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4/2017 | 크리스마스 설교 II
한 아기 때문에 (Because Of A Child Born To Us)
김태환 목사
이사야 9:1-7
1 고통의 땅에 그늘이 걷힐 것이다. 옛날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셨다. 하지만 앞으로는 지중해로 나가는 길과 요단 강 건너편, 그리고 북쪽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외국인이 살고 있는 갈릴리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2 어둠 속에 살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짙은 그늘의 땅에 살던 백성에게 환한 빛이 비췰 것이다.
3 “하나님, 주께서 그 민족을 크게 하시고, 그 백성을 행복하게 하십니다. 추수할 때에 사람들이 기뻐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전쟁에서 빼앗은 물건을 나누는 백성처럼 기뻐합니다.”
4 주께서 미디안을 물리치시던 때처럼 그들이 진 무거운 멍에를 내려 주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막대기를 벗겨 주시며, 주의 백성을 치던 몽둥이를 없애 주실 것이다.
5 군인들이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신고 다니던 군화와 피로 얼룩진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 불에 사라질 것이다.
6 왜냐하면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7 그의 왕권은 점점 커지겠고, 평화가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이어진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다윗의 나라에서 다스릴 것이다. 그가 정의와 공평으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그 나라를 견고하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자기 백성을 뜨겁게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1 Nevertheless, that time of darkness and despair will not go on forever. The land of Zebulun and Naphtali will be humbled, but there will be a time in the future when Galilee of the Gentiles, which lies along the road that runs between the Jordan and the sea, will be filled with glory.
2 The people who walk in darkness will see a great light. For those who live in a land of deep darkness, a light will shine.
3 You will enlarge the nation of Israel, and its people will rejoice. They will rejoice before you as people rejoice at the harvest and like warriors dividing the plunder.
4 For you will break the yoke of their slavery and lift the heavy burden from their shoulders. You will break the oppressor’s rod, just as you did when you destroyed the army of Midian.
5 The boots of the warrior and the uniforms bloodstained by war will all be burned. They will be fuel for the fire.
6 For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to us. The government will rest on his shoulder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①,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 ①Or Wonderful, Counselor
7 His government and its peace will never end. He will rule with fairness and justice from the throne of his ancestor David for all eternity. The passionate commitment of the Lord of Heaven’s Armies will make this happen!
오늘은 우리교회에서 드리는 두 번째 크리스마스 예배입니다. 미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니까 한국에서처럼 설레는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어렸을 때 어른들을 따라서 새벽송 돌던 생각이 납니다. 손을 호호 불어 가면서 눈길을 걸어서 집집마다 새벽송을 돌았습니다. 그 집 앞에 가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을 부르고,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불렀습니다. 집집마다 새벽송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찬송 소리가 나면 온 식구들이 나와서 같이 찬송을 부릅니다. 찬송을 마치면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인사 하기도 하고 “성탄절에 복 많이 받으세요!” 이렇게 인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집은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는 집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집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다 불러도 나오지 않는 집도 있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4절까지 다 불러도 잠이 깊이 들었는지 안 나오는 집들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소중한 성탄절에 대한 기억들입니다.
여러분, 혹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 찬송이 만들어진 유래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는 1818년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산골 마을 오번돌프 (Oberndorf)에 성 니콜라스 교회 (St. Nicholas Church)가 있었습니다. 오번돌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경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날 저녁 교회에 성탄 축하 모임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르간이 고장 났습니다. 눈이 많이 왔기 때문에 오르간을 고치는 기술자를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 교회의 죠셉 모어 (Joseph Mohr, 1792-1848, 당시 26세) 신부는 교회의 반주자 겸 성가대 지휘자였던 프란츠 그루버 (Franz Xaver Gruber, 1787-1863, 당시 31세)를 찾아 가 오늘 저녁에 오르간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르간 걱정은 하지 마세요. 내가 전에 크리스마스 노래 가사를 하나 써 놓은 것이 있습니다. 이 가사에 당신과 내가 이중창을 부르고, 후렴 부분을 성가대가 합창으로 부를 수 있도록 곡을 붙여주세요. 오르간으로 반주할 수 없으니, 내가 기타로 반주하겠습니다. 오늘밤 자정 미사 때 써야 하니까 단순한 곡이 좋겠어요." 부탁을 받은 그루버는 모어의 아름다운 가사에 매료되어 악상이 절로 나왔다고 합니다. 세 시간 만에 곡을 붙였다고 전해 오기도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찬송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약속대로 모어 신부가 기타를 치면서 테너를 맡았고, 그루버는 베이스를 맡았다고 합니다. 모어와 그부버의 이중창에 이어 교회 성가대가 후렴을 불렀다고 합니다. 맑고 단순한 멜로디로 된 이 찬송은 그날 저녁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현재 이 찬송은 세계 130개의 언어와 193개의 버전으로 번역 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크리스마스 찬송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찬송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이 돼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혹시 “만일 그 때 오르간이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만일 그랬더라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 찬송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는 마거릿 미첼 (Margaret Munnerlyn Mitchell, 1900-1949, 미국)이 1936년에 쓴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그 이듬 해인 1937년에 퓰리처 상을 받았습니다.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하마터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했습니다. 무명 작가가 쓴 방대한 양의 소설을 출판해 줄 출판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거릿 미첼은 한 출판사의 직원에게 원고를 떠넘기다시피 맡겼다고 합니다. 원고를 읽던 이 직원은 곧 원고에 매료되었고, 출판이 결정되었습니다. 그 때 마거릿 미첼이 아무도 내 원고를 출판해 줄 출판사가 없다고 좌절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원고를 억지로 떠맡았던 직원이 원고를 읽지 않고 한쪽에 쳐박아두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랬더라면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대작 ‘바람과 함께 사리지다’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이야기가 하나 둘이 아닙니다. 토머스 칼라일 (Thomas Carlyle, 1795-1881, 영국)이 쓴 명저 ‘프랑스 혁명사 (The French Revolution)’ 역시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했습니다. 칼라일은 2년 동안 심혈을 기울려 쓴 수천 페이지의 원고를 이웃에 살고 있던 친구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 1806-1873, 영국)에게 한번 읽어 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집의 하녀가 원고 뭉치를 버리는 것으로 알고 난로에 불쏘시개로 쓰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칼라일은 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을 방황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집을 짓는 공사판에서 기술자가 벽돌을 한장 한장 쌓아 올리는 것을 보고 다시 ‘프랑스 혁명사’를 쓸 용기를 냈다고 합니다. 결국은 3년 후에 ‘프랑스 혁명사’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은 반드시 불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난 때문에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고난은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Silent Night / Holy Night / All is calm And all is bright / Round yon virgin Mother and child (고요하고 거룩한 밤, 처녀 어머니와 아기 주변은 고요하고 빛이 나네)
Holy infant so tender and mild / Sleep in heavenly peace / Sleep in heavenly peace (거룩하고 온유한 아기, 하늘의 평화 가운데 잠들어 있네)
이 찬송 가사에도 ‘아기 (child)’가 나옵니다만, 성경은 일제히 ‘한 아기’가 탄생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누가복음 2:11-12) 또 마태복음에는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가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쪽에서 그 아기의 별을 보고, 아기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마태복음 2:2)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이사야 9장 말씀을 보십시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이사야 9:6)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to us. The government will rest on his shoulder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①,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 ①Or Wonderful, Counselor
학자들은 이사야서가 대략 기원전 7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것은,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면서 ‘한 아기’의 탄생에 대한 예언과 성취의 말씀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한 아기’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에 대한 환상(幻想)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 기간 강대국의 압제 속에서 고난을 받던 유대 민족들은 메시아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이사야가 살던 시대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이미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던 때 (기원전 722년)입니다. 남왕국 유다는 앗시리아와 이집트와 신흥대국 바빌로니아의 틈바구니에서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지켜 보고 있던 때였습니다. 결국 남왕국 유다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기원전 586년에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합니다.
이 때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것이 ‘메시아 사상’입니다. 사람들은 강대국의 압제로부터 자기들을 구원해주고, 그들을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구원해 줄 강력한 힘을 가진 메시아를 고대했습니다. 사람들은 메사아를 강력한 힘을 가진 ‘전사 (Warrior)’와 같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서 말씀하신 메시아는 ‘전사’의 모습이 아니라, 연약한 ‘한 아기’의 모습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6절을 보세요. “For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to us (왜냐하면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누가가 기록한대로 포대기에 싸여 말 구유에 누워 있는 ‘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누가복음 2:12, 16). 700년 전에 기록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Mighty Warrior’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연약한 ‘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정말 저 아기가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메시아일까?” “정말 저 아기가 우리를 구원해 줄까?” “정말 저 아기가 평화의 왕 (Prince of Peace)일까?” “정말 저 아기로 말미암아 세상에 전쟁이 그치고 하나님의 샬롬 (shalom)을 나누는 세상이 될까?” 불행하게도 2,000년 전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그분은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11-12)” 라고 기록했습니다.
오늘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크리스마스 (Christmas)’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 (Mass of Christ)’라는 뜻 아닙니까? 예수님은 여러 번 “나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God blesses those who do not turn away because of me or who are not offended by me) (마태복음 11:6, 누가복음 7:23)”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기대를 걸어도 좋을만한 Warrior의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한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 그리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신 예수님, 사람들이 그를 보고 갈릴리 사람이라고 부르고,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렀던 예수님, 하지만, 그를 보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 예수님을 보고 마음에 offend를 받지 않는, 기분이 상하지 않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이사야 말씀을 크게 두가지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7절에 나오는 “그의 왕권은 점점 커지겠고, 평화가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이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왕권’이란 말은 ‘통치권’을 말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말이 ‘government (정부)’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권’이라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왕권’이라는 말은 ‘메시아 정부’ ‘메시아 정권’이라는 뜻입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그리스도 (메시아) 정부, 메시아 정권은 영원히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나오는 말씀처럼 지금 그리스도의 왕권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세상은 메시아 정권이 추구하는대로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최근에 와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갈등은 더 심화 되고, 세계는 전쟁과 폭력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부터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해 드리는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왕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메시야 정부가 추구하는대로 세상에 평화를 가져 오는 일에, 세상에 평화를 증대시키는 (increase) ‘peace maker’들이 되어야 합니다.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무슨 큰 일을 해서 평화를 위해 일할 수도 있지만, 평화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작은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여기 ‘평화’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peace’로 번역할 수 있지만, 다른 말로는 ‘wholeness’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말로 ‘온전’ 혹은 ‘완전’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네요. 평화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온전하게 하고, 완전하게 하고, 회복 시키고, 치유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눈으로 보면, 반드시 큰 일이 아니어도 우리 주변에 해야 할 일이 널려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메시아 정부가 정의와 공평으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그 나라를 견고하게 세울 것이라고 합니다 (7절). 우리는 이 말씀에 나오는 ‘정의와 공평 (justice and fairness)’라는 말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justice’는 옳고 그른 것을 가려서, 잘못한 것은 책망하고 옳은 것은 상을 주는 것입니다. ‘fairness’는 말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것입니다. 법의 적용도 공평하게 하고, 모든 사람에게 기회도 공평하게 돌아 가고, 수고한 사람들이 그만한 대가를 받는 것이 공평입니다. 공평은 평등하고 다릅니다. 피자 한 판이 있는데, 먹을 사람은 세 사람입니다. 1/3씩 먹으면 그것이 평등입니다. 공평은 배가 부른 사람은 좀 적게 먹고, 배가 많이 고픈 사람은 좀 많이 먹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평입니다. 다 똑 같이 배가 고프다면 1/3씩 먹는 것이 평등이고 동시에 공평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평등의 개념이 아니라 공평의 개념입니다. “All who believed were together and had all things in common. They sold their property and goods and distributed them to all, according to their need (믿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함께 쓰며,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눠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2:44-45) 이 말씀 속에 나와 있는 것이 공평의 개념입니다.
어떻게 이 ‘공평 (fairness)’의 개념을 세상에 실현하겠습니까? ‘공평’의 개념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정의와 공평’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의와 공평’이야말로 메시아의 통치를 받드는 2개의 기둥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의와 공평’을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공평’을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들을 서로 공유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 9: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The passionate commitment of the Lord of Heaven’s Armies will make this happen!”이라고 했습니다. NASB에는 “The zeal of the LORD Almighty will accomplish this”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평화를 이루는 일, 정의와 공평을 이루는 일을 열심을 가지고 이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 일을 혼자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사용하시고, 우리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이루는 일, 정의와 공평을 실천하는 일은 하나님의 열심에 동참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