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62
조롱 당하신 그리스도 (Christ Mocked)
김태환 목사
마가복음 15:16-32
16 군인들이 예수님을 공관 뜰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온 부대원을 불러모았습니다.
17 예수님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 왕관을 만들어 예수님의 머리 위에 씌웠습니다.
18 그들은 예수님에게 경례를 하며 소리쳤습니다. “유대인의 왕 만세!”
19 군인들은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습니다.
20 실컷 놀리고 나서, 군인들은 자주색 옷을 벗기고, 예수님의 옷을 다시 입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예수님을 끌고 나갔습니다.
21 그 때, 시골에서 온 구레네 출신의 시몬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입니다. 군인들은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22 군인들은 예수님을 ‘해골 지역’이라는 뜻을 가진 골고다로 끌고 갔습니다.
23 군인들은 예수님께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고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24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들은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을 누가 차지할지 결정하여 나누어 가졌습니다.
25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때는 아침 9시였습니다.
26 예수님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27 군인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두 명의 강도를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매달았습니다.
28 (없음)
29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아, 성전을 헐고 삼 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던 사람아,
30 당신 자신이나 구해 보시지!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
31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함께 다른 사람들처럼 놀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말했습니다. “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구원하고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여,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겠다.”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도 그와 같은 비난을 예수님께 했습니다.
16 The soldiers took Jesus into the courtyard of the governor's headquarters① and called out the entire regiment. / ①called the Praetorium
17 They dressed him in a purple robe, and they wove thorn branches into a crown and put it on his head.
18 Then they saluted him and taunted, "Hail! King of the Jews!"
19 And they struck him on the head with a reed stick, spit on him, and dropped to their knees in mock worship.
20 When they were finally tired of mocking him, they took off the purple robe and put his own clothes on him again. Then they led him away to be crucified.
21 A passerby named Simon, who was from Cyrene①, was coming in from the countryside just then, and the soldiers forced him to carry Jesus' cross. (Simon was the father of Alexander and Rufus.) / ①Cyrene was a city in northern Africa
22 And they brought Jesus to a place called Golgotha (which means "Place of the Skull").
23 They offered him wine drugged with myrrh, but he refused it.
24 Then the soldiers nailed him to the cross. They divided his clothes and threw dice① to decide who would get each piece. / ①Greek cast lots. See Ps 22.18
25 It was nine o'clock in the morning when they crucified him.
26 A sign was fastened to the cross, announcing the charge against him. It read, "The King of the Jews."
27 Two revolutionaries① were crucified with him, one on his right and one on his left. / ①Or Two criminals
28 ① / ①Some manuscripts add verse 28, And the Scripture was fulfilled that said, "He was counted among those who were rebels." See Isa 53.12; also compare Luke 22.37
29 The people passing by shouted abuse, shaking their heads in mockery. "Ha! Look at you now!" they yelled at him. "You said you were going to destroy the Temple and rebuild it in three days.
30 Well then, save yourself and come down from the cross!"
31 The leading priests and teachers of religious law also mocked Jesus. "He saved others," they scoffed, "but he can't save himself!
32 Let this Messiah, this King of Israel, come down from the cross so we can see it and believe him!" Even the men who were crucified with Jesus ridiculed him.
오늘 설교 말씀을 준비하면서 지금이 고난주간이었으면 좋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전체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말씀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머리에 가시 왕관을 씌웠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제사장의 공관을 지키는 군인들 이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손에 갈대 막대기 (a reed stick)를 쥐어 줬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7:29). 그리고 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경례를 하면서 “유대인의 왕 만세!”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조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갈대 막대기로 때리고, 침을 뱉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흉내를 내기도 했습니다. 지금 새벽기도에서 마태복음을 읽고 있는데요.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훨씬 더 심하게 예수님께서 조롱 당하신 당시의 상황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그리스도야! 누가 너를 때렸는지 맞춰 보아라!’ 하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26:67-68)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체포한 사람들은 그 앞에서 말도 안 되는 만행과 폭행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23:34) 정말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범위가 어디까지 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인가 하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훨씬 더 크고, 높고, 깊습니다.
1909년 4월 6일에 미국인 로버트 피어리 (Robert E. Peary 1856-1920)가 북극점 (북위 89도 57분)에 도달합니다. 몇 번의 도전 끝에 성공한 것입니다. 알고 봤더니 피어리가 메인 (Main)에 있는 보든대학을 나왔더라고요. 1986년 여름에 3개월 간의 휴가를 얻어 그린랜드 (Greenland)로 여행을 갔던 것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로부터 무려 23년 후에, 그의 나이 52세 때에, 드디어 피어리는 북극점에 도달합니다. 그 때 아내가 만들어 준 국기와 15년 동안이나 자기 가슴에 품고 다니던 국기를 그곳에 꽂았다고 합니다. 한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북극점의 바다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깊이를 재는데, 무려 30시간이나 얼음을 깼다고 합니다. 피어리 자신이 보든대학 (Bowdoin College)에서 지질학과 측량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지만, 깊이를 재기 위해서는 긴 줄 끝에 무거운 추를 달아 내리는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끝이 없이 들어가는 바다의 깊을 재기 위해서 더 긴 줄이 필요했습니다. 피어리는 그의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2,000m까지 줄을 내렸다. 아직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 북극의 바다는 2,000m 보다 깊은가 보다. ” 이렇게 잰 북극의 바다의 깊이는 4,290m였다고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그렇습니다. 우리 생각에 “이만큼 이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그보다 더 깊고, 그보다 더 높고, 그보다 더 넓어서 우리가 준비한 줄로 다 잴 수가 없습니다. 항상 그 줄의 길이보다 길기때문입니다. 결국 수십 차례의 노력 끝에 피어리는 북극의바다의깊이를 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측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공관에서, 그리고 빌라도 총독의 공관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조롱을 당했지만, 모두 참으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조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십자가 밑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가 붙었습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그런 말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홋날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 죄패가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아람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씌어졌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이 사실을 빼놓지 않고 기록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고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십자가 아래의 군인들이 예수님께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고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사형수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려는 마지막 인정으로 그렇게 했던 것인데, 예수님은 이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고통과 아픔을 그 무엇의 도움도 거절하고 모두 혼자 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그 옷을 누가 가져갈지 제비를 뽑고 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아, 성전을 헐고 삼 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던 사람아, 당신 자신이나 구해 보시지!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 (마가복음 15:29-30)
십자가 아래서 이 광경을 지켜 보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도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구원하고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여,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겠다.” (마가복음 15:31-32)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도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여라.” (누가복음 23:39)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듣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엘리야를 부르고 계신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Hieronymus Bosch (1450-1516)라는 네델란드의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물론 다른 그림도 많이 그렸지만, 성화를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합니다. 그 중에서도 ‘Christ Mocked (조롱 당하신 그리스도)’라는 그림이 유명합니다. 이 그림은 ‘Crowning with Thorns (가시관을 쓰심)’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한번 이 그림을 보시지요.
네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에워싸고 있습니다. 모두 예수님 을 고문하는 사람들 (torturers)입니다. 왼편 위에 있는 사람은 머리에 화살을 꽂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시관을 예수님께 씌워 주는 손은 그냥 손이 아니라 쇠로 무장한 손입니다. 무표정한 얼굴에, 피도 눈물도 없는 이 사람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위에 있는 사람 은 손에 고문 기구를 들고 있습니다. 목에는 가죽 벨트를 맸는데, 그 벨트에 날카로운 못이 박혀 있어서 이 사람의 잔인함을 극대화 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밑에 있는 사람은 막 예수님에게 입혔던 자주색 옷을 벗기고 원래 옷으로 갈아 입혀 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면, 재미 있는 것은, 왼쪽 아래에 있는 사람인데요. 흰 염소 수염에 얼굴 표정이 아주 간교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손에 무슨 막대기 같은 것을 쥐고 있는 것 같은데요. 확실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머리에 둘러 쓰고 있는 head-dress를 보면, 밑에 초승달 (a crescent moon)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이슬람교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잘 보면 초승달 위에 노란색의 별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별은 유대교의 상징입니다. 보쉬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 반기독교적인 세력으로부터 고문을 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잔인한 네 명의 고문자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창백하고 연약한 얼굴을 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시선(視線)이 고문하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그림을 보고 있는 독자들을 바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눈은 우리를 향하여 “나는 너를 위해서 이런 조롱과 고난을 받고 있다. 너는 나와 고난에 참여하고, 나의 고난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해설이 저의 마음에 비수(匕首) 같이 꽂힙니다. 정말 우리가 성경 말씀처럼 살지 못하는 것 중에 하나가, 성경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거절하고 편하고 안락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가복음 9:23)”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긍정하면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75세의 나이에 자기 고향을 떠나 식구들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미지의 땅으로 떠나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스토리를 읽으면서 감동합니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태복음 4:19)"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을 보면서 감동합니다. 하지만, 나도 주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 (cost)를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사람은 절대 바보다 아니다"라는 짐 엘리엇 (Jim Elliot, 1927-1956)이 남긴 말을 읽으면서 감동합니다. 엘리엇이 시카고에 있는 휘튼 칼리지 (Wheaton College) 2학년 때 쓴 일기장에서 이 말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어린 나이에 그럴 수가 있을까?" 하고 감동합니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 영원하고 의로운 일을 위해서 결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뭔가 우리의 가치 판단에 큰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지난 주 설교에서 본 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가 쓴 ‘제자직의 대가 (The Cost of Disci-pleship)’에서 이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무엇이 영원한 것인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무엇이 의로운 것인지, 판단하는 우리의 가치 판단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나를 따르려거든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지금 네가 있는 곳이 안전한 곳이 아니니까 그 자리를 따나 나를 따르는 안전한 삶을 선택하라는 그리스도의 초대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내가 있는 자리가 안전한 자리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위험한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도전적 (challenging)인 것은, 2,000전에 가난하고 무식했던 갈릴리의 어부들이 안전하지 못한 자신의 삶을 버리고 안전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어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등교육을 받았고, 문화적인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올바로 선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곧 교회라고 배웠습니다. 우리가 올바로 결단하지 못하고, 우리가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니까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합니다. 2,000년의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가 가장 건강하게 부흥했을 때는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심했을 때입니다. 떳떳하게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지하교회 (Catacomb)에서 예배를 드렸을 때, 교회가 가장 부흥했습니다. 교회가 가장 타락하고 약했을 때는, 교회가 정치와 결탁하고, 자본주의와 결탁해서 편하고 안락한 것을 추구했을 때입니다. 그 때부터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버리고 부자의 편에 섰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자의 편에 섰던 유럽의 기독교는 몰락하지 않았습니까? 미국의 교회들이 쇠퇴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교회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히에로니무스 보쉬는 '조롱 당하는 그리스도'라는 그림을 통해서 우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고문자들에게 에워싸여 창백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 보시면서 "너희도 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도 나의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묻고 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대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선택해야 하고,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삶 대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삶을 선택해야 하고, 영광의 면류관을 쓰려고 하는 대신 가시 면류관을 쓰는 삶을 선택해야 하고, 모든 사람들이 높은 곳을 향하여 살아 갈 때, 우리는 낮은 곳을 향하여 사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 것을 결단하지 않으면,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세월호에 가라 앉을 때, 그 광경을 모두 TV로 지켜 봤습니다. 점점 배가 기울어 넘어가는데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지 않았습니다. 누구 한 사람도 유리창을 깨고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밖으로 나오라고, 그렇게 앉아 있으면 모두 죽는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교회는 기울어져 가는 세월호와 같습니다. 더 기울어지기 전에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의 마음을 결단하십시오. 편하고 안락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조롱 받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니라 섬기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십시오. 그렇게 살기 위해서 학위 받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결혼하고, 그렇게 살기 위해 아이를 기르고, 그렇게 살기 위해 돈을 벌겠다고 결단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