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2016 | 부활절 셋째 주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On the Road to Emmaus)
김태환 목사
누가복음 24:13-27
13 그런데 그 날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약 1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엠마오라고 하는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14 이들은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15 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 오셔서 함께 걸으셨습니다.
16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당신들이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두 사람은 슬픈 기색을 하고 멈춰 섰습니다.
18 그 가운데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다녀오면서 최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단 말이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에 관한 일인데, 그분은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능력이 있는 예언자이셨습니다.
20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우리 지도자들이 그분을 죽게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21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삼 일째입니다.
22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이 아침 일찍 무덤으로 갔지만
23 예수님의 시신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24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무덤으로 달려갔는데,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25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리석고,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더디 믿는구나.
26 그리스도가 이 모든 고난을 받고 그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27 예수님께서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예언자를 들어 예수님에 관한 성경 말씀을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쉬운성경)
오늘 읽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 말씀은, 존 뉴톤 (John Newton, 1725-1807, 영국) 목사님이 “성경 한 장 한 장 다 찢어 없애 버린다고 해도 이 말씀만 있으면 상관이 없다”라고 말했던, 바로 그 말씀입니다. 존 뉴톤 목사님은 찬송 ‘어메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 1779)’ 가사를 쓰신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 자신이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 갔을 때 그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 찬송 가사입니다. 아마도 이 찬송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사람들의 입에서 불려질 찬송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2002년에 노예제도를 반대했던 영국의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1833, 영국)의 일생을 영화로 만든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나왔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윌버포스는 21세의 나이에 하원의원에 당선됩니다. 그는 1787년에 노예무역폐지 법안을 영국 의회에 제출합니다. 숱한 반대와 모함을 당하다가 마침내 1833년에 이 법안이 영국 상원의원을 통과합니다. 무려 46년만에 노예제도 폐지 법안이 통과된 것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이런 윌버포스의 집념이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서 존 뉴톤 목사는 윌버포스의 멘토 역할로 나옵니다.
이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11km 떨어진 마을입니다. 걸어서 3시간 거리에 있는 비교적 가까운 마을입니다.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날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 (Cleopas)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의 이름은 끝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엠마오로 걸어가면서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바로 그 날 저녁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날 새벽에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빈 무덤을 보았다는 소식까지 듣고, 지금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짐작컨대, 이 두 사람의 고향이 엠마오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으로 보아 이미 예수님를 따르던 제자들이 흩어지고 있었지 않았는가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12제자는 그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제 머리 속은 아주 착잡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 고향으로 가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과 성경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 두 제자는 왜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는가?”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죽은 마당에 딱히 예루살렘에 머물 이유가 없어서? 아니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이런 이유들도 저에게는 그렇게 중요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번 사순절에 히브리서를 강해했습니다. 저에게는 히브리서를 한 절 한 절 꼼꼼하게 읽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히브리서 강해를 들으면서 지루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조금 죄송합니다만, 저에게는 아주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교의 제사 제도와 비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새로운 구원의 길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그 말씀을 읽어 가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저에게 가장 감동적인 말씀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서슴지 않고 히브리서 13:13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문 밖에 계신 주님께 나아가서 그 분이 당하신 수치를 함께 겪읍시다.” 이 말씀이 개역성경에는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NIV 성경에는 “Let us, then, go to him outside the camp, bearing the disgrace he bore”라고 나와 있습니다.
‘outside the camp’라는 말은 예루살렘의 성 밖을 말합니다. ‘inside the camp’는 예루살렘 성 안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성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outside the camp’는 바로 예수님께서 고난과 수치를 당하신 그 자리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도 그 자리로 가서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수치를 함께 당하자고 합니다. 이 말씀을 조금 확장해서 적용한다면,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현장은 ‘inside the camp’가 아니라, ‘outside the camp’라는 것입니다. ‘inside the camp’가 성공과 야망과 출세와 인기를 추구하는 곳이라면, ‘outside the camp’는 고난과 희생과 수치를 당하는 자리입니다. 성경 어디를 읽어 봐도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이런 말씀을 찾을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본질을 꿰뚫는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inside the camp’가 아니라 ‘outside the camp’로 가서 예수님처럼 고난과 수치와 모욕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서 저자의 주장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들의 고향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 히브리서 말씀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제 눈에 보이는 두 사람은 지금 ‘outside the camp’를 떠나 ‘inside the camp’로 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하게 보이는 두 제자의 모습이 저에게는 뭔가 잘못된 것이 보였습니다. 헨리크 샌케비치 (Henryk Sienkiewicz, 1846-1916, 폴란드)가 ‘쿼바디스 (Quovadis)’ 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1951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다시 2001년에 폴란드의 영화 감독 에르지 카발레로비치가 이 영화를 ‘쿼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합니다.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네로 시대에 박해를 피해서 로마를 떠나 지중해로 가는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가는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 때 당황한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그 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내 양을 버리고 온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려고 한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베드로는 다시 가던 길을 돌이켜 로마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성경에는 없는, 외경(外經, Apocrypha) ‘베드로행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두 제자는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가지고 토론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 오셔서 함께 걸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인지 알지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묻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서로 주고 받고 있습니까?” 그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돌았습니다 (17절). 두 사람이 오히려 예수님께 반문합니다. “보아하니 예루살렘에서 오는 것 같은데,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십니까?” (18절) 예수님은 그 일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고 다시 묻습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인데, 그분은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능력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라고 기대했었습니다. 지금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삼 일째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오늘 아침 일찍 무덤에 갔었는데, 예수님의 시신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를 보았다고 합니다. 우리와 함께 있던 제자들이 무덤으로 갔었는데,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 무덤은 비어 있었고, 예수님은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참 답답하십니다. 어찌 두 분은 예언자들의 글을 믿지 않으십니까? 예언자들의 글에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그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예수님은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예언자들의 글과 메시아에 대한 성경 말씀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n Jesus took them through the writings of Moses and all the prophets, explaining from all the Scriptures the things concerning himself.”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성경 전체에 나와 있는 메시아에 대한 글들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메시아가 고난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죽는다는 것, 그렇지만, 메시아는 죽지 않고 부활한다는 것을 일일이 말씀을 찾아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나중에 이 두 사람이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오다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말씀해 주실 때에 마음이 불타는 것 같지 않았습니까 (Didn't our hearts burn within us as he talked with us on the road and explained the Scriptures to us)?” (32절) 이 두 제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가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은 자기들이 경험했던 일들을 모두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설교자인 저에게 주시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 사람의 삶의 방향을 다시 바꾸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고향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다시 방향을 바꾸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within the hour they were on their way back to Jerusalem.” (33절) 한 시간이 못되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었다고 썼습니다. 참 재치 있는 표현입니다. 저녁 식사 후였으니까 이미 날이 저물었는데, 제자들은 그 밤으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우리의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내 생각대로 살던 삶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넓은 길에서 좁은 길로, 이기적인 삶에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삶으로, 예전의 생활 (the old life)에서 새로운 삶 (the new life)으로,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말대로 하면, ‘inside the camp’에서 ‘outside the camp’로 삶의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기회가 없이, 그냥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대로 ‘inside the camp’에서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outside the camp’로 삶의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outside the camp’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곳입니다. 거기는 편안한 곳이 아니라 고난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거기는 성공이 보장된 곳이 아니라, 수치와 모욕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는 영광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자기를 희생하는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 바뀌어진 이 새로운 삶의 방향이 아직 우리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inside the camp’로 돌아가려고 하는 경향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고향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자기들이 예수님께 두고 있던 희망이 꺾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예루살렘이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이 생활을 접고 내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듭니다. 위험한 곳을 피해서 안전한 곳으로, 의지할 곳 없는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의 품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나름대로 ‘inside the camp’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이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들의 앞을 가로 막은 것입니다. “아니, 너희들이 있어야 할 곳은 엠마오가 아니라, 너희가 떠나 온 예루살렘 영문 밖, ‘outside the camp’, 골고다 언덕,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 내가 고난과 수치를 당한 곳, 바로 그 자리가 너희가 있어야 할 곳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두 제자의 삶의 방향을 다시 돌려 놓으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읽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짐으로써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아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게 되어 있구나! 그리스도가 부활하게 되어 있구나! 무덤이 비었다는 여자들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엠마오가 아니라 예루살렘 영문 밖 ‘outside the camp’로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Anyone who wants to be my disciple must follow me, because my servants must be where I am., 요한복음 12: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inside the camp’에 계시지 않고, ‘outside the camp’에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는 끊임없이 ‘inside the camp’로 들어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꿈과 성공과 출세를 보장해 주는 자리, 그 자리가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가 아니라 예루살렘 영문 밖, ‘outside the camp’에 계시면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자.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나와 함께 수치를 당하자!” 이렇게 우리를 부르십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가 이 말씀에 응답할 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 소망이 생기고, 우리 교회에게 소망이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