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3/2016 | 마가복음 강해설교 53

항상 깨어 있으라! Be On The Alert!

마가복음 13:32-37

성경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기독교 역사 이래 많은 크리스천들이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 ‘그 날’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주님께서 “무화과나무로 부터 교훈을 배워라.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새 잎을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안다. 이처럼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인자가 바로 문 앞에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마가복음 13:28-29)”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비유의 말씀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주님이 오시는 날을 계산했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새 잎이 나는 여름을 8월이라고 생각했습니다. 8월 중에도 15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5일이라고 생각한 근거는 매우 희박합니다. 8월 15일이 광복절이니까 주님이 오실 날을 광복절과 결부 시킨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날짜를 계산하고, 또 년도를 계산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된 1945년을 하나님의 희년 (the year of Jubilee)으로 보고, 여기에 에다가 50년을 더했습니다. 희년에는 땅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고, 종들은 자유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1945년은 틀림없는 희년이라는 것입니다. 희년은 50년마다 오니까 1945에 50을 더했더니, 1995년이 하나님의 희년이라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부 사람들은 1995년 8월 15일에 주님이 오신다고 야단 법석을 떨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주님이 오시는 날을 그렇게 궁금해 하는지 그 속을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그 날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32절) 주님이 오시는 날을 계산하는 사람들에게 쐐기를 박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목적은, ‘그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으니까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러면 “깨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깨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종들에게 집을 잘 돌보라고 각자에게 임무를 주고 집을 잘 지키라고 하면서 여행을 떠났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그런 말씀이 없지 않지만,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이 종들이 주인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씀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주인은 ‘먼 길’을 간 것 같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a long trip’을 떠났다고 나와 있습니다. 어쩌면 외국 여행을 갔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주인이 언제, 어느 때 돌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저녁이나 혹은 밤중에 올지도 모르고요. 새벽이나 혹은 아침에 올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조심해서 보십시오. ‘저녁’ ‘밤중’ ‘새벽’ ‘아침’ 이런 단어들은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던, 방심하고 있던 때라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튼 주인은 오늘 말씀에 나온 것처럼 ‘갑자기 (suddenly)’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without warning (아무 경고 없이)’ 주인이 돌아 온다고 했습니다. 그 때 자고 있는 것을 주인이 보지 않게 하는 종이 있다면 그 종이 바로 항상 깨어 있는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종말론적 신앙’ 혹은 ‘종말론적인 믿음’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영어로는 ‘eschatological faith’라고 합니다. 이것은 언제 지구의 종말이 오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을 준비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까 언제 오시더라도 준비가 되어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어 있는 믿음’을 신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종말론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깨어 있는 믿음’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제가 몇 가지로 적용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봤습니다. 첫째로, 영적으로 각성하는 것입니다. 각성(覺醒)이라는 말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것입니다. 각성제(覺醒劑)는 정신이 나게 하는 약을 말합니다. 각성제를 먹으면 일시적이나마 잠이 달아나고 정신이 또렷해 집니다. ‘영적 각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 잠들지 않고 깨어 있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Spiritual Awakening’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뉴잉글랜드 지역에 두 차례의 큰 ‘영적 각성 운동 (The Great Awakening Movement)’가 있었습니다. 편의상 ‘The First Great Awakening Movement (1730–1755)’라고 하고, ‘The Second Awakening Movement (1790–1840)’이라고 합니다. 제 1차 대 각성 운동은 조나단 에드워드 (Jonathan Edwards, 1703-1758)와 조지 휫필드 (George Whitefield, 1714-1770)가 주도합니다. 제 2차 대 각성 운동은 챨스 피니 (Charles Finny, 1792-1875)와 나다니엘 테일러 (Nathaniel Taylor, 1786-1858)가 주도합니다. 이들의 설교 주제는 죄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고 회개하고 거듭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1차, 2차 영적 대 각성 운동의 진원지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뉴잉글랜드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술집들이 문을 닫고, 댄스장, 사교장, 오락실이 문을 닫았습니다. 장사가 안 되어서 문을 닫은 것이 아니라 주인들이 자진해서 문을 닫았습니다. 교회마다 사람들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리고, 예배 때마다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사람들이 속속 나왔습니다.

청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청년들이 회개하고 신학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청년들 사이에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제 2차 영적 각성 운동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다섯 명의 청년들이 윌리엄스 타운에 있는 윌리엄스 칼리지 (Williams College)에 입학합니다. 이들은 수업을 마친 후에 강가에 모여 기도하면서 경건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이 학생들은 근처에 있는 건초더미 속으로 들어가 비를 피합니다. 그런데,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쏟아집니다. 그 때, 사무엘 밀즈 (Samuel J. Mills, 1783-1818)라는 청년이 “우리 비가 그칠 때까지 세계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자” 라고 친구들에게 제의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건초더미 기도회 (Haystack Prayer Meeting or Haystack Movement)’입니다.

그래요. 다섯 청년들이 비를 피하려고 하다가 잠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뭐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이 기도 운동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청년들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캠퍼스 마다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윌리엄스 칼리지는 말할 것도 없고, 예일대학, 하버드, 프린스턴 대학 등에 기도 운동이 시작됩니다. 마침내 미국을 바꾸고 세계를 바꾸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영적으로 깨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떻습니까? 너무 안일하지 않습니까?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는 것으로 의무를 다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믿어도 괜찮은 것입니까? 우리 속에 있는 죄된 모습들을 제대로 발견하고 있습니까? 죄를 슬퍼하며 회개하고 있습니까? 이대로는 안 되고, 내가 깨어나야 하겠다, 거듭나야 하겠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로마서 13:11-12) 맞습니다. 지금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내 삶에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둘째로,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골로새서 4:2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에 힘을 쓰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evote yourselves to prayer with an alert mind and a thankful heart (감사하는 마음과 깨어 있는 마음으로 기도에 헌신하십시오).”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 마음이 심히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면서 깨어 있어라.” (마가복음 14:34) 같은 말씀이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마태복음 26:38) 주님께서 이 지상에서 보내신 마지막 밤에 있었던 일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제자들에게 모두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속 마음을 내 보이신 것은 아마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나와 함께 기도하자”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는 예수님의 마지막 요청을 들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모두 잠을 잤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일인데, 왜 성경은 제자들이 그 시간에 잠을 잤다는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을까요?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기를 힘들어하는 시대입니다. 차라리 시간을 드려서 봉사를 하라면 했지 기도는 힘들어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기도를 힘들어 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내다 보셨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뭐가 달라집니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는데, 성경은 “항상 깨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제가 Haystack Prayer Meeting에서 얻은 영감은 기도가 세계를 바꾼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뭐가 달라집니까? 달라집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변화되고요. 그 기도가 세계를 바꿉니다. 이 Haystack Prayer Meeting이 캠퍼스 기도 운동으로 번지게 되고요. 이 기도 운동에서 영향을 받아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아펜젤러 (Henry G. Appenzeller, 1858-1902)와 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 1859-1916) 선교사입니다. 아펜젤러는 감리교 선교사입니다. 펜실베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나서, 뉴저지에 있는 드류 (Drew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장로교 선교사입니다. 영국에서 태어나서 13살 때 미국으로 이민 왔습니다. 언더우드는 뉴저지에 있는 New Brunswick 신학교를 나왔습니다. 이 두 선교사가 한국 근대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자신이 어떤 위치, 어떤 자리에 있든지 그 일에 성실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에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불평과 불만이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 내는 창의적인 역할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아무리 작아 보이고, 하찮게 보여도 그 일에 성실하라는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갑자기 주인이 돌아 옵니다. 그 때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종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임무를 맡겨 주었습니다. 종들에게 무슨 중요한 일을 맡겼겠습니까? 자기의 종 (slave)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는 주인이 있습니까? 종들에게는 매우 단순한 일을 맡깁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일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 대수롭지 않은 일들입니다. 주인이 돌아 올 때, 주인이 맡긴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은 종이 깨어 있는 종 아닙니까? 이 일이 작게 보여도 내 주인이 나에게 맡긴 일이라고 생각하고 성실하게 그 일을 하는 종이 깨어 있는 종 아닙니까?

미국 폭스사 (20th Century Fox Film Corporation)가 판매직 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려 1,500 명의 지원자가 자기 소개서를 보내왔습니다. 폭스사는 그 중에서 특이하게 자기 소개서를 쓴 한 사람을 채용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자기 소개서를 썼다고 합니다. “저는 현재 가구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라도 가구점을 한번 방문하시면 세일즈맨으로서의 저의 능력을 금방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구를 사는 척하고 한번 방문해 주십시오. 제 머리는 빨간 색이기 때문에 저를 알아보기가 쉽지만 저는 손님을 알아볼 수가 없을 테니, 부디 한번 찾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당신을 많은 손님 중의 한 사람으로 맞을 것입니다. 저의 판매 실력과 손님에 대한 친절이 어느 정도인지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저를 채용해 주십시오.”

‘깨어 있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단순히 잠을 안 자고 있다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서, 영적으로 각성하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안일하게 믿음생활을 계속해서는 안 되겠다, 잠에서 깨어 나야 하겠다, 내 속에 있는 나의 죄성(罪性)을 봐야 하겠다, 회개해야 하겠다, 새로워져야 하겠다고 마음을 다잡는 것입니다.

동시에, ‘깨어 있다’는 것은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다시 기도의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자신이 바뀌고, 세상이 바뀐다고 하는 기독교 영성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다’는 것은 현재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중요한 일이든, 하찮은 일이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은 누구나 정신 차리고 잘 합니다. 그러나, 작은 일은 모두가 소홀하게 여깁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작은 일에도 성실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모두에게 하는 말이다. ‘항상 깨어 있어라!’” (37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say to you what I say to everyone: Be on the alert!" 우리 모두가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10/16/2016 |

예수 그리스도, 이 시대의 희망 Jesus Christ, The Hope of This Generation

로마서 12:1-2

오늘 읽은 로마서 본문 말씀은 너무나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로마서 12장은 여러가지 면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말씀이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교리 (doctrine)에 대한 말씀이라면, 로마서 12장부터 16장까지 말씀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12장부터의 말씀이 그 앞에 있는 말씀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교리를 배우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나가서 크리스천의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라도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서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3-16)”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자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 성경을 제대로 배운 사람인지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야고보서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2:26)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Just as the body is dead without breath, so also faith is dead without good works”라고 나와 있습니다.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여러분,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아무 쓸모도 없는 걸 모르시겠습니까 (How foolish! Can't you see that faith without good deeds is useless)?” (야고보서 2:20)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12장 말씀은 크리스천의 믿음을 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느냐 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하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말하면서 명령조(命令調)로 말합니다. 조금만 애들도 “너 이것 좀 해 줄래?” 그러면 “알았어!” 그러면서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너 이렇게 해!” 하고 명령조로 말하면 “내가 그걸 왜 해야 되는데?” 하고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엄마 아빠 얼굴을 쳐다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명령조로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인 예배입니다.” (1절)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절)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잘 살펴 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십계명은 말 그대로 열 가지 계명입니다. 열 가지 계명이 모두 명령조로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마라.” “너희는 우상을 만들지 마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한 날로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 하지 마라.” “거짓 증거하지 마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마라.” 이런 식으로 모두 명령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명령하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종살이하던 이집트 땅에서 너희를 인도해 낸 너희의 여호와 하나님이니라 (I am the LORD your God, who rescued you from the land of Egypt, the place of your slavery).” (1절)

지금 너희에게 명령하는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명령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원해 내신 자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이렇게 명령하는 것은 모두 자기 백성을 위해서 명령하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도 똑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명령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아는 여러분에게 간곡하게 호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because of all he has done for you’ (NLT) ‘in view of God's mercy’ (NIV) ‘by the mercies of God’ (NKJV, NASB)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개역성경) ‘하나님의 자비로써’ (쉬운성경) 이 말씀이 그 뒤에 나오는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명령을 이해하는 키워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명령들은 우리를 offend 하는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사랑의 권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 명령들이 당연히 우리가 따라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명령하는 것들을 들어 볼까요? 첫째로, 예배를 드리는 마음과 태도를 바꾸라고 합니다. 자기를 드리는 대신 짐승을 잡아 제물로 드리면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형식적인 예배를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대신 자기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Let them be a living and holy sacrifice” 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하는 영적 예배라는 말은 이런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형식적인 예배는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마음과 정성이 들어가 있는 예배가 아니면 그 예배를 통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믿음 생활은 예배의 중요성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예배는 내가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유명한 존 F. 케네디 (1917-1963) 대통령의 취임 연설이 생각납니다. “국가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 달라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이 연설문에서 ‘국가’라는 말 대신 “예배’라는 말을 넣으면 예배에 대한 완전한 정의가 됩니다. 참된 예배는 나를 거룩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드림’의 정신이 없이 예배를 통해서 받기만 원한다면 그것은 참된 예배의 정신이 아닙니다. 비록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다고 할지라도, 그 전에 우리의 ‘드림’의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라고 합니다. 1955년 12월 1일에 미국을 바꾼 하나의 사건이 터집니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 (The Montgomery Bus Boycott)’입니다. 그 당시 알라바마의 몽고메리에서는 버스 앞 네 줄이 백인 전용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흑인들은 뒤쪽에 있는 그들만의 칸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는 아무나 앉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버스를 이용하는 이용객의 75%는 흑인들이었습니다. 흑인들은 버스가 다 차기 전에는 중간에도 앉을 수 있었지만, 백인들이 탈 경우 양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버스가 만원이 되면 흑인들은 내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1955년 12월 1일,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자는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로자 파크스 (Rosa Lee Louise McCauley Parks, 1913-2005)는 이 일로 체포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고 벌금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 일에 흑인들의 항의가 이어졌고, 마침내 흑인들이 버스 타는 것을 거부하는 운동으로 번졌습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이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목사였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 일에 뛰어들게 된 것은 이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부단히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하지 않거나, 이 일을 게을리 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크리스천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세상에 영향력을 갖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까?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하나님의 뜻을 부지런히 구하고, 그 뜻을 실천하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갖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 (2절)”고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세상의 ‘behavior’가 있습니다. 세상이 움직이는 일종의 버릇 같은 것입니다.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라고 해도 좋습니다. 세상은 늘 그런 식으로 움직입니다. 이것이 ‘behavior of this world’입니다. 세상의 ‘customs’도 있습니다. 세상의 풍조 혹은 유행 (fashion)이라고 할까요? 크리스천은 세상의 ‘behavior’와 ‘custom’을 그대로 복사하려고 하지 마라고 합니다. 그대신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나를 새 사람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소원해야 한다고 합니다. ‘ 새 사람 (a new person)’이란 생각하는 방식이 바뀐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은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고, 생각하는 관점이 다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크리스천이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새 사람’으로 바꿔 주셔야만 합니다.

ReNEW Conference는 말 그대로 새로워 지기를 소망하는 집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새 사람으로, 크리스천의 관점을 가지고, 생각하고, 크리스천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새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하는 집회입니다. 지금까지 여섯 번의 ReNEW를 했습니다. 그 동안 ReNEW를 통해서 도전 받고, ReNEW를 통해서 변화 받은 은혜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ReNEW를 통해서 가장 많이 변화된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일곱 번째를 맞이하는 이번 ReNEW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습니다. 인위적은 노력으로 사람이 변화될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변화 시키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왜 우리가 ReNEW에 가야 하는지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정리해 봤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ReNEW를 통해서 강한 도전 (challenge)을 받습니다. 무엇보다 ReNEW는 ‘Haystack Movement (건초더미 운동)’에 그 역사성을 두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ReNEW를 구상하면서 ‘Haystack Movement’를 생각했습니다. ReNEW 홈페이지에 이 사실이 잘 나와 있습니다. 1806년에 당시에 윌리암스 칼리지 (Williams College)에 다니고 있던 다섯 학생들이 방과 후에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이 학생들은 모두 이곳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났던 제 2차 영적 대각성 운동 (The Great Awakening Movement)’에서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었습니다. 미국에 두 차례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는데, 1차 대각성 운동은 조나단 에드워드 (Jonathan Edwards, 1703-1758), 죠지 휫필드 (George Whitefield, 1714-1770) 같은 사람들이 주도합니다. 2차 대각성 운동은 나다니엘 테일러 (Nathaniel Taylor,1786-1858), 찰스 피니 (Charles Finney, 1792-1875) 같은 사람이 주도합니다. 이 윌리암스 칼리지 학생들은 대각성 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었습니다.

이 학생들이 강 가에서 기도회를 갖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학생들은 소나기를 피해서 근처에 있는 건초더미 (haystack)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때 사무엘 밀즈 (Samuel Mills, 1783-1818)가 뜬금 없이 세계 선교를 위해 함께 기도할 것을 제의합니다. 그래서 다섯 학생들이 세계 선교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기도를 마친 후에 사무엘 밀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The field is the world, we can do this, if we will (우리의 필드는 이 세상이다. 우리가 하려고만 한다면 이 일을 할 수 있다).” 그 다섯 학생들의 기도가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학생들이 기도했기 때문에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기뻐하시고 사용하셨기 때문에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어떤 도전이 있습니까? 도전이 없습니다. 매일 학교 가고, 공부하고, 페이퍼 쓰면서 수레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생활에 묻혀 삽니다. 공부가 중요하긴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삶의 전부가 아니잖아요? 우리의 삶에 자극이 필요하고, 도전이 필요합니다. ReNEW가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도전이 나의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나의 미래를 바꿔 놓을 수 있다고요.

ReNEW에 오는 강사들은 모두 자기가 비행기 표를 사서 옵니다. 그리고 강사료도 주지 않아요. 여기 오면 ReNEW에서 호텔 방 값과 식사만 제공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기 돈으로 비행기 표를 사서 오시는 분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오겠습니까? 청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올 수가 없습니다. 보스턴의 청년들을 만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겠다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쓰시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ReNEW에 참가하는 청년들은 거기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서 2박 3일 동안 한 조(組) 안에서 생활합니다. 그리고, 전체 집회에 참가하면서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말씀을 듣습니다. 무엇보다도 내 주변에 크리스천 친구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습니다. “나만 믿음 생활하는 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을 믿고, 함께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고, 용기를 얻습니다. 이 은혜가 작은 은혜이겠습니까? 내 옆에 나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나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나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친구들이 많이 있다는 이 생각이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어떻게 변화 시킬지, 어떤 도전을 주실지,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번 ReNEW에 참석해 보세요. Thanksgiving 연휴를 ReNEW에 사용해 보세요. 처음 ReNEW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이미 참가했던 사람들에게 ReNEW에 대해서 그리고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런 Re-NEW를 통해서도 우리 교회에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이번 ReNEW를 통해서 변화 받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10/9/2016 | 창립 38주년 메시지

우리교회의 시대적 사명 The Mission of Our Church in This Generation

마태복음 16:13-19

오늘은 우리교회 창립 38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1978년에 하바드 스퀘어에서 시작된 우리교회가 어언 40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1986년에 이 교회에 교육 목사로 있었고, 1988년에 담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교회를 시작하셨던 분들도 이 교회가 이토록 오랫동안 존재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40여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를 거쳐갔습니다. 지금 제 머리 속에 그 분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갑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로서 40여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들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교회의 지나 온 역사를 자랑하는 것보다 앞으로 이 교회가 어떻게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사실은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요한계시록 3:1) “You have a reputation for being alive, but you are dead.” (New Living Translation)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지역)에 사데 (Sardis)라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꽤 명성이 높았던 것 같습니다. 무엇 때문에 명성이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교회 건물이 좋아서 명성이 높은 교회가 있습니다. 또 교인들의 숫자가 많아서 명성이 높은 교회가 있습니다. 또 그 교회에 높은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명성이 높은 교회도 있습니다. 사데교회가 그렇게 명성이 높은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눈으로 보면 이 교회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주님이 그 교회를 죽은 교회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를 상실한 교회도 매주 예배를 드리고, activities가 일주일 내내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으로 보면 죽은 교회입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감리교회의 미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감리교인들이 유럽이나 미국에서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감리교인들이 능력을 상실한 종교의 형태를 가진 죽은 종파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들이 교리와 성령과 훈련을 게을리 한다면 그렇게 되고 말 것입니다 (I am not afraid that the people called Methodists should ever cease to exist either in Europe or America. But I am afraid lest they should only exist as a dead sect. having the form of religion without the power. And this undoubtedly will be the case unless they hold fast both the doctrine, spirit, and discipline with which they first set out).” 웨슬리는 믿음 생활은 항상 ‘교리 (doctrine)’ ‘성령 (spirit)’ ‘훈련 (discipline)’ 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웨슬리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감리교인들이 그들을 정말 위대한 사람들로 만들어 줄 열정과 능력과 흥분, 초월적인 요소들을 잃어버리고 살면서도 거기에 만족하는 것이다 (My fear is that our people will become content to live without the fire, the power, the excitement, the supernatural element that makes us great).” 오늘 저에게도 웨슬리가 가지고 있던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지금의 상태에서 만족해 버리는 교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지금의 작은 성취에 만족하는 교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에 만족해 버리고, 정작 우리가 가져야 할 것들을 잃어버리는, 그래서 주님이 죽은 교회라고 평가하시는 교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우리가 가져야 할 것으로, the fire, the power, the excitement, the supernatural element를 들었습니다. 마지막의 ‘the supernatural element (초월적인 요소)’는 눈에 보이지 않은 가치들을 말합니다. 기도, 사랑, 은혜 이런 것들이 the supernatural element입니다.

웨슬리의 말이 창립 38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어떤 영감(靈感, inspiration)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교회의 정체성이 도전을 받고 있는 시대입니다.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 (foundational question)에 대답을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저는 교회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정체성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하면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께서 왜 이 질문을 제자들에게 하셨다고 생각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정체성,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발견하는데 있어서 이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없습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6절) 베드로의 대답에 예수님은 아주 만족하셨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누가 이것을 네게 알려 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것이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돌 위에 내 교회를 지을 것이니, 지옥의 문이 이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7-18절)

여러분,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런 말을 주고 받은 곳이 어디였습니까? 가이사랴 빌립보 (Caesarea Philippi)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던 갈릴리에서 가이사랴 빌립보까지는 약 25마일 정도 (약 40km) 떨어져 있습니다. 걸어서 10시간은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한번 지도를 보시지요.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호수 북쪽 헐몬산 기슭에 있는 마을입니다. 헐몬산은 해발 2,814m (9,232 ft.)로 여기서부터 물이 흘러 갈릴리 호수로 들어갑니다. 헐몬산 기슭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 역시 해발 350m (1,150 ft.)로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헐몬산을 ‘Mountain of the Chief (가장 높으신 분의 산)’ 라고 부르면서 성스러운 산으로 여겼습니다. 헐몬산 기슭에 위치한 가이사랴 빌립보는 헤롯 빌립 (Herod Philip II, BC 27-AD 34)이 통치하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거대한 돌 (rock)로 유명했습니다. 높이가 30.5m (100ft.), 넓이가 152m (500ft.)가 되는 거대한 돌입니다. 헤롯 대왕은 이 거대한 바위 위에 가이사 (로마의 황제)를 신격화 하기 위해 흰 대리석 신전 (shrine)을 세웠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 (Josephus, A.D. 37-100)의 책에도 그 신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당시에 가이사 신전은 유명했습니다. 헤롯 빌립은 이곳 이름을 가이사와 자기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 외에도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판 (Pan)이라는 신을 섬기는 동굴이 있었습니다. Pan은 얼굴의 절반은 사람이고, 나머지 절반은 염소 얼굴을 가진 신입니다. 예전부터 가이사랴 빌립보는 Pan의 이름을 따서 파니아스 (Panias)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후에 가이사와 빌립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가이사야 빌립보는 고대 종교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이사랴 빌립보로 제자들을 데리고 10시간이나 걸어 오셨습니다. 단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 하나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이 질문이 정말 중요한 질문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교회에 대한 정체성이 흔들리고, 크리스천에 대한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Christian이란 말은 앞의 ‘Christ’라는 말과 그 뒤에 ‘-ian’이라는 접미사가 붙은 말입니다. ‘-ian’이라는 접미사는 ‘그것에 붙어 있는 (adhering to, or belonging to)’이라는 뜻을 가진 접미사입니다. 제가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 보았더니 이 말에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a person who believes in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a person who exemplifies in his or her life the teachings of Christ (그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사람)’ ‘a person who possesses Christian virtues (크리스천의 덕목들을 소유한 사람)’ 이 세 가지 의미는 일반 사전에 나와 있는 Christian이라는 말의 정의입니다.

자기가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 가지 의미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 증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은 크리스천으로서 중요한 가치들을 소유하고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에 맞게 살았더라면 오늘날 왜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겠습니까? 우리가 이 이름에 맞게 살았더라면 왜 오늘날 교회의 정체성이 흔들린다고 걱정하는 말들을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만족하게 받아들이신 이유는, 그 고백의 내용이 옳기 때문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베드로가 한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 17절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교회는 이 고백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 흔들리면 교회의 정체성도 같이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돌 위에 내 교회를 지을 것이니, 지옥의 문이 이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16:18) “You are Peter (which means `rock'), and up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all the powers of hell will not conquer it (New Living Translation).” Peter는 베드로의 영문 표기입니다. 베드로는 페트로스 (Πέτρος)라는 희랍어를 우리 말로 발음한 것입니다. 아람어로는 게바 (כיפא, kēfā)입니다. 모두 ‘바위 (rock)’라는 뜻이 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건축해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반석 삼아 그 위에 교회를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Pan보다 더 위대하시고, 가이사보다 더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교회를, 베드로 너의 신앙고백 위에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는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창립 38주년을 맞이 하는 우리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은 어릴수록 가르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교육의 효과도 있습니다. 그래서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교육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교회가 젊은 교회라는 사실에 늘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만은 못하지만, 가르치기에 아직 늦지 않는 나이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가르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기초를 잘 다져서 내 보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청년들을 우리교회에 맡기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안창호 선생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런 때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안창호 선생은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말에 실망했습니다. 모두 힘을 합쳐서 일본에 대항해서 독립을 해야 한다는 말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안창호 선생에게 실망하고 돌아섰다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안창호 선생의 말이 맞았습니다. 조금 늦더라도 젊은 사람들을 바로 가르쳐야 민족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의 시대적인 사명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청년들에게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지금 이 고백이 흔들리기 때문에 교회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유대 민족은 오랫동안 그리스도 (메시아)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민족의 희망이었고, 기대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당신은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그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016년 교회 창립 38주년을 맞이해서, 우리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 중요한 때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받아 들이는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희망이시라는 것 아닙니까?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가야만 이 시대가 희망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때마침 올해 ReNEW주제가 ‘예수, 이 시대의 희망 (Jesus, The Hope of This Generation)’입니다. 저는 올해 ReNEW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다시 예수님 안에서 인생의 희망을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절망을 말하는 이 시대에,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명목상의 크리스천들 (nominal Christians)에게 예수님의 ‘주 되심 (Lordship)’을 가르치고, 실천하게 하는 일, 단순히 교회를 드나드는 churchgoer들을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며 사는 사람들로 양육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중요한 일을 우리교회가 해야 합니다. ‘Churchgoers May Live Longer’라는 제목의 글이 있어서 ‘이게 무슨 소리야?’ 하면서 읽어 봤더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안 다니는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산다는 별 가치 없는 리서치 결과였습니다. 오늘 이 기념 예배가 우리교회의 사명을 새롭게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교회가 앞으로 오는 시대에도 교회의 존재 이유가 분명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2년 후에, 우리교회가 창립 40주년 기념예배를 드릴 때, 우리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10/2/2016 | 세계 성만찬 주일 메시지

우리는 하나 We Are One in God’s Spirit.

요한복음 17:6-26

오늘은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세계 성만찬 주일’입니다. 영어로는, ‘World Communion Sunday’라고 합니다. 전 세계의 교회들이 같은 날 주님의 만찬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 ‘커뮤니온 (communion)’이라는 단어가 ‘주님의 만찬’을 뜻하는 고유 명사로 사용하지만, 일반적으로는 ‘a group of persons having a common religious faith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그룹)’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전 세계의 교회들이 같은 날 성만찬 예식을 함으로써 우리는 인종, 역사, 전통, 국가, 언어, 문화를 초월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매년 빠지지 않고 ‘세계 성만찬 주일’을 지켜 왔습니다. 우리 교회도 세계 교회의 일원으로서 주님의 교회들이 나가는 방향을 바라보고, 같은 목적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교회는 매주 ‘사도신경 (Apostle’s Creed)’을 암송합니다. 이 것 역시 우리교회가 사도들의 전통과 역사를 계속하는 교회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행 중에 잘 알지 못하는 교회를 방문 했을지라도 그 교회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라면, 안심하고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세계 성만찬 주일’을 맞이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은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성서 신학자들은 이 기도를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 (The High Priestly Prayer of Jesus)’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간구하신 기도라는 것입니다. 상당히 긴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다른 어떤 사람의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세계 성만찬 주일을 맞이해서 예수님의 이 기도 속에 우리 교회가 들어야 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넓은 의미에서 제자들을 말함) 볼 때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들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말씀을 이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았고, 제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을 진정으로 알았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말씀 이지만,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제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14절)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를 알고 계시는 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은 우리 크리스천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과 관련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디 가서 여러분을 증명하려면 ID를 보여줘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Driver’s License가 ID를 대신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크리스천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는 ID는 성경입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경을 배우고, 받아 들이고, 배운 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ID입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에 비유했습니다 (야고보서 1:23-25).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에 비유한 것은 참 탁월한 비유 아닙니까? 거울을 보면서 얼굴을 고치는 것처럼, 크리스천들은 말씀의 거울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고칩니다. 특별히 새벽 기도회에 나와서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보면서 자기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고친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사도 바울 역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올바른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말씀의 가치를 믿었습니다. 디모데후서 3:14-17에 나오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그대는 지금까지 배워 온 가르침을 계속 좇아가십시오. 이 가르침들이 진실이라는 것은 그대 스스로 알 것입니다. 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는데, 이 성경은 그대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게 하였습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며, 삶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또한 그 잘못을 바르게 잡아 주고 의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게 되고, 모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you must remain faithful to the things you have been taught. You know they are true, for you know you can trust those who taught you. You have been taught the holy Scriptures from childhood, and they have given you the wisdom to receive the salvation that comes by trusting in Christ Jesus.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is useful to teach us what is true and to make us realize what is wrong in our lives. It corrects us when we are wrong and teaches us to do what is right. God uses it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 to do every good work.” 이 말씀 속에 사람을 사람답게 교육하는 일에 뭐 하나라도 빠진 것이 있습니까? 빠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가치는 세상에서 가르치는 가치와 충돌합니다. 서로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14절) ‘속한다’는 말은 ‘belong to something’ 무엇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과 한 몸처럼 섞여서 구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크리스천이 성경을 모르면 자기도 모르게 세상에 속하고 맙니다. 크리스천이 성경의 가치를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세상에 속하고 맙니다. 

성경은 크리스천들이 가지고 다녀야 할 ID입니다. 이 사람이 성경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면 더 이상 확인할 필요 없습니다. 이 사람은 크리스천 맞습니다. 백인을 만나고, 흑인을 만나고, 아프리카 사람을 만나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 크리스천이라는 ID를 확인하면, 그 때부터 우리는 한 형제가 되고 한 자매가 됩니다. 서로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와 역사가 다르지만,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한 방향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세계 성만찬 주일은 이 사실을 서로 확인하는 주일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9, 11절) 저는 예수님의 이 기도를 읽고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를 하다 보면, 특히 어디서 대표 기도를 하다 보면, 앞에서 한 기도를 다시 반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고 없이 기도하다 보니까 그런 일이 생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앞에서 기도한 것이 좀 미진하다고 생각할 때 다시 한번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서도 그런 것이 보입니다. 분명히 9-11에 보면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나오는데, 다시 21-23에 같은 내용의 기도가 나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우리 크리스천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번이나 반복해서 같은 기도를 하실 정도로 크리스천이 하나가 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자기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옳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천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과 믿는 교리 (doctrine)가 조금 다르다고 해서 서로 갈라섭니다. 한국에서는 장로교회가 교리 때문에 많은 교파가 생겼습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이 있습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이 있습니다. 이름이 거의 같아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어디가 다른지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한번 들어 보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믿는 사람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21절)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영광을 이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22절) “제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십니다. 부디 그들로 온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23절) 여러분, 어떤 이유에서든지 분열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 기도를 무효(無效)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만과 이기심과 시기심이 예수님의 기도를 무효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은 그냥 별 이유 없이 한 데 뭉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됨의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1절). 또,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영광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22절).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됨으로써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23절). 

정말 우리 크리스천들이 하나가 되는 데에는 이렇게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청년부는 팀 안에서, 임원들 간에, 남선교회와 여선교회, 청장년부, 코아부 안에서, 또 교회 임원들 간에, 내가 하나됨을 막고 있지 않는지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 중에 이런 복이 있는 것 아세요?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   )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복음 5:9) 괄호 속에 들어가는 말은 ‘아들’입니다. 바울은 왜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평안의 매는 끈으로 한 몸이 되었습니다. 하나가 되도록 힘쓰고, 여러분 가운데 늘 평화가 깃들도록 노력하십시오. 여러분은 한 몸입니다. 여러분은 같은 성령을 받았고, 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한 분이시며, 믿음도 하나고, 세례도 하나입니다.” (에베소서 4:3-5)

One Body, One Spirit, One Hope,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One God (하나의 몸, 한 분 성령, 한 소망, 한 분 주님, 하나의 믿음, 하나의 세례, 그리고 한 분 하나님)입니다. 성경에 “우리가 사탄의 계획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2:11)”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악한 영의 세력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분열 시키려고 합니다. 이 모든 악한 영의 계획을 아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가 하나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어찌 우리만 위해서 이겠습니까? 주님은 온 세계의 교회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9/25/2016 | 힘과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3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Lord, You Are My Strength

시편 59:16-17

오늘로 하나님의 말씀 시리즈를 마치려고 합니다. 첫 번 설교에서는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설교했고, 두 번째 설교에서는 ‘앞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설교했고, 오늘은 ‘힘과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설교하려고 합니다. 9월 달에는 새로 보스턴에 오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도시 생활에 적응하랴, 새 학교에 적응하랴 마음이 분주하고, 마음이 불안한 친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몇 주 전에 청년부 임원/팀장 리더 수련회를 했는데, 공교롭게도 몸이 안 좋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이런 일이 새로 시작하는 학기, 새로 시작하는 보스턴 생활, 새로 시작하는 직장생활에서 오는 부담감와 무관(無關)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 다릅니다. 사람의 말은 힘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힘이 들 때 옆에서 친구가 그래요. “너무 걱정하지마. 다 잘 될 거야!” 이런 친구가 옆에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하고 행복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친구가 친구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말입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병원에 문병갈 때 암담할 때가 많습니다. 병이 상당히 심각한데 “염려하지 마세요. 꼭 나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말 최선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저도 정말 그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다행인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잖아요?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성경 말씀을 펴서 어디 어디를 읽겠습니다” 하면서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能力)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영화 ‘인천 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장둔 역을 맡은 Liam Neeson이 상륙하기 전에 등대에서 빛이 비치기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특공대가 들어가서 기뢰 (naval mines)를 제거하고 아군에게 상륙해도 좋다는 등대 빛을 비추게 되어 있었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맥아더에게 마침내 등대 불빛이 어두운 바다를 환하게 비칩니다. 그 때 맥아더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이르시기를 ‘빛이 있으라’” “God said ‘Let there be light.’” (창세기 1:3) 제가 보기에 이 장면이 전체 영화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똑 같은 몸을 입고 태어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14). 이것을 신학 용어로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한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이 아이는 아주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멀쩡하다가 가끔 심한 경련을 일으키면서 쓰러집니다. 언제, 어디서 그런 일이 있을지 몰라서 아버지는 안절부절합니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이 아이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데, 어떤 때는 물에도 쓰러지고, 불에도 쓰러진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예수님께 간절하게 매달립니다. “하실 수 있으면 이 아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 주십시오.” 그 때 예수님이 그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What do you mean, `If I can'? Anything is possible if a person believes." (‘내가 할 수 있으면?’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든지 가능하다).” 그 때 이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I do believe, but help me overcome my unbelief (예, 제가 믿습니다. 제가 불신앙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마가복음 9:22-24)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When Jesus saw that the crowd of onlookers was growing, he rebuked the evil① spirit. He said "Listen, you spirit that makes this boy unable to hear and speak, I command you to come out of this child and never enter him again!" (마가복음 9:25) /①Greek unclean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시편 59편 말씀을 보세요. 이 시편도 역시 다윗이 썼습니다. 이 시편 첫 머리에 ‘사울이 군인들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킬 때’ 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울은 군인들을 보내서 다윗을 가택연금을 시키고, 기회를 봐서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집 안에 갇혀 있는 다윗이 얼마나 무섭고 떨렸겠습니까? 우리가 살다가 보면 이런 일도 당하게 됩니다. 정말 우리는 우리 앞을 단 몇 시간도 내다 볼 수가 없습니다. 똑똑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잖아요? ‘Helicopter View’ 혹은 ‘Bird’s Eye View’를 가지고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충고한 사람이 있었다고요. 그 사람이 솔로몬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쓴 전도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제 때에 아름답게 지으셨고, 사람의 마음에 영원의 감각을 주셨지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행하실 일은 다 깨달을 수가 없다 (but people cannot see the whole scope of God’s work from beginning to end).” (전도서 3:11)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그가 하시는 일을 우리가 다 모르게 해 놓으셨습니다. 다 모르기 때문에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순간순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다윗의 시편으로 돌아가 볼까요? 지금 밖에서는 사울이 보낸 군인들이 집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기회를 엿보다가 언제 군인들이 들이닥쳐 다윗의 생명을 빼앗을지 알 수 없습니다. 정말 끔찍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 있는 다윗은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할 것입니다. 아침에 내가 주의 사랑을 노래할 것입니다. 주는 나의 성벽이시며 어려울 때에 찾아갈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오 나의 힘이신 하나님, 내가 주를 찬양합니다. 오 하나님, 주는 나의 성벽이시며,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집 안에 있는 다윗은 불안에 떠는 대신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주의 사랑을 노래한다고 하지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밤에 주님의 사랑을 노래해도 되잖아요? 그런데 왜 굳이 아침에 주의 사랑을 노래한다고 했을까요? 무섭던 밤이 지났잖아요? 지난 밤을 무사히 보내고 새 날을 맞이 했잖아요? 무섭던 밤이 지나고, 또 새날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윗은 눈을 뜨면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밖에는 사울이 보낸 군인들이 에워싸고 있지만, 다윗은 사울의 군인들보다 더 강하고 튼튼한 하나님의 성벽이 나를 보호하고 있다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For you have been my refuge, a place of safety when I am in distress (주님은 나의 피난처입니다. 내가 불안할 때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피난처입니다).” (17절)

이제 오늘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말씀 드릴 시간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 하나님을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불안하고 무서울 때, 어떻게 “하나님께서 여기 나와 함께 계시는구나” 하고 하나님의 임재(臨在, God’s presence)를 느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17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But the Lord stood at my side and gave me strength.” (NIV) “But the Lord stood with me, and strengthened me.” (NASB) 누가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사도 바울이 그 제자 디모데에게 한 말입니다. 아무도 내 곁에 없을 때, 외롭고 힘들 때, 무섭고 떨릴 때, 주님이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정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 살 수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법을 모르고 있다고요.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어떤 때 기도하게 되고, 우리가 어떤 때 하나님을 찾게 되는지 생각해 보세요. 내가 성공했을 때인가요? 아니면, 내가 실패했을 때인가요? 내가 희망에 부풀어 있을 때인가요? 아니면 내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인가요? 내가 건강할 때인가요? 아니면 내가 병들었을 때인가요? 내가 계획한대로 잘 나가고 있을 때인가요? 아니면 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물거품이 되었을 때인가요? 내가 강할 때인가요? 아니면 내가 약할 때인가요? 내 옆에 친구들이 많이 있을 때인가요? 아니면 내 옆에 아무도 없을 때, 혼자 버려져 있을 때인가요?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해 지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경 말씀들이 이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지 못합니다. 왜요? 그 때 성경을 읽지 않으니까요. 조금만이라도 정신을 차려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언제, 어느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찾으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만 예를 들어 볼까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으로 부르신 것은 그의 나이가 80세가 다 된 어느 날이었습니다. 모세는 젊었을 때 애국심으로 충만했습니다. 여차여차해서 이집트의 공주의 아들로 성장한 모세는 자기가 이집트 사람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identity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성경에는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대신 ‘십계 (The Ten Command-ments)’ 같은 영화를 보면 흥미진진하게 잘 나와 있습니다. 궁금한 것은 그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가 그렇게 히브리 민족을 위해서 일하려고 했을 때는 부르시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결국 모세는 미디안 (Median)이라는 시나이 반도 남쪽으로 피신을 하잖아요? 그 때 모세의 나이가 40이었습니다. 거기서도 하나님은 모세를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또 40년이 흘러갑니다. 이제 모세에게 젊었을 때의 힘도, 의욕도, 꿈도 다 사라졌을 때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끝나는 것에 절망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제는 나이가 많아져서 무엇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때를 위해서 40년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사실입니다. 신약성경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몸을 찌르는 가시 (a thorn in his flesh)’가 있어서, 그 가시를 빼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기도에 응답이 없습니다. 열심히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어진 하나님의 응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 진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자기는 지금 이 가시 때문에 힘들과 아파 죽겠는데, 하나님은 지금 너는 나의 은혜를 충분히 받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능력은 너의 약함을 통해서 완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너무 귀해서 오늘 주보 겉장에 실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위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의 약한 것들을 더욱 기쁘게 자랑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약할 때나 모욕을 받을 때나, 궁핍하게 될 때나 핍박을 받을 때나, 어려움이 있을 때에, 그리스도를 위해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약할 그 때에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9-10)

사람들은 누구나 다 강해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힘으로 강해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아요. 자기가 가진 것이 많아서, 자기가 아는 것이 많아서, 자기가 소유한 것이 많고, 자기 힘이 강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약한 사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약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약함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약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어제 토요일 새벽 기도 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누가복음 5:31-32)”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까? 자기가 약하다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크리스천 리더십에 대한 책을 많이 쓰는 Max Lucado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God never said that the journey would be easy, but he did say that the arrival would be worthwhile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의 삶의 여정이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대신 하나님은 우리의 종착점이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가정에, 직장에, 여러분의 자녀들을 키우는 일이, 또 여러분이 공부하는 일이 쉽지 않은가요? 하나님께서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이 어렵고 힘들지만,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도착한 우리 ‘종착점 (the arrival)’ 매우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지금 나의 삶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지금 생활에 힘들고 지쳐 있나요? 한번 오늘 주의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의 시각을 바꿔 보세요.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약함을 통해서 드러날 때입니다. 앞의 화면 보면서 우리 같은 목소리로 이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 진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신약성경 고린도후서 12:9에 나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