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9/18/2016 | 앞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2
그가 네 길을 인도하신다. He Will Direct Your Paths.
잠언 3:1-6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불안을 ‘실존적 불안 (existential anxiety)"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자유와 책임 때문에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그 불안은 이런 것입니다. “지금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면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인가?” “지금 나의 결정은 최선의 결정인가?” “나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는가?” 어떻게 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불안은 이율배반적인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인생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 같은데, 오히려 그 자유가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정의 결과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철학자들의 주장에 동감(同感) 하시나요?
지금은 거의 모든 차에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모르는 길을 가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미국은 물론이고, 캐나다까지 모두 카버하기 때문에, 모르는 곳을 갈 때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더 안심이 됩니다. ‘Go Home’ 버튼만 누르면 집으로 가는 길을 모두 알려 줍니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내비게이션이 길을 수정해 줍니다. 내비게이션도 지금은 많이 성능이 좋아졌는데, 예전에는 에러가 많았습니다. 이에 따른 에피소드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뉴욕에 있는 작은 TV 방송국을 찾아 가는데, 처음 가는 길이라 조금 불안했습니다. 전 그 때 긴 다리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내비게이션으로 보면 거의 목적지에 다 온 것 같은데, 방송국 같은 건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직 다리 위였으니까요. “어? 뭔가 이상한데?” 했는데, 목적지에 나 왔다는 “You have reached your destination” 하는 거예요. 그 때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릅니다. 미국에 오래 살았는데도 보스턴에 오래 살다 보니까 뉴욕에 간다고 긴장되는 울렁증이 있는데, 그 때 제가 다리 위에서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또, 이 지역에 사시는 목사님 한 분은 밤 중에 내비게이션만 믿고 길을 나섰는데, 사방이 깜깜한 데다 눈이 많이 온 때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대로 가고 있었는데, 점점 인가가 없는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급기야 눈으로 꽉 막힌 막다른 길을 만나게 되어서 그 밤중에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되었는데, 일찍 떠나신 목사님이 오지 않아서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쪽 지리를 잘 아는 목사님이 잘 못 갔으니까 다시 돌아오라고 해도 차가 눈 속에 빠져서 꼼짝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가서 눈 속에 빠진 차를 꺼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목적지에 올 수가 있었습니다.
불행한 것은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인생의 길이 목적지를 향해 잘 가고 있는지, 잘못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헬리콥터 뷰 (Helicopter View)’라는 말이 있습니다. 헬리콥터를 타고 높이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한 눈에 다 보입니다. ‘헬리콥터 뷰’와 비슷한 말로 ‘버즈 아이 뷰 (Bird’s Eye View)’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시 새는 높이 날아 올라갈 수가 있으니까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 아래서 움직이는 것들이 모두 보입니다. 이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을 누가 좀 높은 곳에서 봐줬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잠언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잠언’이라는 말은 한자인데, ‘잠(箴)’ 자는 ‘바늘’ ‘꽂다’라는 뜻입니다. ‘언(言)’ 자는 ‘말씀’이라는 뜻이니까, ‘콕 집어서 해 주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말로 ‘훈계(訓戒)’ ‘교훈(敎訓)’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Proverbs’라고 하는데요. ‘속담’ ‘격언’이라는 뜻입니다. 속담은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짧은 말인데, 누가 말했는지 잘 모르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인생을 사는 지혜와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 ‘잠언’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 속에 수많은 잠언이 들어 있습니다. 그 많은 잠언들을 주로 솔로몬이라는 이스라엘의 왕이 남긴 것입니다. 오늘 읽은 잠언 3장에 나오는 잠언들도 솔로몬 왕이 남긴 것들입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3대 왕이었는데요. 여러가지 점에서 전무후무한 왕 이었습니다. 우선 그가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성경에 열왕기상, 하 두 책은 역대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역사가(歷史家)들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책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큰 지혜와 슬기로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는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동방의 그 어떤 사람의 지혜보다 컸으며, 이집트의 모든 백성의 지혜를 합한 것보다도 더 컸습니다. 솔로몬은 이 땅의 어느 누구보다도 지혜로워 솔로몬의 명성은 모든 나라에 널리 퍼졌습니다. 솔로몬 왕은 평생 동안, 지혜로운 가르침을 삼천 가지나 말했으며, 천 다섯 편이나 되는 노래를 지었습니다. 그는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돌담에서 자라는 우슬초에 이르기까지 온갖 식물과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해서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들이 솔로몬 왕의 지혜를 들으려고 몰려왔습니다.” (열왕기상 4:29-34)
솔로몬은 이렇게 많은 지혜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원없이 해 봤던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사치와 향락에도 빠져 봤고, 온갖 부귀영화도 누려 봤습니다. 날마다 귀족들을 궁으로 불러 화려한 파티도 열어봤습니다. 그가 원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권력도 손에 쥐었습니다. 이런 솔로몬이 ‘고백록’처럼 자신의 인생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 성경 ‘전도서’입니다. 그가 남긴 잠언도 그의 인생 후기에 남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젊었을 때 무슨 잠언이 나오겠어요? 인생을 살만큼 살고, 온갖 경험을 다 해보고, 인생에 대해 ‘Helicopter View’를 갖게 되고, ‘Bird’s Eye View’를 갖게 된 사람이 잠언을 남기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가 남긴 잠언들을 단순히 속담처럼 유익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그 속에 들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솔로몬의 ‘잠언’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먼저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하는 것은 그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에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런 말씀을 들어도 별로 놀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논하는 관점(觀點)이 비단 ‘잠언’의 말씀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내 가르침을 잊지 말고, 내 명령들을 네 마음에 소중히 간직하여라. 그렇게 하면, 너는 오래 살고, 성공하게 될 것이다.” (잠언 3:1-2) 이 말씀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하신 말씀을 한번 비교해 보세요.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7절)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마음에 간직하고, 그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며 사는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Store my commands in your heart. If you do this, your life will be satisfying.” (New Living Translation) NIV 성경에는 “They will bring you prosperity”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they’는 마음 속에 간직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음 속에 store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성공과 번영을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후에 ‘안녕하세요’에서도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사람을 사람답게 키워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금수저’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 잘 만나서 좋은 환경 물려 받는 사람이고, ‘흙수저’는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나는 흙수저 물고 태어났으니까.....” 하는 패배주의가 청년들 사이에 퍼져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너는 성실과 사랑을 절대 버리지 말고, 그것을 네 목에 걸고, 네 마음 판에 잘 새겨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칭찬을 받을 것이다.” (3-4절) 저는 이 말씀 읽으면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기록한 성경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2:52) 문제는 솔로몬이 말하는 ‘성실’과 ‘사랑’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이것을 ‘loyalty and kindness’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NIV 성경에는 이 말이 ‘love and faithfulness’라고 나와 있습니다. NASB에는 ‘kindness and truth’라고 나와있고요. 하나 더, NKJV에는 ‘mercy and truth’라고 나와 있습니다. 왜 이렇게 조금씩 다른 다양한 번역을 했을까요? 구약성경이 원래 히브리말로 씌어졌습니다. 신약성경은 코이네 그릭 (Koine Greek), 고대 그리스 말로 기록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언어가 사멸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사용된 ‘성실과 사랑’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헤세드’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다양한 번역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헤세드’라는 말에는 아주 풍부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 있다면 바로 이 ‘헤세드’라는 말일 것입니다.
좀 설명이 길어졌습니다만, 지금 솔로몬이 말하고 있는 것은 ‘헤세드’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 인생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favor를 받는 축복된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느냐,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 ‘헤세드’를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솔로몬이 ‘Bird’s Eye view’를 가지고 충고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5절과 6절에 나와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절대로 네 자신을 의지하지 마라. 너는 네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여라. 그리하면, 그분이 너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솔로몬은 많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사람은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의지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니까 자연히 자기 자신을 의지하게 됩니다. 솔로몬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많은 실수를 하게 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쓸데 없는 건축과 토목 공사를 하게 되고, 공사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많은 세금을 거두게 됩니다. 이 모두가 자기 자신을 믿은 결과였습니다.
솔로몬이 하는 말입니다. “네 자신을 의지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훨씬 낫다!” 더 나가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라!” 지금 우리는 정말 세상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엄청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인생에 대한 ‘Helicopter View’를 가진 솔로몬이 하는 말입니다. “아니, 네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세요. 그게 백 번 낫습니다.”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do not depend on your own understanding”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말한 다른 잠언들을 볼까요? “사람이 제비를 뽑지만, 그 결정은 여호와께서 하신다.” (잠언 16:33) 제비를 뽑는다니까 자기 손으로 뽑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뽑는 일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사위 (dice)를 던집니다. 떼굴떼굴 구르다가 멈춥니다. 몇 번이 나왔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됩니다. “We may throw the dice, but the Lord determines how they fall.”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간단 하잖아요? 그 주사위가 어떻게 몇 번을 굴러서 어떻게 뒤집어질지 그것을 결정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잖아요?
요즘 성경 말씀을 읽는데, 자꾸 눈에 들어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말씀입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이 앞 길을 인도했고, 밤에는 불기둥이 인도했습니다. 광야에서는 방향을 알 수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말씀이 출애굽기에도 나와 있고, 민수기에도 나와 있고, 신명기에도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방향을 결정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방향을 결정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들이 그렇게 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 곳이 ‘광야 (wilderness)’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광야가 아니었더라면 자기들이 방향을 결정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너희들의 방향은 내가 결정한다.” 이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 몰라요. “지금은 광야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지금 우리는 광야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의 이기가 이렇게 발달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인간이 축적한 정보의 양은 엄청나게 많고, 인간의 지식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는 21세기의 광야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방향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앞길이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청년들의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 자리가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감이 빠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기술이 있는 사람도, 날고 기는 사람도, 광야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수 밖에, 다른 옵션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광야를 걷고 있습니다. 광야를 걷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다른 옵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다시 오늘 잠언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개역성경)
9/11/2016 |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1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God Is My Strength.
시편 18:1-6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 있다면, 다윗 (David)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은 유일하게 그를 가리켜 “그 사람은 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를 통해 나의 뜻을 이룰 것이다 (a man after my own heart. He will do everything I want him to do., 사도행전 13:2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꼭 그렇게 한 사람을 지적해서 그 사람은 내 마음에 든다고 한 사람은 다윗이 유일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들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들도 다윗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습니다.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 (Uriah the Hittite)의 일 외에는 그의 평생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열왕기상 15:5)
재미 있는 것은, 이 다윗이 예수님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고향이 베들레헴으로 같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예수님은 다윗 가문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다윗은 사람에 대한 미움이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잘 해 주는 사람에게 호감이 가고, 자기에게 잘 못해 주는 사람은 미워하기 마련인데, 다윗도 그렇고, 예수님도 그렇고 사람에 대한 미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33년을 사셨습니다. 다윗이 왕 위에 앉아 통일 이스라엘을 통치한 기간도 33년입니다 (왕상 2:11, 역대상 29:27). 예수님에게는 12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도 30명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다윗의 생애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윗을 그렇게 미워하고, 죽이려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사울이라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습니다. 사울은 언제부터인지 자기의 부하 다윗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울은 다윗이 자기의 왕위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이기 시작하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한번은 자기를 위해서 수금 (harp)을 연주하는 다윗을 향하여 창을 던졌습니다. 그 창이 다윗을 스치면서 벽에 박힙니다 (사무엘상 19:10). 다윗은 간신히 목숨을 구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울은 그의 군대를 풀어서 다윗을 잡으려고 산을 겹겹이 포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의 마음에는 사울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다윗은 사울에 대한 미움이 들 때마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이다 (사무엘상 24:6)” 이런 생각을 하면서 미움을 이겨냈습니다. 그런 생명의 위기 속에서 다윗이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기도를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편입니다. 구약의 시편들은 거의 다윗이 쓴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시편들은 다윗의 생애 중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로마서 5:3-5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절대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중요한 단어들을 뽑아 보세요. ‘problems and trials (환난)’이 ‘endurance (인내)’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면, ‘endurance’가 또 ‘strength of character (강인한 품성)’를 만들어냅니다. ‘strength of character’가 또 ‘hope of salvation (구원의 희망)’을 만들어냅니다. 이 희망을 가진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크리스천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듣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환난은 결코 그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를 통해서 크리스천의 강인한 성품이 길러지고, 이런 성품을 가진 사람에게 구원의 희망이 주어집니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환난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시기 위한 선물입니다. 환난이 없으면 구원의 희망도 없습니다.
오늘 저는 시편 18편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은 새 학기가 되어서 보스턴에 꿈을 안고 찾아 오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제가 1983년 12월에 캘리포니아 부엔나 팍 (Buena Park)에 제 아내와 함께 도착했습니다. 그 때 저는 정말 어리 버리 했습니다. 미국 생활에 조금 적응하면서 토플 시험을 준비해서 Claremont 신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미국은 신학교가 대학원 과정입니다. 거기서 한 2년을 공부하고, 1986년에 보스턴 신학교로 transfer를 해서 왔습니다. Los Ange-les에서 대륙 횡단을 하여 보스턴으로 들어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흘렀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90번 Mass Pike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보스턴에 거의 다 들어 왔는데, 왜 그렇게 마음이 무거운지, 오른 쪽으로 맥도날드 사인이 크게 보였습니다. 그곳에 들어가서 별로 마시고 싶지도 않은 커피를 마시면서 불안한 마음을 달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마도 보스턴에 새로 온 학생들에게 30년 전에 제가 가지고 있었던 그 불안한 마음이 아직 있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이곳에서 survive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학교 공부는 제대로 따라 갈 수 있을까?” “adviser 교수님은 어떤 분일까? 좋은 분일까?” “무사히 학위 과정을 마칠 수 있을까?” “보스턴의 겨울을 춥고 눈이 많이 온다는데, 잘 지낼 수 있을까?” “보스턴은 생활비도 많이 든다는데?” “여기 교회는 또 어떤 교회일까?” “여기서도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까?” 이런 불안감들이 여러분에게 있을 줄 압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오늘 읽은 시편 18편 말씀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 psalm of David, the servant of the LORD. He sang this song to the LORD on the day the LORD rescued him from all his enemies and from Saul (주님의 종 다윗이 쓴 시편. 그는 주께서 그를 그의 적들과 사울로부터 구해 주셨을 때 이 노래를 주님께 불렀다).”
이 시편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다윗이 놓여 있었던 상황을 한번 보시지요. “죽음의 줄이 나를 묶고, 멸망의 물살이 나를 덮쳤습니다. 무덤의 줄이 나를 묶고, 죽음의 덫이 나를 덮었습니다.” (4-5절) 이 구절 속에 나오는 단어들을 보세요. ‘죽음’ ‘멸망 (destruction)’ ‘무덤 (grave)’ ‘덫 (trap)’ 이런 극단적인 단어들이 연이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죽음과 멸망과 무덤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 처럼 나를 밧줄 (rope)로 꽁꽁 묶어서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는 길에는 ‘덫’이 놓여 있습니다. 한 발짝만 잘못 디디면 ‘덫’이 내 발목을 칠 것입니다.
이정재와 리암 니슨 (Liam John Neeson)이 출연한 인천 상륙 작전 영화를 보셨나요? 맥아더 장군은 성공 확률 1/5000이라는 인천 월미도로 상륙작전 (Operation Chromite)을 감행합니다. 그런데, 그곳을 이미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은 연합군이 상륙할 것을 예상하고 그곳에 기뢰 (機雷, naval mine)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멋 모르고 상륙 했다가는 연합군은 전멸하고 말 것입니다. 맥아더가 이 정보를 입수하고 특공대를 먼저 들여 보냅니다. 어디에다 기뢰를 설치해 놓았는지 지도를 찾아 오라고 특명을 내립니다. 그 지도를 손에 넣기 전에는 연합군은 상륙을 할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뢰가 촘촘히 깔려 있는 어두운 바다를, 어떻게 뚫고 상륙을 합니까? 특공대가 들어가서 기뢰가 모두 제거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오기 전에는, 맥아더 장군이라도 꼼꼼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능력을 믿습니까? 크리스천들은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당황합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는다고 대답하면 “그러면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고 질문을 받을 것이 뻔하고, 그렇다고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어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당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그 시간에 뭔가 도움을 구하고 방법을 찾아 봐야지 기도만 한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크리스천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야말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소통(疏通)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말씀 드릴 수가 있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신약성경 빌립보서 4:6-7에 기도에 대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Then you will experience God's peace, which exceeds anything we can understand. His peace will guard your hearts and minds as you live in Christ Jesus.”
저는 이 말씀이 기도의 응답에 대한 최선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급하게 무슨 기도를 하면 “옛다 여기 있다” 하고 문제에 대한 대답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그 소통의 창구를 통해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일들에 대하여 감사 드리고,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말씀 드리면, 이 세상 무엇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내 마음을 채웁니다. 그리고, 그 평화가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줍니다. 지금까지 나를 그렇게 꼼짝 못하게 얽어 매고 있던 불안한 마음이 어느 새 물러가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평화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다 믿음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나는 지금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같이 계신다는 믿음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죽음’ ‘멸망 (destruction)’ ‘무덤 (grave)’ ‘덫 (trap)’에 걸려 꼼짝 할 수 없었던 다윗이, 그런 상황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6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고통 중에 내가 여호와를 불렀고, 나의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내 목소리를 들으셨고, 울부짖는 내 외침이 그의 귀에 들렸습니다.” “But in my distress I cried out to the LORD; yes, I prayed to my God for help. He heard me from his sanctuary; my cry to him reached his ears.”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구나!” 이란 절망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부르짖는다’는 말은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기도는 어디서든지 할 수 있습니다. 손발이 다 묶여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기도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의 앞 길에 환난이 많을 것입니다. 절망할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보스턴에 와 보면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널려 있습니다. 나보다 더 실력 있고, 나보다 더 연주 잘 하는 사람들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질 수도 있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야말로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해야 하는 때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화가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줍니다. 기도하면 불안한 마음이 물러가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평화가 들어 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이니까 바울 vers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다윗의 version으로 한번 들어 보실까요? “여호와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은 피할 바위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방패, 구원하시는 뿔, 나의 산성이십니다.” (2절)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반석 (rock) ‘요새 (fortress)’ ‘구원자 (savior)’ ‘방패 (shield)' ‘뿔 (power)' ‘산성 (place of safety)’이라고 고백합니다. 기도하면, 이 하나님께서 나의 도움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인생의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보스턴에 공부하러 온 사람들은 학교에서 세계 최고의 학문을 배우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축복을 받으라고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이라야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 (instrument)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는 목적입니다. 학위를 받아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성공을 위한 도구가 될 뿐입니다. 학위 받아서 잘 먹고 잘 살자는 것 밖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반석, 요새, 구원자, 방패, 뿔, 산성이라고요?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화가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고요? 이 사실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 되시고, 요새가 되시고, 나의 구원자가 되시고, 나의 힘이 되시고, 나의 산성이 되십니다. 오늘 말씀이 보스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9/4/2016 | 마가복음 강해설교 52
내 이름 때문에 On Account Of My Name
마가복음 13:1-13
오늘 읽은 마가복음 13장의 말씀은 제자들이 성전의 돌을 보면서 “선생님, 이 돌들 좀 보세요! 정말 아름다운 돌이지요? 정말 아름다운 건물이지요?” 하면서 감탄하는 말로 시작됩니다. 지금 제자들이 보고 있는 것은 헤롯 성전입니다. 헤롯이 왕이 되면서 자신의 업적을 남기려고, 엄청난 성전 확장 공사를 벌였습니다. 이 공사는 무려 80여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계속 공사 중이었습니다. 갈릴리 시골 출신 제자들은 성전의 규모와 아름다움에 압도되었을 것입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처음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을 때는 목재는 최고급 나무인 레바논의 백향목 (cedar timber)을 썼고, 돌은 두로 (Tyre)에서 가져 왔습니다. 두로 왕 히람 (Hiram)은 목수와 석수 (stonemasons)를 파견해서 성전 건축을 후원했습니다 (역대상 14:1). 시돈 (Sidon) 사람들은 나무를 잘 다루기로 유명했고 (열왕기상 5:6), 두로 사람들은 돌을 잘 다루기로 유명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그 후에 파괴되었지만, 헤롯 왕은 역대 어느 성전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지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단순히 성경 지식을 갖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우리의 관점 (point of view)을 성경의 관점으로, 우리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는 것이 목적입니다. 여러분, 고린도후서 5: 16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 (a human point of view)으로 알지 않겠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자신의 관점이 세상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t one time we thought of Christ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How differently we know him now!” 우리의 관점을 ‘a human point of view’에서 ‘God’s point of view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 하잖아요? 예수님을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습니다. 보세요. 예수님이 돈이 많습니까? 예수님이 좋은 학교를 나왔습니까? 예수님의 출신 배경이 좋습니까? 예수님이 무슨 업적을 남긴 것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렇습니다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달라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마련하신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는 같은 말씀을 사무엘상 16:7에 “내가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같지 않다. 사람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여호와는 마음을 본다”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 위에서 내려 오게 하고, 베들레헴의 이새 (Jesse )의 아들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들을 모두 불렀습니다. 그러나, 어떤 아들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할지는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들이 인물도 잘 나고, 키도 큰 것을 보면서 만족해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Don't judge by his appear-ance or height. The LORD doesn't see things the way you see them. People judge by outward appear-ance, but the LORD looks at the heart." 사람들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과 하나님께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이렇게 다릅니다.
제자들이 성전 규모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압도 되었습니다. 성전 벽을 장식하고 있는 돌에 새겨 있는 아름다운 문양들은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겉모습과 외모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보시지 않습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 하시는 지요. “(너희는) 이 큰 건물의 웅장함을 보느냐? 너희는 이 돌들의 화려함을 보느냐? 너희가 보는 이 성전 건물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2절) 예수님께서 그냥 해 보신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고 감탄하지만,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일들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성전은 ‘강도들의 소굴 (a den of thieves)’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으로, 성전의 기능을 상실한 성전을 심판하셨습니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로마 사람들을 불러서 성전을 철저하게 파괴하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을 성전 파괴의 도구(道具)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때가 서기 70년이었습니다. 유대민족의 독립운동을 제압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베스파시아누스 (Vespasianus, 9-79 A.D.) 장군의 지휘 아래, 그 아들 티투스 (Titus)에게 예루살렘은 점령 당하고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의 9대 황제가 되고, 아들 티투스 (Titus)는 10대 황제가 됩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성전이 파괴된다는 말을 들은 제자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언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이런 일들이 이루어질 때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4절)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즉답을 하시지 않고, 마지막 심판의 때에 대한 징조를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서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사람들을 속이는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전쟁이 대한 소문이 파다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민족 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저기서 지진과 기근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믿는 사람들은 법정에 서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법정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 때가 되면 믿는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형이 동생을 죽게 내주고, 아버지가 자식들을 내주고, 자식들이 부모를 거역하여 일어나며, 죽게 하는 끔찍한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을 종합해 보면,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큰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라는 말은 ‘on account of Jesus’ name’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뭔가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무슨 혐의를 뒤집어 쓴다든지, 억울한 누명을 쓴다든지 한다는 것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이 말이 ‘because you are my followers (너희가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참 이상 하지요? 성경에 보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영광을 받는다는 말씀은 거의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이라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나에게 속하였음으로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요한복음 15:18-19)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어저께 새벽 기도 말씀에도 그런 말씀이 나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도록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손에 칼과 몽둥이를 들고 유다를 앞장 세우고 예수님이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왔습니다 (마가복음 14:43).” 대제사장과 율법학자와 장로들이 누구입니까? 그 당시 유대 사회를 움직이던 권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손에 죽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이처럼 미워했을까요? 이 사람들이 추구했던 가치와 예수님께서 추구했던 가치가 달랐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적인 관점을 가지고 자기들에게 이익이 될 것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셨습니다. 서로 추구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서로 부딪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워한 것입니다. 지금 브라질은 지우마 호세프 (Dilma Vana Rousseff, 1947)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고 호세프는 대통령 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저는 호세프라는 사람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누군지 잘 몰랐습니다. 알고 봤더니,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는 군사 독재에 항거하는 반정부 게릴라 투쟁에 참가했던 특이한 전력을 가진 사람이더라고요. 이런 전력을 가지고 대통령이 되었으니 얼마나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겠습니까? 개인의 비리 때문이 아니라 경제 적자를 숨기기 위해 장부를 조작했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호세프를 탄핵하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 부정부패에 연루된 전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뉴스 보도가 있었습니다. 브라질은 지금 호세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시위가 이어지면서 정국이 극심한 혼란에 빠지고 있다고 합니다.
‘on account of Jesus’ name’이라는 말이 오늘 읽은 말씀 중에 9절과 13절에 두 번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말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관점을 우리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God’s point of view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까? 한번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 보세요.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막는다. 너희가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마태복음 23:13) 또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율법학자들을 책망하셨습니까?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가로챘다. 그러면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도 막았다.” (누가복음 11:52) “너희는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면서, 너희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 (누가복음 11:46) 예수님 외에 아무도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지적한 사람이 없었고,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지적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보니까 다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관점’을 가지고 살면 세상에 나가서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고 부딪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살면, 세상에서 미움을 받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 나오는 ‘on account of Jesus’ name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이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면 오히려 갈등이 더 생기고, 전에 없던 걱정거리도 더 생깁니다. 정말 그런가요? 새벽 기도에서 야고보서 말씀을 읽고 있는데요. 제가 한 말씀을 말씀 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4:9 말씀입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왜 웃음을 애통으로 바꿉니까? 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꿉니까? 뭔가 말씀이 좀 잘못된 것처럼 보입니다. 관점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즐겁고, 웃음이 나는 일들이,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보면, 그것이 웃을 일이 아니라 슬퍼할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관점을 바꾸면, 전에는 즐거웠던 일들이 근심거리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일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과거에 가지고 있던 ‘세상적인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뉴욕에 계신 목사님 중에 김천표 목사라는 분이 있는데요. 이 분이 골프를 얼마나 잘 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프로 골퍼들이 와서 레슨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teaching pro’라고 하는데요, 같은 ‘teaching pro’라도 급이 다르다고 하네요. 이 분의 말이, 골프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골프 웬만큼 치는 사람들의 자세 (form)를 교정해 주는 것보다 훨씬 쉽다고 합니다. 웬만큼 치는 사람은 예전에 가지고 있던 잘못된 자세가 자꾸 나오기 때문에, 자세를 교정하기가 참 어렵답니다. 이 분의 얘기는 자기가 잡아 주는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기계처럼 훈련을 하면 누구나 골프를 잘 칠 수 있다고 하네요.
우리 믿음생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과거에 가지고 있던 잘못된 자세, ‘세상적인 관점’을 버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버려야지 하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그냥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on account of Jesus’ name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손해 보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웃을 때 같이 웃고,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할 때 같이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on account of Jesus’ name)’ 이 말씀이 여러분의 믿음생활의 자세를 바로 잡아 주는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의 믿음 생활의 ‘키워드 (keyword)’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8/28/2016 | 마가복음 강해설교 51
주님이 보시는 헌금 How The Lord Counts Our Offering
마가복음 12:41-44
강해설교를 하다 보면 가끔은 피해가고 싶은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좀 피해가고 싶은 말씀입니다. 헌금에 대한 말씀이거든요. 여러분이 헌금에 대하여 서로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고, 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 헌금을 하면 (죄송합니다만,) 목사가 다 가지고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어렸을 때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성장해서 어른이 되어서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생각했던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마음을 열고 한번 성경 말씀을 그대로 들어 보시지요. 제일 먼저 나누고 싶은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에도 재정 (돈)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신기하지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무슨 돈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모두 13명이었습니다. 건장한 30대 혹은 40대 남자들 13명이 한 팀으로 움직였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제자들이 점심을 준비하지 않은 것을 걱정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6:7). 또 요한복음에 보면, 점심 때가 되어서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우물 가에 잠깐 계시게 하고, 마을로 먹을 것을 사러 들어가는 장면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4:8). 이 말씀이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He was alone at the time because his disciples had gone into the village to buy some food.” 당연합니다. 먹을 것을 사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누가복음 8장에 예수님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던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은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 헤롯의 신하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여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재산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누가복음 8:2-3) “They were contributing their own resources to support Jesus and his disciples.” (new Living Transla-tion)
성령강림절 후에 예루살렘에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그 수가 3,000명에서 4,000명으로 급속도로 불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다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재산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2:44-45). “이 사람들은 다 한마음과 한 정신으로,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썼습니다.” (사도행전 4:32) 놀라운 것은 이런 일들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voluntarily or willingly)’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의 반대말은 ‘억지로’ 혹은 ‘마지못해서’입니다.
‘자발적으로’라는 말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헌금을 포함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자발적으로’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이 하는 봉사도 억지로 하는 봉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 떼를 잘 돌보십시오. 기쁨으로 그들을 돌보며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섬기며, 자기에게 돌아 올 이익을 생각하고 그 일을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베드로전서 5:2) 예배도 그렇습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분의 성문으로 들어가십시오. 찬양을 드리면서 그분의 뜰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분에게 감사하고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십시오.” (시편 100:4) 그분의 ‘뜰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Go into his courts with thanksgiving and praising”입니다. ‘his courts’는 성전을 말합니다.
헌금에 대해서 좀 더 중요한 말씀으로 들어갑니다. 무슨 모임이든지 그 모임을 유지하려면 회비를 내야 합니다. 무슨 친목을 위한 모임에도 회비가 있고, 동창회도 회비가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한 달에 한번씩 모이는 모임이 있는데 거기도 회비를 내야 합니다. 목사님들 가정에 경조사가 있으면 작지만 선물 해서 성의를 표시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에 내는 헌금은 좀 달라요. 이 헌금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내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교회 건물이 낡아서 수리를 한다든지, 지금 교회 밴 한 대가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네요. 그것을 바꾸려면 돈이 들어갑니다.
비록 우리가 내는 헌금의 일부가 교회를 유지하는 데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내는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 헌금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저 자신도 그래야 하지만, 교회 내에 리더십을 가진 분들은 항상 이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내는 헌금을 다른 일에 유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가끔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교회 헌금을 개인적인 목적으로 빼돌렸다고요?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정말 이런 일이 있다면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 제정은 늘 투명해야 합니다. 뭘 어떻게 썼는지 투명하게 교인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어저께 새벽 기도를 드리면서 말씀 드렸습니다. 새벽 기도 오기 전부터 자꾸 제 마음 속에 “하나님이 꼭 계셔야 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착한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나 나쁜 사람들이 많습니까? 이렇게 살든지 저렇게 살든지 죽으면 그만이라고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동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 (image of God)’ 가지고 태어납니다. 오직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이고,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선한 삶을 살아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드린 성도들의 헌금을 잘못 사용하는 일이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오늘 읽은 말씀은 성전의 ‘아름다운 문 (The Gate Beautiful)’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방인의 뜰 (the court of the Gentiles)’과 ‘여자들의 뜰 (the court of the women)’ 사이에 있는 문을 ‘아름다운 문’이라고 합니다. 이 문이 아름답게 장식이 되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습니다. 성전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문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서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안 쪽에 13개의 놋쇠로 만은 헌금함이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기록을 찾아 봤더니, 이 헌금함의 모양이 꼭 나팔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thirteen trumpet-shaped brazen chests’라고 했는데, 왜 하필이면 나팔 모양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어 표현에 ‘blow own trumpet’ 그러면 자기가 한 일을 여기저기 나팔 불고 다니는 것을 말하잖하요? 사람들은 ‘아름다운 문’을 지나면서 이 헌금함에 헌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맞은 편에 앉아서 유심히 보셨습니다. 부자들이 많은 돈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부자들은 옷차림부터 달랐습니다. 이 부자들이 자랑스럽게 자신의 부를 과시하면서 헌금을 했습니다. 그래서, 헌금함이 나팔 모양으로 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옷차림이 남루한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 과부가 헌금한 것은 렙돈 동전 2개였습니다. ‘렙돈 동전 2개’는 1 페니도 안 되는 작은 돈입니다. NIV 성경에는 이 돈을 ‘two very small copper coins, worth only a fraction of a penny (1페니도 안 되는 아주 작은 동전 2개)’라고 했습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과부는 정말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존재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나오미가 그렇잖아요? 남편이 죽고, 아들도 죽고, 이방인 며느리 룻이 어머니를 섬깁니다. 추수 때 남의 밭에 가서 추수하고 나면 땅에 떨어진 것들을 보자기에 주워 담습니다. 그걸 가지고 와서 시어머니 밥을 해서 드립니다. 추수 때는 그렇게 해서라도 연명한다고 하지만, 겨울이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렇게 불쌍한 것이 성경에 나오는 과부입니다. 이 불쌍한 과부가 렙돈 동전 2개를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속에 자랑스럽게 많은 돈을 헌금한 부자들과 1페니도 안 되는 작은 돈을 헌금한 한 과부가 드라마틱하게 대조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돈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합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셨고, 가난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 부자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그 당시 그 사회의 지도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부자들을 꼭 selfish한 사람들이라고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만,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선을 베풀 때, 위선자들처럼 네 앞에 나팔을 불지 마라.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이나 길에서 나팔을 분다.” (마태복음 6:2) 이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자선사업에 기부했습니다. 그런데, 꼭 자선을 베풀 때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모두 나팔 소리 나는 곳을 바라 봅니다. “자, 여기들 보세요. ㅇㅇㅇ씨가 이 많은 돈을 자선사업에 기부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부금을 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별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을 그렇게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도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사람들이 박수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셨다면, 오늘 말씀에 가난한 과부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람을 보셨다면, 오늘 우리도 그런 시각으로 사람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도 그런 시각으로 사람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는 헌금에도 두 가지 형태의 헌금이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의 일부를 내면서도 생색을 내는 헌금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헌금을 하였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넉넉한 중에서 헌금을 하였지만, 과부는 가지고 있던 모든 것, 즉 생활에 필요한 돈 전부를 바쳤다.” (43-44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위에서 말씀 드렸지만, 이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것은 1페니도 안 되는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과부는 부자들이 헌금한 것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헌금을 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화면을 한번 보세요. Stevie Wills 라는 사람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How can this be? How can a penny be more than $100? How can the widow’s gift be the one that Jesus finds the most beautiful? It’s because the widow gave gener-ously and with a pure heart. People might look at how much money rich people give. But God ca,res more about HOW we give than HOW MUCH we give. God knows what we are thinking and feeling when we give. If we are giving to impress people, He knows it. If we are giving because we love God and love others, He knows that, too.”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어떻게 1페니가 100달러보다 많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 과부의 헌금이 예수님께서 발견하신 가장 아름다운 헌금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이 과부가 너그러운 마음과 순수한 마음으로 헌금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부자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헌금 했는지를 보겠지만,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돈을 헌금했는가 보다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헌금하는지를 보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헌금할 때 무슨 생각을 하고, 또 어떤 감정을 가지고 하는지를 아신다. 우리가 헌금할 때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그것을 아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금한다면, 하나님은 그것 역시 아신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과부의 헌금을 헌금 생활의 ‘example’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과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자기가 가진 것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헌금한 것이, 헌금 생활의 ‘example’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훗날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을 알고 계신가요? 저는 바울이 헌금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것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버전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 자기가 마음에 결정한 대로 내고, 내키지 않는 마음이나 억지로는 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흔쾌히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고린도후서 9:7)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ou must each decide in your heart how much to give. And don’t give reluc-tantly or in response to pressure. For God loves a person who gives cheerfully.” 헌금생활의 키워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억지로 내지 말고’ ‘부담을 갖지 말고’ ‘마음에 결정한대로’ ‘기쁨으로’ 이런 것들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헌금생활 하기 위해서, 헌금을 새 돈으로 준비했습니다. 새 돈을 보면 ‘이 돈은 헌금할 돈이야!’ 하고 따로 빼 놓았습니다. 그리고, 즉석에서 헌금을 결정하지 않고, 미리 미리 준비해서 성경 갈피에 꽂아 두었습니다. 선조들에게서 헌금생활의 지혜가 엿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example’로 보여 주신 그 마음을 가지고 헌금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신실하고 정직하게 헌금을 사용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헌금 생활의 의미와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 시켜 주는 말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8/21/2016 | 마가복음 강해설교 50
즐겁게 말씀을 듣는 사람들 Those Who Are Listening to Him with Great Delight
마가복음 12:35-40
예수님의 생애는 사생활 (the private life)과 공생애 (the public life)로 나눌 수 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예수님의 생애를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시절에 예수님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서른 살 이후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삼 년간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서는 네 복음서에 비교적 상세하게 잘 나와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마태복음 4:23, “Jesus went throughout Galilee,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preaching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and healing every disease and sickness among the people”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가르치는 사역 (teaching ministry), 설교 (혹은 선포) 사역 (preaching ministry), 치유 사역 (healing ministry), 이 세 가지로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알기 쉽게 잘 정리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치는 사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떤 점에서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과 달랐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이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어째서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35절) 여러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동방박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탄생한 아기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그 아기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시민들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이 헤롯 왕에게 들어갔습니다. 헤롯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불러 모으고,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베들레헴이란 마을입니다. 예언자들의 기록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미가 선지자 (미가 5:2), 이사야 선지자가 모두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 (이사야 11:1)으로 온다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들의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가장 강렬했던 때였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모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여리고 (Jericho)에 살고 있던 바디매오 (Bartimaeus)라는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람은 “A blind beggar named Bartimaeus, the son of Timaeus (디매오의 아들 소경 거지 바디매오)”였습니다. 이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향하여 "Jesus, Son of David, have mercy on me!" 하고 소리 지르지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예수님 당시에 율법학자들과 같은 지도자들이나,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나, 바디매오와 같은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나 모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어째서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질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당신들 아무 생각 없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치는데, 이런 성경 말씀을 읽어 보았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시편 110:1 말씀을 한번 보시죠. “For David himself, speaking under the inspiration of the Holy Spirit, said, `The LORD said to my Lord, Sit in the place of honor at my right hand until I humble your enemies beneath your feet.' Since David himself called the Messiah `my Lord,' how can the Messiah be his son?" (다윗 자신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나의 주님께 내가 너의 발 아래 너의 원수를 굴복 시킬 때까지 이리 와서 나의 오른편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아라.’ 그러면 다윗 자신이 메시아를 가리켜 나의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그의 아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베들레헴 다윗의 고향에서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셨는데,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당연히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인간적인 관점 (a human point of view)에서 본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정리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은 인간의 족보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로마서 1:3-4)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맞지 않습니다.
한번 정리를 해 볼까요? 예수님의 teaching은 전통이나 관습,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임에도 불구하고 시편 말씀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말씀을 전체적으로 보시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teaching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똑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은 당시의 사람들이 얽매여 있던 안식일 법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하셨습니다. 이 새로운 해석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보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율법 조항에 매여 있을 때에, 예수님은 비록 안식일이라도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 보시죠.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마가복음 3: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es the law permit good deeds on the Sab-bath, or is it a day for doing evil? Is this a day to save life or to destroy it (율법은 안식일에 선한 행위를 하도록 허용하고 있느냐? 아니면 악한 일을 하도록 하고 있느냐? 안식일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날이냐? 아니면 생명을 파괴하기 위한 날이냐)?"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아세요?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명쾌한 말씀에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But they remained silent).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teaching에 대한 그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주의 깊게 읽어 보았습니다. 마가복음에 이렇게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것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분처럼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22)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people were amazed at his teaching, for he taught with real authority-- quite unlike the teachers of religious law.”
이 말씀에서 주의 깊게 읽어야 할 것은 예수님의 교훈은 율법학자들의 교훈과 달랐다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의 교훈에서 볼 수 없었던 권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입는 옷도 보통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나오지 않습니까? “이들은 긴 옷을 입고 걸어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 이들은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도 윗자리를 좋아한다. 이들은 과부의 집을 삼키며,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길게 기도한다.” (38-40절) 간단히 말하면, 율법학자들의 권위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권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오는 권위는 ‘real authority (진정한 권위)’였다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지금은 연세가 많으셔서 글씨 쓰는 일을 그만 두셨지만, 한동안 붓글씨에 심취 하셨습니다. 예전에 서당 교육을 받으셨으니까 붓글씨 기본이 되어 있긴 하셨는데, 은퇴하신 후에 뉘늦게 붓글씨에 심취하셨습니다. 붓글씨 대회에 나가셔서 입상하신 경력도 있으십니다. 저에게도 친히 쓰신 글을 몇 점 주셨습니다. 그 중에 ‘진광불휘(眞光不輝)’라는 글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진짜 빛은 찬란하지 않다’ 이런 뜻입니다. 공자의 말입니다. 가짜는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서 화려하게 치장을 합니다. 그러나, 진짜는 화려하게 치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빛은 나지 않지만 진짜입니다. 율법학자들의 권위는 사람들이 만든 인위적인 권위였습니다. 진짜 권위처럼 보이기 위해서 긴 옷을 입습니다. 어디 가면 윗자리에 앉습니다. 기도 할 때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길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참된 권위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 속에 들어 있는 참 권위를 발견했습니다.
또 마가복음 1:27에는 사람들의 이런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가 있는 새로운 교훈이다. 더러운 귀신들도 저 분의 명령에 복종하는구나!” (마가복음 1:27)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hat sort of new teaching is this? It has such authority! Even evil spirits obey his orders!” 그동안 율법학자들이 가르치는 판에 박은 듯한 교훈만 들어왔는데, 예수님의 교훈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new teaching with authority (권위 있는 새로운 교훈)’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말씀에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나와 있습니다. “The large crowd listened to him with great delight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즐겁게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이 사람들이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즐거워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entertainment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즐거워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감추어진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아하, 그리스도,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긴 하지만,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다윗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를 ‘주님 (Lord)’ 이라고 불렀구나!” 이런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사람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도 작은 나라이지만, 이스라엘은 더 작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면적이 큰 나라는 러시아이고요. 캐나다, 중국, 미국 브라질 순입니다. 우리나라는 100,210km2로 107위입니다. 북한은 우리나라보다 조금 큽니다. 이스라엘은 20,770km2로 149위입니다. 우리나라 면적의 1/5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삽시간에 온 나라에 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는 이른 새벽부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 말씀이 요한복음 8:2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성전 뜰로 가셨습니다. 온 백성이 그분 주변에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But early the next morning Jesus was back again at the Temple. A crowd soon gathered, and he sat down and taught them.” (NLT) “At dawn Jesus appeared again in the temple courts, where all the people gathered around him, and he sat down to teach them. (NIV)
1세기에,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열광했습니다. 이른 아침도 마다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빈 들, 광야도 마다하지 않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성경의 기록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5:32).
그 때, 그 사람들은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들은 여러가지 일로 분주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다양해졌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즐거움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진리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즐거움을 잃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너무 많은 일 때문에 걱정하며 안절부절하는 구나. 그러나 필요한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누가복음 10:41-42) 우리의 삶에 절대적으로 ‘오직 필요한 한가지 일 (only one thing worth)’ 이것이 무엇일까요? 이 말씀 뒤에 마리아의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한가지 일’은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인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을 대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바꾸어 보십시오. 이 책 속에 온갖 지루한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 속에 내가 다 아는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 속에 나와 아무 상관 없는 것들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저에게 성경은 무슨 책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사람답게,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성경 속에 여러분의 삶을 가치 있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길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즐거움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회복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