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60)
나는 이 사람을 모릅니다. (I Don’t Know This Man You Are Talking About! )
김태환 목사
마가복음 14:66-72
66 베드로가 공관의 아래쪽에 있을 때, 어떤 대제사장의 여자 종이 왔습니다.
67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는 것을 보고,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당신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
68 베드로는 부인하며 말했습니다. “네가 무엇을 두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베드로는 입구 쪽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
69 또 여자 종이 베드로를 보고, 다시 한 번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도 예수와 한패예요.”
70 다시 베드로가 부인했습니다. 잠시 후에, 거기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확실히 당신은 예수와 한패요. 당신은 갈릴리 사람이니까.”
71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였습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모르오!”
72 그러자 닭이 두 번째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한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엎드려서 울었습니다.
66 Meanwhile, Peter was in the courtyard below. One of the servant girls who worked for the high priest came by
67 and noticed Peter warming himself at the fire. She looked at him closely and said, "You were one of those with Jesus of Nazareth①." / ①Or Jesus the Nazarene
68 But Peter denied it. "I don't know what you're talking about," he said, and he went out into the entryway. Just then, a rooster crowed①. / ①Some manuscripts do not include Just then, a rooster crowed
69 When the servant girl saw him standing there, she began telling the others, "This man is definitely one of them!"
70 But Peter denied it again. A little later some of the other bystanders confronted Peter and said, "You must be one of them, because you are a Galilean."
71 Peter swore, "A curse on me if I'm lying?I don't know this man you're talking about!"
72 And immediately the rooster crowed the second time. Suddenly, Jesus' words flashed through Peter's mind: "Before the rooster crows twice, you will deny three times that you even know me." And he broke down and wept.
오늘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는 말씀입니다. 마가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베드로가 공관의 아래쪽에 있을 때, 한 대제사장의 여자 종이 왔습니다. 그 여종은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는 것을 보고,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당신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 베드로는 부인하며 말했습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66-68절)
베드로는 이렇게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마지막에는 "A curse on me if I'm lying-I don't know this man you're talking about (71절)!"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쉬운성경에는 베드로가 저주하면서 맹세했다고 했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마가가 기록하지 않은 충격적인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약 1시간 후에 다른 사람이 주장했습니다. ‘분명히 이 사람도 예수와 한 패요. 이 사람도 갈릴리 출신이니까.’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모르겠소.’ 베드로가 말하고 있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주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베드로는 주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서 몹시 울었습니다.” (누가복음 22:59-62)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t that moment the Lord turned and looked at Peter. Suddenly, the Lord's words flashed through Peter's mind: ‘Before the rooster crows tomorrow morning, you will deny three times that you even know me.’ And Peter left the courtyard, weeping bitterly.”
이 장면을 화가들이 놓칠 리가 없지요. 여러 화가들이 ‘베드로의 부인 (The Denial of Peter)’이라는 제목으로 이 장면을 그렸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카라바지오 (1573-1610,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이탈리아)가 그린 ‘성 베드로의 부인 (The Denial of Saint Peter)’이라는 그림입니다. 카라바지오는 베드로에게 세 손이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하녀는 양손으로 베드로를 가리키고, 병사는 한 손가락으로 베드로를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부정하는 제스처를 보이지만, 그의 얼굴은 그가 무엇을 했는지를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그림이 카라바지오의 마지막 작품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카라바지오는 이 그림의 제목을 ‘The Denial of Saint Peter’라고 함으로써 베드로같이 훌륭한 사람도 한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적이 있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否認)에 대한 말씀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베드로의 부인은 예고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주님을 위해서 제 목숨을 내 놓겠다고 큰 소리 칠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위해 네 목숨을 내놓겠느냐? 내가 너에게 진리를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요한복음 13:37-38) 이미 이렇게 예고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의 나약함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쉽게 내 목숨을 내 놓겠다고,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큰 소리 치지만, 한 순간에 예수님을 부인해 버리는 것이 우리의 인간성입니다. “그 사람이 그럴 줄 정말 몰랐어!” “정말이야?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우리가 이런 얘기를 얼마나 많이 듣고 있습니까?
며칠 전에 전인권 씨의 노래가 표절이라고 하는 기사가 떴습니다. 그만큼 충격적인 뉴스였기 때문에 실 시간 검색어 1위였다고 합니다. 전인권이라고 하면 보컬 그룹 ‘들국화’의 메인 보컬리스트로서 1980년 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얼마 전에는 촛불 집회에서 애국가를 열창하여 감동을 줬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의 대표곡 중의 하나인 ‘걱정 말아요 그대’가 독일 가수의 곡을 표절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 곡은 최근에 ‘응답하라 1988’의 OST로 크게 리바이벌 되었던 노래입니다. 표절 문제가 나왔을 때 그는 말도 안 된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안 되어 SNS에 독일에 가서 그 가수를 만나 저작권료를 얼마를 요구하든지 지불하겠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의 또 다른 대표 곡 중의 하나인 ‘우리’라는 곡은 가스펠 송 ‘I just want to praise you’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일었는데, 제가 들어봤더니, 불행하게도 똑 같습니다. 표절이 아니라 그대로 카피한 것이었습니다.
“들국과의 전인권이 표절을 했다고?”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아니,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고? 그럴 리가 있나?” 재미 있는 것은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했는데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 그 현장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베드로 외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냥 덮어질 수도 있었던 이 이야기가 덮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알려져서 복음서를 기록한 네 사람에게도 알려졌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의 인간성은 이렇게 연약하고 부끄러운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마당에 들국화의 전인권이 표절을 했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인간성도 그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대제사장의 집에서 일하는 여자 종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이 여자에 대하여 ‘one of the servant-girls of the high priest’라고 나옵니다. 그 여종은 어린 소녀였습니다. 그 소녀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간성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You are Simon son of John. You will be called Cephas., 요한복음 1: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했을 때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이라고 불렀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 (Simon son of Jonah)’이라는 뜻입니다. 또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 주실 때도 ‘요한의 아들 시몬아 (Simon son of John)’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버지의 연약한 인간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으로, 모두 베드로의 연약한 인간성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도 배반할 수 있고, 우리도 표절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인간성이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의 연약한 인간성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여러분도 저도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성령 안에서 거듭나서 새로운 인간성을 입었습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환란과 핍박 중에 지키는 큰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한 소녀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연약한 인간성을 가졌던 베드로가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했던 말, “당신들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모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아까 위에서 누가가 기록한 충격적인 말씀을 읽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말을 하는 순간 “At that moment the Lord turned and looked at Peter (그 순간 주님께서 베드로를 돌아 보셨다., 누가복음 22:59)”라고요. 어쩌면 성경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 않지만,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쳤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정말 그랬다면, 베드로는 그 예수님의 눈 빛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눈빛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Heinrich Hofmann (1824-1911, Ger-man)이 그린 ‘Christ and the Rich Young Ruler (그리스도와 부유한 젊은 지도자)’입니다. 비록 부자 청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표정이지만, 자기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베드로를 바라 보셨던 표정도 이와 비슷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약간은 슬프면서도, 그러나 상대방을 비난하는 표정은 아닌,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연민 (compassion)의 마음을 가지고 바라 보시는 표정입니다. 베드로를 바라 보신 예수님의 표정이 그렇지 않았을까요?
사무엘상 2:30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는 나를 존중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나를 경멸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다 (I will honor those who honor me, and I will despise those who think lightly of me).”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 제사장에게 한 말입니다. 엘리는 늙어갈수록 분별력이 흐려져 자기 아들들의 비행을 막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엘리의 행동을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사무엘상 2:29).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엘리는 아들들의 방자한 소행을 막는데 소극적이었습니다. 결국 엘리의 아들들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지키는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전사합니다. 같은 날 아들들이 전사 소식을 들은 엘리 역시 충격을 받고 의자에서 넘어져 최후를 맞이합니다.
신약성경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인정하는 사람은, 나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앞에서 그를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마태복음 10:32-33) ‘인정한다’는 말은 ‘acknowledge’라는 말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안다고 인정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에는 결코 따르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요즘에는 상대방이 물어보지 않는 이상 구태여 내가 크리스천이라고 말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크리스천이라고 먼저 말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습니다. 물어보면 그 때가서 대답을 하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의 트렌드이지만, 결코 성경적인 태도는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기회가 있으면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confess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기회를 살리라’는 말씀이 나오잖아요? 에베소서 5:1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Make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in these evil days.”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모두 살려야 합니다. 그 기회를 살려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한다면,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베드로를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어차피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한 사람이니까 베드로에게 마음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만나 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만나 주시면서 베드로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자신이 했던 말을 무시하고 베드로를 다시 만나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필요하다면 성전도 파괴해 버리는 분입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때 갑자기 성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약에 성전에 대한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그래서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참 성전은 모두 파괴되고 없지?” 눈에 보이는 성전 예배가 타락하니까 하나님은 그 성전을 파괴해 버리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집을 파괴해 버리신 하나님이시라면 충분히 자기의 법도 revise (개정)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나를 부인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나도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모른다고 부인하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자기가 한 말을 번복하시고 베드로를 만나 주십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서 “엎드려서 울었다 (He broke down and wept)”라고 기록했습니다. ‘break down’이라는 말이 완전히 주저 앉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붕괴된 상태를 말하잖아요? 마태복음에는 베드로가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6:75). 누가복음에도 똑 같이 나와 있습니다. 희망적인 것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일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이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개입하셔야 합니다. 전 주일에도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고린도후서 5:18)”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 (all of this)’라는 말은 사람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모든 과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실 때, 우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구해야 합니다. 이 일은 공부 한 시간, 두 시간 더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공부 한 시간, 두 시간은 우리 인생을 크게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점수가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일은 내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교회 달력을 봤더니 올해는 6월 4일이 ‘성령강림주일 (Pentecost Sunday)’이더라고요? 예수님의 부활 후에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들의 인생 속에 개입해 들어오신 것을 체험한 날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는 가장 중요한 때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 속에 개입해 들어 오시도록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