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6:9-14

9 예수님께서 일 주일을 시작하는 첫 번째 날 아침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일곱 귀신을 내쫓아 주신 적이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0 마리아는 가서 예수님과 함께 지내던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11 마리아로부터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예수님을 뵈었다는 소리를 듣고도,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12 그후, 예수님께서는 다른 모습으로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들은 시골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13 두 제자는 다른 제자들에게 돌아가서 말했습니다. 이번에도 다른 제자들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14 나중에,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고 있는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이 적음과 마음이 굳은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후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9 [Longer Ending of Mark] After Jesus rose from the dead early on Sunday morning, the first person who saw him was Mary Magdalene, the woman from whom he had cast out seven demons.
10 She went to the disciples, who were grieving and weeping, and told them what had happened.
11 But when she told them that Jesus was alive and she had seen him, they didn't believe her.
12 Afterward he appeared in a different form to two of his followers who were walking from Jerusalem into the country.
13 They rushed back to tell the others, but no one believed them.
14 Still later he appeared to the eleven disciples as they were eating together. He rebuked them for their stubborn unbelief because they refused to believe those who had seen him after he had been raised from the dead.

오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다는 말씀과,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는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다른 두 제자의 말을 듣고도 열 한 명의 예수님읜 제자들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예수님은 열 한 제자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우리교회라면 이 정도 말씀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있어서 말씀을 드립니다. 화면에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오늘 본문 말씀이 나갔습니다. 9절 첫 머리에 [Longer Ending of Mark]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물론 번역 성경에 따라서는 이런 말씀을 표기(表記)하지 않은 성경도 있습니다.

하지만 NASB은 9절부터 20절 끝절까지 [  ]로 묶어 놓았습니다. NET, NIV, ASB, AMP, CEB, CEV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ESV (English Standard Version), Phillips (J.B. Phillips New Testament), MSG (The Message) 등 많은 번역 성경들이 이 사실을 표기했습니다. Phillips에는 9-20절 말씀에 ‘An Ancient Appendix (오래된 후기)’라는 말을 붙여 놓았고, NIV 성경에는 [The earliest manuscripts and some other ancient witnesses do not have verses 9–20 (가장 오래된 사본과 다른 고대 증언에는 9-20 말씀이 없다).]이라고 표기했습니다. 우리 말 성경을 보면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 성경에 이 말씀을 다른 설명 없이 괄호로 묶어 놓았습니다.

신학자들은 공관복음서 중에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학자들 간에 큰 이견(異見)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오래된 마가복음서에 오늘 읽은 9-20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없으면 마가복음은 16:8,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도망쳤습니다. 그것은 무서움과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뭔가 복음서의 끝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9-20절 말씀은 (NLT 성경에 [Longer Ending of Mark]이라고 나오는 부분) 마가복음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 후에 첨가했다는 말이 됩니다. 당연히 성경 학자들에게 이것이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학설들이 나오고 주장들이 나왔습니다만,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 절대적인 학설이나 주장은 없습니다.

제가 지난 번 설교에서 우리는 부활의 역사성을 강하게 주장했던 마가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부활 신앙이 중요한 만큼 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부활의 역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역사성’이 검증(檢證)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활신앙’은 아무 근거 없는 주장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의 ‘빈 무덤’을 처음 목격했던 여자들의 충격과 무서움, 그리고 공포, 그리고 당황스러움을 그의 복음서에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마가가 그 뒤에 아무 기록도 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요나서도 끝이 좀 이상한 것 아세요?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 나무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과연 옳으냐?’ 요나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고 싶도록 화가 납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넌) 네가 심지도 않았고 가꾸지도 않았으며, 밤새 나타났다가 이튿날 죽고 만 그 나무를 그렇게 아끼는데, 하물며 옳고 그름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도 넘게 살고 있으며,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저 큰 성 니느웨를 내가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요나서는 이렇게 어정쩡하게 끝이 납니다. 그 뒤에 더 이상 아무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나오지 않아도 요나서를 읽고 나면 뭔가 남는 여운이 있습니다. 이것을 문학적인 수사법에서는 ‘open endings’이라고 합니다. ‘open endings’과 반대되는 수사법은 ‘closed endings’입니다. 더 이상 아무 여운을 남기지 않고 모두 설명하는 것입니다.

마가가 그의 복음서를 여자들이 느꼈던 충격과 공포와 당황스러움으로 끝을 낸 데에는, 그의 복음서를 ‘open ending’으로 끝내고 싶었던 마가의 의도(意圖)가 들어있지 않았을까요? 마가복음과는 달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closed ending’으로 그들의 복음서를 완성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정말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 지십니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그렇게 쉽게 믿어 지십니까? 지금 새벽기도에서 누가복음 말씀을 읽고 있는데요. 지난 주간에 누가복음 7장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 (Nain) 이라는 마을에서 죽은 사람이 실려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어머니를 불쌍하게 보시고, 그 죽은 사람의 관에 손을 대시면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정말 죽었던 그 청년이 살아나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들을 어머니에게 돌려 보냈습니다. 성경에 뭐라고 나와 있는지 아십니까?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 모두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위대한 예언자가 우리 가운데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아 주셨다!’” (누가복음 7:16)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이 말씀을 읽으니까 정말 그 때 광경이 그대로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Great fear swept the crowd, and they praised God, saying, ‘A mighty prophet has risen among us,’ and ‘God has visited his people today (큰 두려움이 군중들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큰 선지자가 나왔다. 하나님께서 오늘 그의 백성들을 찾아 오셨다.’)’”

부활은 결코 우리가 쉽게 믿을 수 있는 사실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부활은 우리의 경험과 이성(理性)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아테네 (Athens)에 갔습니다. 학자들 간에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 때가 대략 1세기 중반, 서기 60-70년 경이었을 것입니다. 90-100년 경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벌써 그곳에 ‘아레오바고 (Areopagus)’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The Most Learned Society of Philosophers in the city (최고의 철학자들의 모임)’입니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 (Socrates, 469-399 B.C.)와 그의 제자 플라톤 (Plato, 428-348 B.C.)이 활약했던 곳입니다. 그야말로 철학의 도시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만난 사람들은 ‘에피큐리언 (Epicurean)’ ‘스토익 철학자들 (Stoic philosophers)’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테네의 철학을 이끌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설교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겠습니까? 사도행전 17:32에 이렇게 나와 있었습니다.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내용에 관해 나중에 더 듣고 싶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When they heard Paul speak about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some laughed in contempt, but others said, ‘We want to hear more about this later’).”

오늘 읽은 말씀에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알렸습니다. 그 시간에도 예수님의 열 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은 살아 계시다고 하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그 때 제자들의 반응을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말을 허튼 소리로 듣고 여자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4:11)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하지만 그 말이 그들에게는 넌센스 같이 들렸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열 한 제자들은 계속해서 들려 오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이 두 제자는 엠마오 (Emmaus)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7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는 가까운 마을입니다. 이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두 제자는 가던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가서 열 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열 한 제자들은 여전히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열 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눈으로 예수님을 목격하면서도 열 한 제자들은 “유령이다!” 하면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한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자기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성경을 가르쳐 주시면서 자신의 부활을 증명하셨습니다. 마가는 이런 이야기들을 모두 생략하고, “예수님께서 열 한 제자들의 믿음이 적음과 마음이 굳어 있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He rebuked them for their stubborn unbelief because they refused to believe those who had seen him after he had been raised from the dead, 마가복음 16:14)”라고 기록했습니다.

‘stubborn (고집)’ ‘unbelief (불신앙)’ ‘refused (거절하다)’이런 단어들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제자들은 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고집을 부렸을까요? 제자들은 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까요?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믿기를 거절했을까요? 제자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보기에도 부활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의 경험과 이성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하물며, 철학의 도시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의 최고의 지성인들이 부활에 대한 바울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조금 더 말씀을 깊이 들어가 볼까요? 부활을 왜 믿기가 어려운지 알기 위해서요.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 같은 사람도 죽을 때를 알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야 할 길로 간다.” (열왕기상 2:2) 사도 바울은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죽음은 죄의 삯 (wages)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6:23). 인간의 죽음은 그가 지은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주변에 정말 엉망으로 사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 죄 받을 거야!”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저 사람 벌 받아도 싸지!” 그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말과 똑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6:23 말씀을 계속 읽어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fre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through Christ Jesus our Lord (죄의 삯 (대가)는 죽음이지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 속에 인간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누구나 다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걸어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을 통해서(through Christ Jesus our Lord)’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Jesus)’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to believe Jesus Christ)’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the free gift of God’라고 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선물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좀 곰곰이 생각을 해 보세요. 선물을 거절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선물은 상대방이 값없이 주는 호의 (favor)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은 선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대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인간이 지혜로운 것 같지만, 이런 사람들을 보면 절대로 인간은 지혜로운 존재들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이 죽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났다가 죽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태어났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자기 하고 싶은 것 하고, 즐기고 싶은 것 즐기고, 보고 싶은 것 있으면 보고,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먹고,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이 다른 동물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삶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the image of God)’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말씀 속에 인간의 생명은 다른 동물의 생명과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것이라는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인간이 죄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는 운명적인 공식을 깨뜨리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 가운데 위대한 인물들도 많이 있었고, 위대한 발명도 있었고, 위대한 사상가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른 아무 것 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 믿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웃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부활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을 조롱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뉴스를 처음으로 들었던 예수님의 열 한 제자들도 그렇게 말하는 여자들을 허튼 소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하지만 그 말이 그들에게는 넌센스 같이 들렸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4:11) ‘넌센스’라는 말은, 말이 안 되는, 논리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이나 사건을 말하는 것이잖아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마가는 그의 복음서를 ‘closed ending’으로 마무리를 하지 않고, ‘open ending’으로 끝냈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았던 여자들의 충격과 공포, 그리고 당황스러움으로 끝을 냈습니다. 마가복음을 다 읽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것을 읽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그의 복음서의 끝이 마무리가 안 되었다고 생각하고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들을 꾸짖으셨다는 말씀을 덧붙이고, 예수님께서 온 세상으로 제자들을 내 보내시는 이야기를 덧붙여서 마무리를 잘 지어 놓았습니다.

마가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사성에서 그의 복음서를 끝냈습니다. 이제 ‘open ending’으로 끝난 마가복음을 마무리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스토리로 마가복음을 끝맺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 위에 어떻게 여러분의 부활신앙을 이어 나가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