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3/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67
"가라, 온 세상으로! (“Go Into All The World!” )
김태환 목사
마가복음 16:15-20
1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온 세상으로 가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17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증거가 따라올 것이다. 내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배우지 않은 새로운 말을 하고,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을 것이며, 환자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마치시고, 하늘로 들려 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20 제자들은 곳곳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일하셨고, 증거를 보여 주심으로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15 And then he told them,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everyone.
16 Anyone who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But anyone who refuses to believe will be condemned.
17 These miraculous signs will accompany those who believe: They will cast out demons in my name, and they will speak in new languages①. / ①Or new tongues; some manuscripts omit new
18 They will be able to handle snakes with safety, and if they drink anything poisonous, it won't hurt them. They will be able to place their hands on the sick, and they will be healed."
19 When the Lord Jesus had finished talking with them, he was taken up into heaven and sat down in the place of honor at God's right hand.
20 And the disciples went everywhere and preached, and the Lord worked through them, confirming what they said by many miraculous signs.
오늘 “가라, 온 세상으로!” 마가복음 강해설교 67회를 마지막으로 마가복음 강해설교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마가복음 강해설교를 시작했던 것이 2015년 5월 4일 주일이었습니다. 2년 3개월만에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마가복음 강해설교를 통해서 제 자신이 받은 은혜가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설교 준비를 하면서 복음서 중에 가장 처음에 기록된, 가장 오리지널 형태의 복음서를 읽고 설교한다는 설렘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이 설렘을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누가복음 7:35)”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종의 비유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과 교훈을 지혜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이 참되냐 그릇되냐,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사람들이 얼마나 변화된 삶을 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의 마가복음 강해설교가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달했느냐, 또 얼마나 좋은 설교였느냐 하는 것은, 그 설교를 들은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변화 되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선교의 명령을 하시는 것을 끝이 납니다. 요한복음 역시 20:21-23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그 죄는 사함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런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물론 그 뒤에 21장에 있지만, 신학자들은 21장을 요한복음의 ‘appendix’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은 20장에서 끝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온 세상으로 가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신 복음 전파에 대한 예수님의 명령(命令, commandment)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잘 따르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듣지 않거나 무시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온 세상으로 들어가 나의 복음을 전파하여라!” 이렇게 명령 하시는 데, 이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에밀 부루너 (Emil Brunner, 1889-1966, 스위스)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입학한 것이 1971년이니까 부루너가 사망한 지 5년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저는 이런 신학자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신학공부를 했습니다. 그 외에도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스위스, 루돌프 불트만 (Rudolf Bultmann, 1884-1976, 독일), 폴 틸리히 (Paul Tillich, 1886-1965, 독일), 등의 신학도 공부를 했습니다. 이들보다 좀 뒤에 나온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 1892-1971, 미국), 그 동생 리차드 니버 (Richard Niebuhr, 1894-1962),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등의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신학적인 사조(思潮)에서 보면 모두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입니다. 신정통주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온 신학입니다.
에밀 부루너의 신학은 학문적이라기 보다 실천적인 신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그의 신학을 선교신학이라고 불러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선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교회가 복음 전파의 사명에 충실할 때 교회의 존재 이유가 분명해 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 교회가 복음 전파의 사명에 무관심하거나 게으르다면 그 교회는 존재의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불이 탐으로써 존재하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를 함으로써 존재한다 (The church exists by mission as a fire exists by burning).”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온 세상으로 가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에 특별한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보스턴 다운타운에 가면 구세군 본부가 있고 교회가 있습니다. 마침 그 때 구세군 교회에 한국 목사님이 와 계셨기 때문에 만나 볼 일이 있어서 그 교회에 갔었습니다. 목사님을 기다리면서 홀에 앉아 있다가 벽에 이런 성경 말씀이 새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Mark 16:15) 우리 말 성경에서 읽던 것 하고는 달리 이 말씀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 왔습니다. 참 표현이 독특하다 싶어서 집에 와서 찾아 봤더니 마가복음 16:15을 New International Version으로 적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주의해서 보았던 것은 ‘into’라는 접속사였습니다. 사전을 찾아 봤더니 3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1. To the inside of (~ 속으로) 2. to a point of contact with (~과 접촉점으로) 3. be intensely involved in (~과 긴밀하게 관계하다) 그러면, 뒤에 ‘world’라는 말이 붙어 있으니까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 ‘세상과 긴밀하게 관계하라’ ‘세상과 접촉점을 만들어라’ 이런 의미가 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세상에 빛을 밝혀 주는 의미로, 또 세상에 필요한 존재들이 되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선교학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접촉점 (a point of contact)’의 역할을 해서 세상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살아야 할 무대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 그렇게 살아갈 만한 힘과 용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지금 새벽기도에서 사도행전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결코 지루한 성경이 아닙니다. 읽을 때마다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영감(靈感)을 주는 말씀입니다. 처음에 이 땅에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생겼을 때, 그들은 사회적으로 존경 받거나, 인정받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소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명분을 앞세워서 사회를 혼란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유대사회의 지도자들이 이 사람들을 잡아 다가 심문을 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너희가 무슨 능력으로, 또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 (By what power, or in whose name, have you done this)?” (사도행전 4:7) 유대 지도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 말을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사람들이 모두 무식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 4장에 생생하게 나와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담대하게 자기들의 믿음을 말할 수 있는가 (They were ordinary men with no special training in the Scriptures. How could they say so boldly their belief)?” (사도행전 4:13)
오늘 읽은 마가복음에는 그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세상으로 내 보내시면서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이들에게 귀신을 이기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병을 치료하라고 이들을 보내셨습니다 (누가복음 9:1-2)”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그냥 내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능력 (power)’과 ‘권위 (authority)’을 주셨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수님은 자기의 ‘능력’과 ‘권위’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위임하신 (commission)’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 (명령)하실 때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의 능력과 권위를 부여해 주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입니다. 다시 사도행전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초대교회의 크리스천들은 모두 평범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유대 지도자들이 놀랄 정도로 담대하게 자신들의 믿음을 전파했던 것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능력’과 ‘권위’였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대에도 주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동일하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 일꾼이 차고 넘치는 일은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일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다고요. 일꾼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새학기를 앞두고 우리교회도 많은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팀장들이 필요하고, 이 팀들을 섬길 간사가 필요합니다. 청년부의 규모가 커져서 팀을 5-6팀 늘려야 할 형편입니다. 그만큼 일꾼이 더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실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면 하나님의 일이나 세상 일이 다른 점이 어디 있겠습니까? 확실합니다. 주님은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능력’과 ‘권위’를 주셔서 섬기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17-18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증거가 따라올 것이다. 내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배우지 않은 새로운 말을 하고,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을 것이며, 환자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누구나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정말 믿는 사람은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if they drink anything poisonous) 아무 해가 없을까? 정말 환자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까?”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려고 접근하는 사람은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강한 사람이라도 몸에 치명상을 줄 수 있는 ‘독 (poison)’을 마시면 죽습니다. 그래서 주석가들 (commentators)은 이 말씀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현장에서 주님은 어떤 위험한 환경에서도 그의 제자들을 지켜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바울이 타고 가던 배가 난파되어 사람들은 널판지나 부서진 배 조각을 붙잡고 가까스로 몰타섬 (the island of Malta)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때 비가 오고 기온이 뚝 떨어져 매우 추웠습니다. 다행히 섬 사람들이 친절하게 맞아 주고 춥지 않도록 불을 피워주었습니다. 바울이 장작을 가져다 불 속에 넣었는데, 장작 속에 숨어 있던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섬 사람들은 바울이 그 자리에서 죽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렇지 않게 그 뱀을 불 속에 던졌습니다. 바울은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들의 말에 의하면, 지금도 선교 현장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주님은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 전파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지켜 주십니다.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복음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접촉점을 만들고, 복음을 전파합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의 내용은 변함이 없지만, 복음을 전파하는 형식과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시대에는 말로 전파하는 복음보다 우리의 행동으로, 우리의 삶으로 보여 주는 복음 전파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의 조선족들이 사는 곳에 ‘명동(明東)’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에 명동교회가 있고, 교회 바로 옆에 시인 윤동주 생가와 문익환 목사님의 생가가 있습니다. 이 둘이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습니다. 명동교회를 다녔고요. 그런데, 그 때 명동교회의 목사님이 김약연 (金躍淵, 1868-1942) 목사님이었는데, 이 분이 ‘간도 대통령’으로 불릴 만큼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자연히 윤동주와 문익환 목사님은 김약연 목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김약연 목사님은 처음엔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나중에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신 분입니다. 이 분은 돌아가시면서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만큼 이 목사님은 삶이 곧 그의 유언일만큼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셨습니다.
김약연 목사님은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우리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이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세상 사람들이 지켜 보고 실망했습니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진실한 행동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진실한 행동을 보고 너희가 하는 말을 믿고, 너희가 전하는 복음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교회가 큰 도전을 받고 있고, 크리스천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이 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어디 가서 떳떳하게 “저는 크리스천입니다” 이렇게 말하기가 어려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꿔서 생각하면, 하나님은 이 시대에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성경에도 보세요. 시대가 편안할 때보다는 시대가 어려울 때 예언자들이 나와서 시대가 나가야 할 길을 제시했습니다. 시대가 편안할 때보다는 어려울 때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바로 우리가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이 불행한 일이 아니라,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서 진실하게, 정직하게 사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을 진실하게 행동으로 나타내십시오. 그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세상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