낼까요? 유다의 키스를 받은 예수님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①모든 것이 끝났다는 표정이었다. ②유다를 불쌍하게 여기는 표정이었다. ③조금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④불쾌한 표정이었다. 여러분의 정답은 몇 번입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배반의 입맞춤’ ‘배반의 키스’입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뉴기니아의 사위 부족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그 장면을 보면서 환호했다고 하는데요.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어떻게 자기 선생님을 배반할 수가 있느냐 하면서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모두 유다의 이름을 쓸 때마다 ‘장차 예수님을 배반할 가룟 유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할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서 저마다 자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 식탁에 앉아 있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받은 돈주머니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 “난 아닙니다”고 말하듯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그 놈이 누군지 알기만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손에 단도 (칼)를 들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곁에 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 귀를 잘랐습니다.” (47절) 요한복음에는 그 제자가 베드로였다고 합니다 (18:10) 베드로가 그 종의 오른쪽 귀를 잘랐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8:10, 누가복음 22:50). 그 종의 이름이 말고 (Mal-chus)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고의 귀를 만져 고쳐 주셨다는 말씀도 성경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22:51). 이렇게 구체적이고 detail한 것들이 성경에 나오는 이유는, 그 때 일어났던 일들이 facts였다는 것입니다.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유다의 배반에 흥분했고, 칼을 휘두르면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대항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뿐이었습니다. 5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떠나 도망갔습니다.” “‘But these things are happening to fulfill what the Scriptures say about me.’ Then all his disciples deserted him and ran away (이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성경이 나에게 대하여 한 말들이 모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떠나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 끝에 재미 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청년이 맨몸에 홑이불을 걸친 채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청년을 붙잡았습니다. 이 청년이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이 청년이 틀림 없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붙잡은 것입니다. 이 청년은 상황이 다급하게 되자 몸에 걸치고 있었던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벌거벗고 도망쳤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청년이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마가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밝힐 작은 단서가 나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신학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서학자들은 마가복음이 다른 공관복음, 즉 마태나 누가복음의 기초 자료가 된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이 되었고, 마태나, 누가는 마가복음을 참고하여 그들의 복음서를 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님의 직접 제자라고 나오고, 요한복음을 쓴 요한도 예수님의 직접 제자라고 나오는데, 마가는 어떻게 그의 복음서를 기록을 할 수 있었는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거든요. 물론 예수님의 직접 제자가 아닌 누가는, 자기 스스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4).
모든 사람들이 유다의 배신을 말합니다. 참 드라마틱한 이야기이지요?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이 내부에서, 열 두 제자 중에서 나왔다는 것이 얼마나 드라마틱합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어 보면, 가룟 유다를 그렇게 비판할 것도 아닙니다. 방금 전까지 손에 칼을 들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에게 휘둘렀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려 두고 모두 도망갑니다. 한 청년은 맨 몸으로 도망 갔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이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다른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마태복음 26:33)” 이렇게 큰 소리쳤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공개된 자리에서 난 예수님을 모른다고, 난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부인합니다.
이 베드로가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는 지도자가 됩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교회를 지키는 지도자가 되었을까요? 신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 닥친 박해를 피하기 위해 지중해 연안 도시들로 피신을 했을 때도 박해자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교회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결코 우리의 감정(感情)에 따라 좌우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려도 전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큰 소리 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끝까지 믿음을 지킨다고 볼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이 만남을 확인해 주는 것이 성령 체험입니다. 공개된 장소에서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否認)했던 베드로에게 성령 체험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 말고는 베드로의 변화의 삶을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Kiss of Judas’라는 말은 ‘배반의 입맞춤’으로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문제는 ‘Judas’ 이름대신 우리의 이름이 들어갈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우리가 예수님을 배반할 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나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때, 내가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감수해야 할 상황에서,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아야 할 때, 언제 우리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칠 지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사순절이 곧 지나가고, 고난 주간이 오고, 부활주일이 옵니다. 부활주일이 지나면 다시 50일만에 성령강림절이 찾아 옵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했던 그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믿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와 축복을 주실 지 여러분의 마음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남은 사순절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난주간, 부활절, 그리고 성령강림절까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일들에게 마음을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