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3/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64
부자의 무덤 속에 (In A Rich Man’s Grave )
김태환 목사
마가복음 15:42-47
42 이미 날이 저물었습니다. 이 날은 준비하는 날, 곧 안식일 바로 전날이었습니다.
43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 와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존경받는 유대 의회원이었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44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이미 죽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을 불러 예수님께서 이미 죽었는지 물었습니다.
45 백부장으로부터 확답을 들은 후, 빌라도는 그 시신을 요셉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46 요셉은 긴 베를 사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쌌습니다. 그리고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에 시신을 모셨습니다. 그런 다음, 무덤 입구를 커다란 돌을 굴려서 막았습니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모신 곳을 보았습니다.
42 This all happened on Friday, the day of preparation①, the day before the Sabbath. As evening approached, / ①Greek It was the day of preparation
43 Joseph of Arimathea took a risk and went to Pilate and asked for Jesus' body.① / ①Joseph was an honored member of the high council, and he was waiting for the Kingdom of God to come
44 Pilate couldn't believe that Jesus was already dead, so he called for the Roman officer and asked if he had died yet.
45 The officer confirmed that Jesus was dead, so Pilate told Joseph he could have the body.
46 Joseph bought a long sheet of linen cloth. Then he took Jesus' body down from the cross, wrapped it in the cloth, and laid it in a tomb that had been carved out of the rock. Then he rolled a stone in front of the entrance.
47 Mary Magdalene and Mary the mother of Joseph saw where Jesus' body was laid.
오늘 말씀은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安葬) 하는 말씀입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에게 내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요셉은 유대 사회에서 존경 받는 유대 의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마가가 기록한 이 짧은 말씀만 가지고는 요셉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는 말씀이 가슴이 들어 옵니다. 비록 그가 의회원이라는 명예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요셉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삶의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불법과 악이 판을 치는 이 세상이 어서 끝이 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정의로운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셉에게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니까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Joseph of Arimathea took a risk and went to Pilate and asked for Jesus' body.” (43절)
빌라도 총독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지지한다는 말이고,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요셉은 부자였고, 예수님의 제자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7:57). 그 때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도망간 것을 보면, 빌라도 총독에게 가서 자기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요셉도 그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 알면서도 자기에게 주어질 위험을 무릅쓰고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백부장을 불러 예수가 죽었는지 확인을 합니다. 예수가 죽은 것을 확인한 빌라도는 아무 말 없이 그 시신을 요셉에게 내어 줍니다. 요셉은 긴 베를 사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쌌습니다. 그리고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에 시신을 모셨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이 무덤은 ‘요셉 자신의 새 무덤 (his own new tomb, 마태복음 27:60)’이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무덤에 묻혔고, 무덤 입구는 ‘큰 돌’을 굴려 막았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마가가 기록하지 않는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무덤에 가서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들을 시켜 입구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66)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 무덤 맞은 편에서 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47절)’라고 기록했고, 마태도 그의 복음서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 맞은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7:61)”라고 기록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은 죽었고, 그의 시신은 이렇게 무덤에 묻혔습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나올 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에 마음을 집중해서 봐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이라는 말씀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이 사람이 존경 받는 유대 의회원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했습니다. 매우 흥미 있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대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감춰왔습니다 (요한복음 19:38)”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이 죽은 마당에 뭐가 아쉬워서 빌라도를 찾아 갔고,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고, 예수님을 시신을 자기의 새 무덤에 안장을 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요셉은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자기에게 닥쳐올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행동해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였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다가 보면 ‘말씀대로’ 혹은 ‘기록된 대로’ 이런 말씀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하여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지만,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6:24)”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쓴 편지에도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과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4)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해프닝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의 구원이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고,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부자 요셉에 대한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부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안장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구약 이사야 53:9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는 악한 일을 한 적이 없으며,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악한 사람들과 함께 묻혔으며, 그의 무덤이 부자들 사이에 있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좀 묘한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요셉이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평소에는 다른 유대인들이 이 사실을 알까 봐 숨기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이 죽고 나서 갑자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빌라도를 찾아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에게 내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또, 빌라도는 요셉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 줍니다. 요셉은 자기의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사야 53:9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무덤 맞은 편에서 이 광경을 끝까지 지켜 보았던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를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7:56). 우리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이 요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다행히 마태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마태복음 27:56)’라고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마가복음 15:40)’이라는 성경 말씀으로 보아, 요세의 어머니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의 어머니가 분명합니다. 요세는 야고보의 동생으로 보입니다.
이 여자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여자들이 예수님이 무덤에 안장되는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지켜 보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여자들이 이틀 후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합니다. 우스꽝스럽게도 예수님의 부활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여자들이 이른 새벽에 엉뚱한 무덤을 잘못 찾아 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무덤은 처음부터 비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이런 주장이 터무니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세 사람 이상입니다. 무덤에 안장될 때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 보았던 이 여자들이 아무리 이른 새벽이라고 해도 무덤을 잘못 찾아갔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하나님은 이 여자들을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證人, witnesses)’로 삼으셨습니다. 어쩌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켜 보았고,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는 광경을 모두 지켜 보았고, 이틀 후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던 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왜 그 여자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마음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마음이 모든 두려움을 내쫓고 그 자리를 지키게 하지 않았을까요?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작은 마음과 헌신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참 잘했구나. 너는 착하고 신실한 종이다. 네가 적은 것에 최선을 다했으니 내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너에게 맡기겠다 (마태복음 25:21, 23)” 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또, 고린도전서 15:58 말씀이 생각납니다. “성도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주님을 위해 일한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라고 하잖아요? 죄 때문에 우리가 죽었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우리의 죄를 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특권 (privilege)를 내려 놓으시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6-8).
우리의 생각이 미치는 범위는 여기까지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고맙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덕분에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격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 이상입니다. 제가 이 설교 말씀을 준비하기 전에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본디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바로 이 대목입니다. 사도신경 라틴어 원문에는 ‘descendit ad inferos’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He descended into hell (그는 지옥에 내려가셨다)”이라는 뜻입니다. 전체적으로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신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시며” 이런 뜻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시고 지옥에 떨어지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은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이 구절이 빠져 있습니다.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그 구절이 빠졌을까요? 혹시라도 현대인들이 ‘지옥’이라는 단어를 싫어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니면, 그 구절을 빼야 하는 무슨 신학적인 이유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을 단순히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고맙게 생각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신 것입니다. 그 대가로 우리의 죄를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감사와 감동을 넘어 ‘shocking’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지고 죽으신 자리(장소)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골고다 (Golgotha)’라는 말은 ‘해골의 곳 (Place of the Skull)’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이 보여 주듯이 흉악한 죄수들을 사형 시키던 곳이었습니다. 이런 곳이기 때문에, 골고다는 예루살렘 성 밖에 있었습니다.
제가 히브리서 말씀을 읽다가 깜짝 놀란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교의 제사의식에서 대제사장은 속죄제물로 드리려고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고, 그 몸은 진영 밖에서 태워버립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히브리서 13:11-1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 안이 아니라, 성 밖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성 밖으로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 안이 영광과 성공과 출세를 보장 받는 자리라고 하면, 성 밖은 고난과 수치와 모욕을 받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는 성 안이 아니라 성 밖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쓴 사람은 누구인지 그 저자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유대교에 정통한 사람인 것은 틀림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유대교의 제사 예법을 이렇게 자세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3:11-13 말씀은 바울의 편지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비야라는 사람이 쓴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한비야가 월드비전 구호요원으로 세계 각국을 돌면서 활동한 이야기들을 써 놓은 책입니다. 그녀의 열정적인 삶의 이야기는 청년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묻는 질문 중에 제일 많은 질문이 “재미있는 세계 여행이나 계속하지 왜 힘든 구호 활동을 하세요?” 라는 질문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바로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책의 제목은 매우 도전적인 제목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곳이 안전하고, 그곳이 익숙하고, 그곳이 내 꿈을 이룰 장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비야는 적어도 이 시대를 사는 청년들은 그런 안일한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지도 밖의 변두리를 돌아보면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일들이 널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들을 찾아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책의 제목을 통해서 크리스천의 삶의 대한 영감(靈感, inspiration)을 얻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지도 밖으로 나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도 지도 안으로 들어가서 안전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삶을 거절하고 지도 밖으로 나가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지도 밖의 삶은 위험하고 불안합니다. 아무 것도 보장 받을 수 없습니다. 지도 밖의 삶은 자기를 내려 놓아야 하는 삶입니다. 자기를 희생해야 하는 삶입니다. 하지만, 지도 밖의 삶은 가슴을 뛰게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지도 밖에, 예루살렘 성 밖의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지금 나의 삶을 점검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성문 밖으로 나가는 삶을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