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4-18

14 베드로가 열한 명의 사도와 함께 일어서서, 군중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유대 사람들, 그리고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주민 여러분, 이 일을 여러분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15 지금은 아침 9시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16 오늘 일어난 일은 바로 요엘 예언자가 예언했던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17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18 그 날에 내 남자 종들과 여자 종들에게까지 내 영을 부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은 예언할 것이다.

14 Then Peter stepped forward with the eleven other apostles and shouted to the crowd, "Listen carefully, all of you, fellow Jews and residents of Jerusalem! Make no mistake about this.
15 These people are not drunk, as some of you are assuming. Nine o'clock in the morning is much too early for that.
16 No, what you see was predicted long ago by the prophet Joel.
17 `In the last days,' God says, `I will pour out my Spirit upon all people. Your sons and daughters will prophesy. Your young men will see visions, and your old men will dream dreams.
18 In those days I will pour out my Spirit even on my servants-men and women alike- and they will prophesy.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성령세례, 혹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에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오늘은 왜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성령의 사역과 결부 시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제일 먼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성령은 ‘진리의 영 (the spirit of truth)’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요한복음 14:17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를 진리로 인도해 주는 하나님의 영이 너희 속에 계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시는 여러분들 중에 인생을 올바로 살기를 원하지 않는 분들이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한번 뿐인 내 인생을 올바로 살고 싶고, 보람 있게 살고 싶고, 또 가치 있게 살고 싶고, 아름답게 살고 싶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 수 있는지 그 방법들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이곳 시간으로 어저께 저녁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소식을 한국에 계시는 형님으로부터 듣고 나니까 새삼스럽게 어머니께서 저에게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목회 열심히 해라. 너는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니까 목회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전번에 한국 가셨을 때 한가지 더 부탁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의로운 목사가 되라!”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저는 큰 소리쳤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어머니 말씀처럼 목회 열심히 하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임종은 지켜 보지 못했습니다만, 임종하기 몇 시간 전에 어머니를 바꿔 주셔서 간신히 통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숨이 차고 목이 막혀서 하시는 말씀을 잘 알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죠. “어머니, 제가 어머니 말씀처럼 잘 하고 있으니까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랬더니, “알아. 네 걱정은 안 한다” 그러셨습니다. 그 말씀은 똑똑하게 알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또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어머니, 마음 평안히 가지시고요. 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세요.”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전화상으로 똑똑히 알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기도야 늘 하지!”

저야 어머니 말씀처럼 다른 일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목회하고 싶지요. 그리고 어머니 말씀처럼 의로운 목사가 되고 싶지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해서 그런 목사가 되겠습니까? 제가 원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겠습니까? 나의 마음대로, 나의 생각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 드린다면, 제가 보기에 정말 아니다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도 자기 자신은 올바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행하게도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성령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거든요? 성령께서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고, 진리를 따르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 속에서 내주(內住)해 계십니다. 우리 속에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가 바른 길을 가도록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여러분, 로마서 말씀 읽다가 이런 말씀을 보셨습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 26)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e Holy Spirit prays for us with groan-ings that cannot be expressed in words.” ‘groanings’라는 말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것을 놓고 기도할 때, 우리가 바른 길을 따라 살지 않을 때, 우리가 불의한 일에 개입할 때, 성령께서 ‘with groanings’ 성령의 탄식 소리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보통 ‘groan’이라고 하면 ‘a deep inarticulate sound in response to pain or despair’를 말합니다. 고통이나 실망 때문에 내는 깊은 소리인데, 분명하지는 않은 소리입니다. 정상적인 크리스천은 내 안에서 신음하는 성령의 탄식 소리, 성령의 신음 소리를 듣습니다. 크리스천은 이 성령의 탄식소리가 내 속에서 들리기 때문에, 나의 길이 잘못되었고,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성령세례를 받도록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제가 잘 몰라서 지금까지 성령세례에 대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제가 잘 몰라서 성령세례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 제가 간절히 사모합니다. 내 안에 들어 오십시오.”

둘째로, 성경에 보면 성령을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보혜사(保惠師)’라는 말은 ‘보호하고, 은혜를 주시는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성경 원어에는 ‘파라클레이토스 (παράκλητος)’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우리 말로 번역할 때 ‘보혜사’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로는 ‘Helper’ ‘Counselor’ ‘Advocate’ ‘Comforter’ ‘Encourager’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 나의 이름으로 보내실 진리의 성령이신 보혜사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4: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에 AI (artificial intelligence)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말합니다. ‘인공지능’을 선보인 것이 꽤 오래 되었습니다. 요즘에 휴대폰에 모두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아이폰에는 ‘시리 (Siri)’라는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어서 물어 보면 대답을 합니다. 음악을 들려 주고 이게 누가 작곡한 무슨 노래냐고 물으면 말해 줍니다. 운전하다가 차를 세우고 내비게이션을 입력하고 할 수 없을 때는 ‘시리’에게 물으면 바로 내비게이션으로 연결됩니다.

지금은 ‘시리’보다 더 똑똑한 ‘인공지능’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구글의 ‘어시스턴트’ 마이크로소프트의 ‘코타나’ 아마존의 ‘알렉사’ 등이 각각 스마트 스피커를 달아서 출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미국만 해도 21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스마트 스피커를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젠 개인 비서가 필요 없을 전망입니다. 웬만큼 유능하지 않으면 개인 비서를 두는 것보다 스마트 스피커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고 경제적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발전할지 알 수 없지만, ‘인공지능’의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가 실망하고 낙심했을 때 과연 ‘인공지능’이 나를 위로해 줄 수 있을까?” “나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고 나에게 맞는 카운셀링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질문들입니다. 또 하나 이것은 늘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 집에 놓고 오거나 했을 때 이용할 수가 없습니다.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무용지물일 수도 있습니다. 인터넷 없이 어떻게 일기 예보를 알려 줄 수 있겠습니까? 배터리가 없거나 전원이 없을 때는 또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혜사’ 성령은 ‘인공지능’의 약점들을 모두 보완하고도 남습니다. 나에게 최적화된 카운셀링을 해 줄 뿐만 아니라, 나를 위로해 줍니다. 그리고,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나와 함께 있습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내주(內住)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뭐 하나만 없어도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인공지능’과 달리, 보혜사 성령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기능을 발휘합니다. 또 하나, ‘인공지능’을 탑재한 ‘스마트 스피커’는 비싼 돈을 주고 사야 합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께서 아무 대가 없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이렇게 우리 크리스천의 삶을 유익하게 합니다. 보혜사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즐겁게 믿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 성령은 올바른 길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걸을 때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낙심될 때 내 속에서 나를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연약할 때 옆에서 나를 도와 줍니다. 나에게 최적화된 카운셀링을 줍니다.

셋째로, 성령은 우리에게 ‘자유함’을 줍니다. ‘freedom (자유)’는 어디에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여기저기 매인 것이 너무 많습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매인 것이 많이 있고요. 사회적인 면에서 볼 때도 우리가 매여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유함’이 없습니다. 늘 무엇에 쫓기는 것 같은 삶을 삽니다. 늘 만족하지 못한 삶을 삽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가 매여 있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에 대한 말씀을 읽을 때마다 기분 좋은 말씀을 발견합니다. “바람은 제 맘대로 부는 법이다. 너는 바람 부는 소리는 듣지만, 그 바람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든 사람도 이와 같다.” (요한복음 3:8) 이 말씀은 사람이 성령으로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지 그 과정을 모두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람이 어디서부터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갈 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일일이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바람에 비유한 것은 아주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을 그리스 말로 ‘프뉴마 (πνεύμα)’라고 하는데요. ‘프뉴마’에는 ‘바람’ ‘숨’ ‘호흡’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읽을 때 기분이 좋은 것은,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분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제멋대로 분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말고 어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함’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면, 우리의 삶에 ‘자유함’을 줍니다. 여러분, 고린도후서 3:17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성령세례는 이처럼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세상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매이게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함’을 누리는 축복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우리 믿음생활에 꿈과 비전을 줍니다. 오늘 읽은 말씀 중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prophecy (예언)’ ‘vision (환상)’ ‘dream (꿈)’이라는 단어들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이 말씀을 반대로 읽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지 않으면 예언도 하지 못하고, 환상도 보지 못하고, 꿈도 꾸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으면,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고, 꿈도 꾸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떤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지 다 알 수 없지만, 예언과 환상과 꿈이 있습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꿈이 없는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꿈이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두 사람이 얼마나 다릅니까? 꿈이 없는 믿음생활은 재미 없습니다. 지루합니다. 늘 똑 같습니다. 흥분될 것도, 기대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언이 있고, 꿈이 있고, 환상이 있는 믿음생활은 늘 흥분되고 기대됩니다.

몇 년 전에 ‘노아’라는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를 보고 실망했습니다. 실망한 이유는 이 영화가 성경 내용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러 개의 팔을 지닌 타락한 천사가 등장하고, 상상 속의 동물들이 등장하고, 폭력이 등장하는 것을 크리스천들은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영화를 감독한 아로노프스키 (Darren Aronofsk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노아에 대한 성경 말씀을 미드라쉬 (Midrash)의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했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이고, 유대인은 수천 년 동안 구약을 읽으면서 이런 식의 토론을 해 왔다.” ‘미드라쉬’는 일종의 스토리텔링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성경 이야기를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가 아니라, 여기에 상상력을 더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구성하는 것입니다.

아로노프스키 자신이 유대인입니다. 그는 노아에 대한 성경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이런 식으로 듣고 성장했습니다. 밋밋하고 건조한, 몇 줄 안 되는 노아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바꾸는 것이 유대인들의 성경해석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꿈이 없고, 환상이 없이 성경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들은 ‘노아’를 보고, 성경과 다르다고 분노하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밋밋한 믿음생활, 흥분되는 일도 없고, 기대되는 일도 없는 믿음생활에 꿈을 주고, 환상을 보게 합니다. 습관적인 믿음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줍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입니다. 지금 하는 대로가 아니라 좀 더 창의적(創意的)인 믿음생활을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에 변화가 있기를 기대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 오시면, 우리의 믿음생활에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 오시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선물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성령이 나에게 임하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