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2020 | 사순절 새벽기도 27

하나님께 속한 사람

요한복음 8:33-47

설교자들이 설교를 한 후에 후회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 그 때 이 말을 꼭 했어야 했는데......” 이런 후회가 드는 때가 있습니다. 어저께 새벽에 설교를 마친 후에 저에게 그런 후회가 들었습니다. 데이빗 리빙스턴이 그런 말을 했잖아요? 내가 묶고 있는 모든 ‘끈 (ties)’을 끊어 달라고요. 내 마음이 주님의 마음에 묶여 있는 끈을 제외하고 모든 끈을 끊어 달라고요. 또 사도 바울은 자기가 그동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버렸다고요. 바울은 그 것들에게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 위해서 그것들을 ‘garbage (쓰레기)’ 처럼 버렸다고요. 예전 개역성경에는 ‘분토(糞土, dung)’처럼 버렸다고 했습니다. 우리가화장실에서 용무를 보고 나면 물을 내립니다. 그러면 ‘쏴’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가 버립니다. 그것을 보고 미련을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나도 리빙스턴처럼 나를 얽어 매고 있는 ‘끈들’을 모두 끊어버려야지! 나도 바울처럼 이것들을 쓰레기처럼 버려야지!” 설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겠지요? 그런 결심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못 끊습니다. 못 버립니다. 이 끈을 끊고, 쓰레기처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strong commitment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That is why I am suffering here in prison. But I am not ashamed of it, for I know the one in whom I trust, and I am sure that he is able to guard what I have entrusted to him until the day of his return.” (디모데후서 1:12)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가 믿는 분,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긴 것을 확실하게 지켜 주실 것을 믿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가 맡긴 것이 무엇입니까? 그를 믿으면서 그에게 걸고 있는 기대와 희망입니다.

리빙스턴도 똑 같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어디든지 저를 보내십시오, 주님 어떤 짐이라도 저에게 지우십시오. 괜찮습니다. 저를 얽어 매고 있는 모든 줄들을 끊어 주십시오. 제 heart와 주님의 heart에 매여 있는 끈만 남겨 놓으시고요.” 리빙스턴도 그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기에 이런 고백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여러분들을 자유롭지 못하게 묶고 있는 끈들을 끊으려고 시도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실패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알기 전에는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자, 이제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종이 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 (33절)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이 이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죄의 종이 되는 것이다. 종은 영원히 가족이 될 수 없지 않겠느냐? 그러나 아들은 영원히 가족이 되는 것이다.” (34-35절)

성경에 보면 ‘죄의 종’이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죄의 종’이란 말은 죄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죄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는 마약과 같아서 한번 맛을 보면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게 됩니다. 그래서 ‘죄의 종’이라고, ‘a slave of sin’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드라마 같은 데서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처음엔 호기심에 한번 해 봤습니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하다가 거기에 중독되고 맙니다.

어저께 봤던 말씀 카드 다시 한번 볼까요? 요한복음 8:31-32입니다. “If you abide in My word, you are My disciples indeed. And you sha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shall make you free.” (NKJV) 예수님께서 “종은 영원히 가족이 될 수 없고, 아들은 영원히 가족이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아들’이 누구입니까?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이잖아요? 종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아들에게만’ 자유가 있는데, 이 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우친 사람이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잘 보면, 단순히 이 말씀은 제가가 되는 길, 진리를 아는 길, 자유함을 누리는 길에 대한 말씀 뿐만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길,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도 이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입니다 (Our father is Abraham)!”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정말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라면, 아브라함이 행했던 일을 너희도 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하나님께 들은 것을 너희에게 말하는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일을 결코 행하지 않았다.” (39-40절)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교만하고 거만한 그들의 목소리가 말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 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무튼 부자도 죽고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자에게는 자기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것보다 자기 집 대문 앞에서 먹을 것을 얻어 먹던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품 (Abraham’s bosom)’은 유대인들이 죽으면 가장 안기기를 원하는 곳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혈연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것을 자랑했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을 중요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정말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라면, 아브라함이 행했던 일을 너희도 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하나님께 들은 것을 너희에게 말하는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일을 결코 행하지 않았다.” (39-40절) 아브라함이 어떤 일을 했습니까?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 (Abram believed the LORD, and the LORD counted him as righteous because of his faith, 창세기 15:6)”고 했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예를 잘 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었는데, 아브라함이라면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사람을 죽이려고 했겠느냐? 그러니 지금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도 아니고, 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마귀에게 속하여 너희 아버지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법이다. 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47절) “Anyone who belongs to God listens gladly to the words of God. But you don't listen because you don't belong to God.”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자기가 속한 사람의 말을 듣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하는 말은 다 싫어합니다. 맞는 말 같습니다. 우리 믿음생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목사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목사라고 해서 무슨 특권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똑 목사의 특권을 주장할 마음도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에게 주어진 일 중의 하나가 설교입니다. 주일마다 설교를 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같은 경우에는 새벽기도에서도 매일 설교를 해야 하고, 금요일에도 설교를 해야 하고, 그 밖에 성경공부가 많습니다. 교재를 만들어서 제공해야 하고, 간사 성경공부가 있습니다. 가족모임 성경공부 교재도 만들어야 하고, 인도자 강습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제가 교우들 앞에서 설교하고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데,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저의 말을 듣기 싫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제가 하는 말도 좋아합니다. 제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 내가 하는 말은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 들은 것이다 (38절). 그런데,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너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었다면 내 말을 들었을 것이다 (47절).”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마음을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기뻐하는지, 아니면 교회는 나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우리 자신들을 반성해 봐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심각하게 들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 내가 그런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이해가 갑니다.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 줄 압니다. 또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다는 것도 쉬지 않은 일인 줄 압니다. 누구에게 속한다는 것은 그의 것이 되는 것이잖습니까? 그게 쉽지 않은 일인 줄 압니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생활은 우리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의지를 꺾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결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엘리라는 그 당시의 제사장 밑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자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에게 그런 일이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모르고 엘리 제사장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인 줄 엘리에게 가서 “선생님, 저를 부르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아니, 난 너를 부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똑 같은 일이 세번이나 반복되고 나서야 엘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 것을 알았습니다.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아, 다시 한번 그런 음성이 들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습니다 (Speak Lord, your servant is listening)’ 이렇게 말씀을 드려랴.’” (사무엘상 3:9) 엘리의 말대로 또 한번 하나님의 소리가 있었을까요? 예, 다시 한번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가르쳐 준 대로 말했습니다. 사무엘은 이런 식으로 엘리 제사장 밑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읽을 때마다 우리도 그렇게 순종의 훈련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말씀하십시오. 이 종이 듣습니다!” 때가 더 늦기 전에 말입니다.


3/26/2020 | 사순절 새벽기도 26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요한복음 8:21-32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으나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너희는 참으로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23-24절) “어디서 많이 들었던 말씀인데?”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 세례 요한이 했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예수님과 자기를 비교합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은근히 예수님의 제자들과 자기들을 비교합니다. 이런 때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위로부터 오신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다. 땅으로부터 온 사람은 땅에 속하여, 땅의 일을 말한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오신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다. 그분은 그가 보고 들었던 것을 증언하신다.” (요한복음 3:31-32)

요한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했던 말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다.” (요한복음 1:27)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다.” (요한복음 1:33) “그는 신랑이고 나는 신랑의 친구이다.” (요한복음 3:29) “나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20) “그분은 점점 더 위대해질 것이고, 나는 점점 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3:30) 이 말씀이 영어성경 번역들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 “He must become more important, but I must become less important.”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보통 람들은 조금이라도 자기가 유명해지려고 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 주기를 바랍니다.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저를 알아 주는 말을 하면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 이 사람은 서슴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분은 점점 잘 되고, 나는 점점 안되고, 예수 그분은 점점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 나는 점점 덜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이 자신에 대하여 했던 말 중에 결정적인 것은 “위로부터 오신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다. 땅으로부터 온 사람은 땅에 속하여, 땅의 일을 말한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오신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다. 그분은 그가 보고 들었던 것을 증언하신다.” (요한복음 3:31-32) 무슨 말인가요? “예수 그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고, 나는 땅에 속한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이런 말이잖아요?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참 대단한 겸손입니다. 그런데요. 참 이상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이렇게 높이고 자기를 낮췄다고 해서 아무도 세례 요한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마가복음 10:43-45) “Whoever wants to be a leader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among you must be the slave of everyone else.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자기를 낮추면, 자기를 낮추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servant가 되고 slave가 되면,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의 사는 방식이 되면 이상하게도 (이상하다고 하는 것은 설명이 잘 안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높아집니다. 자기를 스스로 높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기를 낮추면 높아집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섬기는 척하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기 목숨을 바쳐서 섬기셨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울이 이 사실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 잘 써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최고로 높은 자리에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하고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9-11)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으나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너희 너희는 참으로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23-24절) 이 말씀은 New Living translation이 정말 잘 번역했습니다. “You are from below; I am from above. You belong to this world; I do not. That is why I said that you will die in your sins; for unless you believe that I AM who I claim to be①, you will die in your sins." / ①Greek unless you believe that I am. See Exod 3.14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대답을 해 보세요.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하늘에서 오신 분입니다. 하늘에 속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권위로 너희가 죄 가운데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죄 가운데서 죽는 것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곧 (       )이시기 때문입니다. 질문 계속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 곧 ‘I AM’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죄 때문에 죽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I AM’이신 그분, ‘스스로 있는 분’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가르침을 꼭 붙들고 있으면 진정 나의 제자이다. 그 때에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1-32절) “You are truly my disciples if you remain faithful to my teachings. And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이 말씀을 생각하다 보면 이런 말씀이 생각납니다. “朝問道면 夕死라도 可矣니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확실히 공자의 이 말은 멋진 말이지만, 실천은 약합니다. 아니 진리를 깨우쳤으면 이제 그 깨우진 진리를 가지고 살아서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동체를 위한 섬김과 개념은 들어 있지 않고, 개인의 깨우침에서 끝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에서 열까지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 말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실천할 때 진가가 드러납니다. 보세요. 오늘 말씀에도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신다. 나는 언제나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 하므로, 그분은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And the one who sent me is with me--he has not deserted me. For I always do what pleases him (29절)” 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늘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도 실천에 대한 말씀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면 좋겠지요? 나와 함께 해 달라고 기도만 하면 안 됩니다. 내 생각과 나의 삶이, 나의 행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If you remain faithful to my teachings”이란 말이 무슨 뜻일까요? remain, abide, dwell이라는 말은 그곳에 주소를 두고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교훈에서 멀어지지 않고 머물러 사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대충대충 건성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내가 크리스천의 정의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더니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 person who exemplifies in his or her life the teachings of Christ’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예수님의 교훈을 그의 삶으로 증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진리를 알게 됩니다. 진리라고 하니까 막연한 진리가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깨우친다고 하지요? 크리스천의 삶은 몇 년이고 벽을 보고 앉아 있다가 어느 날 깨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이 깨우치는 진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 진실하다,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 옳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지를 알게 된다고요.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며, 삶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또한 그 잘못을 바르게 잡아 주고 의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디모데후서 3:16)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is useful to teach us what is true and to make us realize what is wrong in our lives. It corrects us when we are wrong and teaches us to do what is right.”

“내가 읽고 있는 말씀, 내가 들은 교훈이 모두 진실한 말씀이구나!” 이 사실을 우리는 실천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우리가 깨우치는 진리는 머리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행동으로 알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에 자유함을 얻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내가 지금 진실한 교훈을 따라 살고 있다고요. 내가 믿는 말씀들이 모두 맞는 말씀들이었다고요. 그럴 때 우리 마음 속에 담대한 마음이 주어집니다. 다른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8) “Yes, everything else is worthless when compared with the infinite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his sake I have discarded everything else, counting it all as garbage, so that I could gain Christ.”

 이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자유한 사람입니다. 그동안 내가 붙들고 있던 모든 것들을 버렸으니까요. 이런 사람이 자유한 사람입니다. “朝問道면 夕死라도 可矣니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이런 말씀과는 차원이 다른 자유함입니다.

끝으로, 제가 좋아하는 David Livingstone (1813-1873, 영국)이 남긴 말 하나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God, send me anywhere, only go with me. Lay any burden on me, only sustain me. And sever any tie in my heart except the tie that binds my heart to Yours.”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교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이고, 이런 사람이 진리를 발견한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 모든 것에 자유한 사람입니다. 부담이 많이 가시지요? 우리는 지금 부담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너무 부담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3/25/2020 | 사순절 새벽기도 25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8:12-20

오늘 말씀의 요절은 12절 말씀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I am the light of the world)!” 그리고 나머지 말씀들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당신이 세상이 빛이라고 하면 빛이 되는 것입니까? 그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이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셨는지 궁금하시지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William Holman Hunt (1827-1910, 영국)가 그린 ‘세상의 빛 (The Light of The World)’이라는 제목의 그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에 등불을 들고 어느 집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주변은 온통 어둡습니다. 어느 계절인지 모르겠지만 문 앞의 풀들이 마른 것으로 보아 늦가을 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방은 어둡고 예수님 주변만 빛이 있습니다. 예수님 머리 뒤에 빛나는 물체는 보름달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나는 후광입니다. 그런데, 이 집의 문은 닫혀 있고, 문 앞에 마른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집에 사는 사람의 상태가 이렇게 황폐하고 말라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문에 손잡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지만, 손잡이가 없어서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고 예수님을 들어오시게 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Look!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 If you hear my voice and open the door, I will come in, and we will share a meal together as friends.” (요한계시록 3:20)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의 손을 보십시오. 저런 자세로는 문을 세게 ‘꽝꽝’ 두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손가락으로 ‘똑똑’ 하고 두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얼굴은 그 안에서 나는 작은 인기척이라고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 진지한 표정입니다.

이왕 홀만 훈트의 그림을 보았으니 하나 더 볼까요? 이 그림은 ‘The Shadow of Death (죽음의 그림자)’라는 그림인데요. 상당히 영감이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배경을 보면 장소는 작업실인 것 같습니다. 각종 공구들이 벽에 걸려 있고요. 바닥에는 대패밥이 어지럽게 널려 있습니다. 큰 톱도 보이고요. 때는 해가 저물어가는 늦은 오후인 것 같습니다. 석양빛이 예수님의 작업실을 비추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을 하다가 잠깐 쉬면서 팔을 벌리고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뒤로 그림자가 진 것이 보입니다. 그 옆에 있는 여자는 누군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윌리엄 버클리 (William Barclay, 1907-1078, 영국) 목사님의 책에서 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Barclay 목사님은 이 여자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우연히 예수님의 뒤에 생긴 그림자를 보면서 깜짝 놀라는 장면이라고 이 그림을 해석했습니다. 마리아가 놀라는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석양 빛을 받아 생긴 예수님의 그림자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의 그림자 같이 보입니다. 마리아는 우연히 그의 작업실에서 아들의 죽음의 그림자를 본 것입니다. 참 화가의 영감 (inspiration)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William Holman Hunt는 성화 (sacred paintings)를 주로 그렸습니다. 이 그림들 말고도 그가 남긴 좋은 그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세상에 빛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으며, 생명의 빛을 얻는는다고 했습니다 (12절). 어둠 속에 사는 사람은 윌리암 홀만 훈트의 그림에서 보았듯이 사방이 컴컴한 어둠 속에 갇혀 삽니다. 그 사람의 마음 상태가 황폐합니다. 그런데,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물론 이 말씀에도 ‘생명’과 ‘빛’이 연결되어 있습니다만,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참 빛이 있었습니다. 그 빛은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췄습니다. 참 빛이 되신 말씀이 세상에 계셨습니다. 그분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세상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10, 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one who is the true light, who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 He gave life to everything that was created, and his life brought light to everyone (참 빛이신 그 분이, 모든 사람에게 빛을 주시는 그분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의 생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빛은 곧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I came that they might have life abundantly, 요한복음 10:10)”고 하신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믿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나가서 빛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14)”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빛은 곧 ‘생명의 빛’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희는 이 세상에 빛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로 사는 것인지 모릅니다. 무엇이 올바로 사는 것인지 모르니까 공부를 남보다 많이 해도 그것이 성공의 도구가 되고, 남보다 더 좋은 스펙을 쌓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남보다 많은 것을 소유해도 무엇이 올바로 사는 것인지 모르니까 자기가 가진 resource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줄을 모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나는 빛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빛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잘못되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며, 어두움 속에 살면서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어두움이 그를 눈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만 합니다.” (요한일서 2:9-11, 6) "Those who say they live in the light should live their lives as Jesus did."

사도행전에 보면 처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불렀다고 했는데, 저는 이 말 속에 좋은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부른 것은 안디옥 (Antioch)에서 처음 있었던 일입니다 (사도행전 11:26). 시리아에 있는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박해가 시작되니까 이들 피해서 피난 갔던 사람들이 안디옥으로, 또 소아시아로 (지금의 터키에 있는 도시들) 갔습니다. 이 사람들을 ‘디아스포라 (diaspora)’라고 부릅니다. 이 ‘디아스포라’들이 어떻게 살았을까요? 서로 함께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 드리고, 또 서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아 주고,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요? 그 때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는 바울과 바나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안디옥 교회에서 일년동안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훈련을 잘 받았으니까 안디옥 교회가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크리스천 (Christians)’이라는 이름 속에 예수님의 인격과 사상과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가끔 어떤 분들이, 또 목사님들 중에도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초대교회 사람들이 정말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거든요?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있을 수 없는 경의로운 일입니다.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이 초대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이제 이 시대에 우리가 크리스천의 삶은 어떤 것인 것 세상에 보여줘야 합니다. 여러분이 크리스천의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면 교회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겠지만, 보여 주지 못하면 교회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데, 그 증거가 뭡니까? 당신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까? 증거를 보여 주시오.” 어제 새벽기도 말씀에서도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라!” 이렇게 말씀하면 되는 것이냐고요. 예수님께서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지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지금 똑 같은 질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You judge me by human standards, but I do not judge anyone (너희는 인간적인 기준을 가지고 나를 판단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누구도 판단하지 않는다).” (15절) 사람들이 ‘human standards’를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16에서 ‘human standards’에 대해서 말하잖아요? “나는 이제부터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지 않겠습니다. 전에는 내가 그리스도를 세상적인 관점으로 판단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I have stopped evaluating others from a human point of view. At one time I thought of Christ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How differently I know him now)!” 지금 사람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할 때도 사람들은 당연히 ‘human standards’을 가지고 증명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일은 ‘human standards’를 가지고 증명할 수 있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본질 상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는 것을 어떻게 ‘human standards’를 가지고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증명했습니다. “너희 율법에 두 사람의 증인이 있으면 그것은 옳다고 되어 있다. 나에게 두 개의 증인이 있다. 하나는 나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보내신 나의 아버지이시다 (I am one witness, and my Father who sent me is the other).” (18절)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얼마나 화를 냈겠습니까? 오늘 읽은 성경 마지막 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he was not arrested, because his time had not yet come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20절)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을 체포하고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지만,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분은 유대 지도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지배하고 계신다는 것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도, 그리고 우리의 삶도, 우리의 미래도 지배하고 통제하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오늘도 이 믿음을 가지고 마음에 큰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3/24/2020 | 사순절 새벽기도 24

정죄함이 없는 삶

요한복음 8:1-11

성경 속에는 좋은 이야기도 많이 있지만, 나쁜 이야기도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추하고 악한 모습들이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야기, 덫을 놓고 함정을 파는 이야기, 상대를 곤란한 상태에 빠뜨려 고소하는 이야기들이 성경속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시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예수님께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병을 고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인기가 사람들에게서 날로 높아지자 유대 지도자들은 이것을 시기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지도자들의 의도를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여지 없이 면박을 주기도 했습니다.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통쾌하게 생각하는 말씀이 마태복음 22:29입니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오류를 범한 것이다 (You are completely wrong! You don't know what the Scriptures teach. And you don't know anything about the power of God).”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함정이 빠뜨리려고 왔다가 오히려 굴욕을 당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주장은 부활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하여 가르치셨거든요.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곤란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와서 “이것 보시요. 부활이 있다고요? 말도 안 됩니다. 당신 말 대로 부활이 있다면 이런 경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면서 질문을 했습니다.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제일 맏형이 결혼을 했는데 자식이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유대나라 관습에서는 둘째가 형수하고 살아서 아이를 낳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둘째도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렇게 마지막 동생까지 형수하고 살았는데,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만일 부활이 있다면 그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원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모세 오경 외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렇게 다섯권만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이 없다고? 그럼 출애굽기 말씀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출애굽기 3:6)’ 라는 성경 말씀은 어떻게 된 것이냐? 너희들은 모세 오경만 믿는다면서 출애굽기에서 그런 말씀이 있는 것도 읽어보지 못했느냐?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런 터무니 없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통쾌하지요?

자,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 볼까요? 예수님께서 아침 일찍 성전 뜰로 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 들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웬 사람들이 이렇게 성전 뜰에 모여 있었을까요? 그런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런 생각들을 해 보면 성경 읽기가 훨씬 더 재미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습관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에는 올리브 산에서 기도하시고,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오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막 말씀을 시작하시는데, 저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이 여자는 그 시간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온 것입니다. 보통은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5절) 그 당시에 이런 일들이 심심찮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른 새벽에, 이 여자를 붙잡아 예수님께 끌고 온 것을 보면 유대 지도자들이 이 사건을 기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7절 말씀을 보세요. “They were trying to trap him into saying something they could use against him.”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무슨 말이라도 하게 해서 그것을 구실 삼아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덫을 놓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이렇게 악하다니까요.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고, 한 여자를 이렇게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여자의 인권이나 수치심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들의 목적에 이 여자를 이용할 뿐입니다. 이 악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의 율법 (말씀)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장 철저하게 지킨다는 사람들입니다. 어찌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악한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저는 주변에서 이런 악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목사, 장로 다 소용 없습니다. 자기들의 목적에 따라서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들 많이 보았습니다. 자기들의 목적이 따라서 사람을 짓밟는 사람들 많이 보았습니다. 거짓말하고, 중상 모략하는 사람들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디 가면 중요한 직책을 모두 맡고 있으니 교회에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이 말씀을 보세요. “Cling to your faith in Christ, and keep your conscience clear. For some people have deliberately violated their consciences; as a result, their faith has been shipwrecked (믿음을 굳게 지키고 깨끗한 양심을 지키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양심을 져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믿음은 결국 파선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1:19) FKCC 여러분들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교회만 나올 것이 아니라, 난 하나님을 믿는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을 지키십시오. 그래야 세상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허리를 굽혀 땅에 뭐라고 쓰셨습니다. 무슨 글자를 쓰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다. 너희들 중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 (All right, but let the one who has never sinned throw the first stone)!” (7절) 이렇게 말씀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뭔가를 쓰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있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떠나가고 예수님과 거기 홀로 서 있는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9절) 다른 번역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 지도자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한 사람씩 슬그머니 빠져 나가버리고 그 여자 앞에는 오직 예수만 남았다.” (현대어성경)

이 여자를 끌고 왔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허를 찔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든지, 치지 말라고 하든지 둘 중 하나를 말할 줄로 예상했습니다.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고 고소하면 되고, 돌로 치라고 하면 사랑과 용서를 말한다더니 당신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당신은 위선자라고 비난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제 삼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 아세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시험을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마련해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0:13)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면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1:5)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 아닌가요? 저는 청년들이 정말 새벽에 무릎 꿇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되겠지!” 하면서 뭉그적거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피할 길을 구하라고 하시고, 지혜를 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얼굴이 잘 생겨서 반듯한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바른 길을 걸어가는 반듯한 청년들을 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웬 일인가요? 그렇게 기세가 등등해서 간음한 여자를 끌고 왔던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다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너희 중에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먼저 이 여자를 돌라 치라”고 했더니, 모두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의 양심을 찌르는 권위가 있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묻습니다. “너를 정죄하는 사람들이 있느냐?” “주님,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돌아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1절) 아니, 예수님께서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면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죄가 없어지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Fear swept through the crowd as they saw this happen. And they praised God for sending a man with such great authority.” ① (마태복음 9:8)/①Greek for giving such authority to human beings 여기서 말하는 ‘큰 권세 (great authority)’는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위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 예수님의 권위 있는 한마디 말씀으로도 충분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친히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런 예수님을 보면서 “보라, 이 사람은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복음 1:29)” 라고 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So now there is no condemnation for those who belong to Christ Jesus).” (로마서 8:1)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께 속해 있으면 정죄함이 없습니다. 혹시 방송으로 이 설교를 듣고 있는 분들 중에 ‘정죄함 (condemnation)’ 혹은 ‘죄의식 (guilty feeling)’으로 힘들어 하고 괴로워하는 분들 있습니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럴 수 있어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상대방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줬거나, 아니면 나의 실수로 상대방에게 큰 피해를 입혔거나, 아니면 이유를 말할 수 없는 어떤 일 때문에 괴로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그 분이 말씀하셨잖아요?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잖아요?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죄는 모두 용서를 받습니다. 이것은 빈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화목제물로 자기 목숨을 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을 믿는 것입니다.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을 믿는 일 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자유함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3/23/2020 | 사순절 새벽기도 23

내 안에 흐르는 생수의 강

요한복음 7:37-52

오늘 말씀은 ‘초막절’이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날이 ‘초막절 마지막 날’이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초막절 마지막 날, 전국에서 모여 온 순례자들이 각자 ‘shelters (tabernacles)’를 만들고 축제를 벌이면서, 기대감이 최고조에 올랐을 때,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대로,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다.” (37-38절)

과연 이 말씀 속에 무슨 뜻이 들어 있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은 ‘Anyone who is thirsty (누구든지 목이 마른 사람)’은 모두 자기에게 오라고 초대하셨습니다. 목이 마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지금 말하고 있는 ‘목마름’이 단순히 물 한 컵 마시면 해결될 수 있는 그런 목마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의 삶에 만족이 없는 ‘목마름’을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이 방송을 보고 계시는 FKCC 여러분들은 지금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러분 속에 이 ‘목마름’이 있으신가요?

지금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목마름’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주님, 그런 물이 있으면 나에게 주십시오.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요한복음 4:15) 사실 이 여자도 자신에게 ‘목마름’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물 가에서 만난 한 유대인의 말을 듣고 자기에게 ‘목마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에게 ‘목마름’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야 ‘목마름’을 해결할 것 아닙니까?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에게 ‘목마름’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의 말씀 속에서 나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보게 되고, 진정한 인간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들을 자기에게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어디서 들은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사야 55:1-3 말씀입니다. “너희 목마른 사람아, 다 와서 마셔라. 돈이 없는 사람도 와서 마셔라. 포도주와 우유를 마시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마셔라. 어찌하여 너희는 진정한 음식이 못 되는 것을 위해 돈을 쓰느냐? 어찌하여 만족시켜 주지도 못할 것을 위해 애쓰느냐?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영혼을 살찌우는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내게 와서 귀를 기울여라.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살 것이다. 내가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며, 다윗에게 약속한 복을 너희에게 주겠다.” 우상숭배에 빠진 유다 백성들에게 이사야를 통해 내가 생명을 줄 테니 나에게 돌아오라고 호소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더라도 제대로 된 포도주와 우유를 먹어야 하는데, 너희는 지금 건강을 해치는 junk foods를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말을 들으면 내가 너희들에게 질 좋은 포도주와 우유를 free로 주겠다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Come to me with your ears wide open. Listen, and you will find life. I will make an everlasting covenant with you. I will give you all the unfailing love I promised to David.” (3절) 내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깨지지 않는 영원한 언약을 맺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들어 보십시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Anyone who is thirsty may come to me! Anyone who believes in me......”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사람, 곧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사야를 통해서 약속하신 ‘영원한 언약’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을 맺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Rivers of living water will flow from his heart”라고 했습니다. ‘생수의 강’이 그의 마음으로부터 흘러 넘친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경들이 이 말씀을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배’를 ‘heart’로 번역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within them (그 속에서)’ 이렇게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Out of his belly will flow rivers of living water (Berean Literal Bible)” 이렇게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또 NASB은 이 말씀을 “From his innermost being will flow rivers of living water”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의 감정을 지배하는 곳이 배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문화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과 감정이 ‘마음 (heart)’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차이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배에서, 혹은 그의 마음에서, 혹은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친다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계속 궁금합니다. 그런데, 39절 말씀에 보니까 “(When he said ‘living water,’ he was speaking of the Spirit, who would be given to everyone believing in him. But the Spirit had not yet been given, because Jesus had not yet entered into his glory)”라고 나와 있습니다. ‘생수 (living water)’라는 말이 성령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그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신다 (abide or remain)’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성령은 ‘예수님의 영 (Jesus’ spirit)’입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 내주하신다는 것은 곧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그분이 그 사람 속에 들어 오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나에게 와서 마시라!” 고 말씀하시는 그분이 내 속에 ‘remain or abide’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어려운 말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 말씀 염두에 두고 생각하고, 질문하십시오. 언젠가는 이 말씀이 이해되신 때가 올 것입니다.

한 말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생수의 강’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속에 거하시는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이 약속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나님께로 가신 후에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자기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성령은 이렇게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온 사람들에게, 그것도 명절 마지막 날,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이 한껏 높아진 날,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대로,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장소가 어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만 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장소가 나와 있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요한복음 7:14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전 뜰에 올라가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Jesus went up to the temple courts and began to teach)”라는 말씀이 있는 것으로 봐서 예수님께서 지금 성전 뜰에서 가르치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GOD'S WORD® Translation이라는 번역성경에 이렇게 분명하게 번역을 했습니다. “On the last and most important day of the festival, Jesus was standing [in the temple courtyard]”

여러분, 이 말씀을 상상해 보십시오. 유대인들의 성전은 유대인의 역사와 함께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 비친 성전은 더 이상 성전 역할을 못하는 성전이었습니다. 이런 성전에 대한 분노가 성경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에 비유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1:14).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성전에 대한 분노를 직접 이렇게 표출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마가복음 11:17) 

이 성전을 뒤에 두고, 성전 뜰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이 너희에게 주지 못하는 ‘life-giving water (생명의 물)’을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이런 선전 포고를 하신 것입니다. 이제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살리지 못하는 제사, 죽은 제사, 내용은 없고 형식만 남아 있는 제사는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전이 아니라 내가 목마른 사람들에게 직접 생명의 물을 줄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게 될 것이다” 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의 제자로 사는 사람들은 정말 생수의 강을 그 속에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요. 저는 목사로서 이 시대를 보면서 우려되는 점이 많습니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인간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오고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이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다행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잡힌다고 해도 인간관계의 단절의 현상은 가속화 될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묻는 사람들이 속출할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속출할 것입니다. 성경 속에 해답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이, 교회가 세상을 선포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모르는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말해 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