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2020 | 사순절 새벽기도 18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길

요한복음 6:41-51

최권능 목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본명은 최봉석입니다. 최권능 목사가 평안북도 어느 산골 마을에서 전도하던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마침 화전(火田)을 만들기 위해 산에다 불을 질렀는지 연기가 하늘에 자욱했습니다. 화전민들은 열심이 땅을 일구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야 하겠는데, 일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전도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좋은 수가 없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최권능 목사가 배를 움켜 잡고 큰 소리로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나 죽네!” 하면서 땅바닥에 나뒹굴었습니다. 그 소리를 일하던 사람들이 달려왔습니다. “뭐요? 무슨 일이요?” 최권능 목사는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예수 안 믿으면 사람은 다 죽소!” “뭐 어째? 이놈의 누굴 놀리는거야?” “야 이놈아, 예수 믿으면 예수가 밥먹여 주냐?” 화가 난 사람들은 최권능 목사를 때리렸고 했습니다. 최권능 목사는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빨리 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신이다!” 하면서 품 속에서 마패 같은 것을 꺼내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모두 그 자리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메달은 전도 목사로 파송 받을 때 받은 메달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땅에 엎드려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싹싹 빌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이 불쌍해서 전도를 하러 온 하나님의 사신이요. 내 말대로 하면 여러분 모두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까 누가 예수 믿으면 밥 먹여 주냐고 했는데, 맞소. 예수가 밥 먹여 줍니다.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요. 그러니 이 마을에 교회를 지으시요.” 그렇게 해서 그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의 의미는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떡’ ‘생명의 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을 듣고 “이 사람은 틀림없는 요셉의 아들 예수야. 우리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가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지?” 하면서 이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수군댔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게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다.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부활시킬 것이다 (4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no one can come to me unless the Father who sent me draws them to me, and at the last day I will raise them up.” 이 말이 무슨 뜻인가요? “너희가 나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낸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낸 사람들은 모두 내 말을 알아 듣는다” 이런 뜻이잖아요?

이 말씀을 한번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지난 주일에도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생각과 다르다고요. 달라도 보통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땅에서 높은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생각과 다릅니다. 이런 말씀도 했습니다. “How un-search¬able are His judgments and unfathomable His ways (그의 판단은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고, 그의 길은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로마서 11:33, NASB)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 듣겠습니까?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대 물리학자들의 이론을 물리학의 기초가 없는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뜻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더 잘 알게 하시며, 여러분의 마음을 밝혀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비해 두신 것을 깨닫도록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복이 얼마나 풍성하고 놀라운지 깨닫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I ask God, the glorious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to give you spiritual wisdom① and insight so that you might grow in your knowledge of God. / ①Or to give you the Spirit of wisdom I pray that your hearts will be flooded with light so that you can understand the confident hope he has given to those he called--his holy people who are his rich and glorious inheritance).” (에베소서 1:17-18) 무슨 뜻입니까? ‘spiritual wisdom and insight’ or ‘the Spirit of wisdom and insight’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영적인 지혜와 분별력’, ‘성령의 지혜와 분별력’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이 맞습니까? 맞잖아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성경 말씀은 다 그렇잖아요? 표면적인 의미가 있고, 그 말씀 속에 들어 있는 깊은 의미가 있잖아요? 그 깊은 의미를 ‘spiritual meaning (영적인 의미)’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성경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예전에 한국의 어느 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이곳에 안식년으로 와 있었습니다. 아내와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이곳에 와서 무척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남자가 이상한 뉴에이지 사상에 빠져서 집에서도 하얀 도복 같은 것을 입고, 벽에 빨간 점을 붙여 놓고 하루 종일 명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뉴에이지 단체가 세계대회를 열었는데, 그 대회에도 갔다 올 정도였습니다. 부부 관계도 아주 아슬아슬했습니다. 좀 특이하게 만난 부부였습니다. 이 사람이 학원에 강사로 나갔을 때 지금 아내가 학원 수강생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째어째해서 결혼하고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주변에서 보기에 두 사람의 관계가 아슬아슬했습니다. 부인은 교회를 열심히 나왔고요. 남편은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 일년이란 시간을 보내다 보니까 그 남편도 교회 사람들 하고 같이 어떤 때는 밥을 먹기도 하고 그런 사이가 되었습니다. 저도 부인이 원했기 때문에 그 집에 자주 간 편이었습니다. 부인은 저하고 자꾸 만나고 이야기도 하고 하면 남편에게 믿음이 좀 생길까 하는 기대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 부인이 가족 모임에 출석을 했는데, 자기 집에서 가족모임을 하자고 해서 그 집에서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그 남자에게 성경공부 인도를 시킨 것입니다. 저도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지금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 때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있었는데요. 이 남자가 성경공부를 인도합니다. 전혀 성경의 내용은 모르고 일반 책을 공부하듯이 성경을 읽고, 문맥을 살피고, 성경을 완전히 교과서 공부하는 식으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전 그 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야, 성경을 이렇게 읽을 수도 있구나!” 전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그래서그 말씀 속에 깊은 영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이 이 남자가 알 까닭이 없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내가 교회에 와서 기도도 많이 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던 것 같습니다. 그 아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교회에 고맙다고 선물을 해 놓은 것이 성가대 가운입니다. 지금 입는 것 말고 그 전에 입었던 가운이 그 아내가 해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흐르니까 저는 그 부부에 대한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소식이 들리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남자가 교회 전도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얼마 있지 않으면 목사가 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는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졸업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시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다.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부활시킬 것이다.” (44절) 예수님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다” 이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끌어 주신 사람은 모두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매우 도전적인 말씀입니다. 지금 너희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끌어 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6:66)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죽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이 여기 있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48-50절) 이 말씀이 맞습니까?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었지만, 만나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만나가 계속 하늘에서 내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보세요. 여호수아 5:10-12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리고 평야에 있는 길갈에서 진을 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달 십사 일 저녁에 그 곳에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 이튿날, 백성들은 그 땅에서 자라난 식물 중 몇 가지를 먹었는데, 그것은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인 무교병과 볶은 곡식이었습니다. 이 음식을 먹은 그 날부터 만나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날 이후 만나를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만나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는 일시적 (temporary)으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린 것이었습니다. 이 만나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만나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만나는 참 양식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만나는 그림자 (shadow)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참 양식은 실체 (reality)입니다. 만나는 장차 참 양식이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이고, 참 양식는 그 약속의 성취입니다. 만나와 참 양식을 한번 도표로 정리해 볼까요?

구분              만나                 참 양식 (생명의 양식)
places           wilderness 
giver             God                 Jesus Christ (God)
objects          Israelites         all believers
duration        temporary        permanent
results          death               eternal life
type              copy (replica)   reality (real one)
약속과 성취     promise           accomplishment
상태              imperfection     perfection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 외에는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그 사람만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46-48절) 예수님께서 ‘생명의 양식’이시고, ‘생명의 빵’을 주실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생명의 빵’을 먹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믿음은 성경 (말씀)을 읽음으로써 (들음으로써) 주어집니다 (로마서 10:17).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격이 의외로 쉽고 간단합니다. 그 길이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를 잘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으로 믿어 의롭다 함을 얻으며,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For it is by believing in your heart that you are made right with God, and it is by confessing with your mouth that you are saved).” (로마서 10:10)


3/16/2020 | 사순절 새벽기도 17

하나님의 일

요한복음 6:28-40

지난 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찾아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27절)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28절)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믿는 것이다.” (29절) 사람들이 또 이렇게 질문합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을 하십시오. 무슨 표적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여러분, 사람들과 예수님과의 대화가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까? 뭔가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에 소통이 잘 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뭔가 좋은 일, 선한 일을 해야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We want to perform God's works, too. What should we do?” 여러분, 이런 말씀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청년이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지금까지 다 지켜 왔습니다.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 (공동번역, 현대어성경)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만일 네가 완전해지길 원한다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와서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9:20-21)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이렇게 묻는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네가 가진 것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청년과 예수님과의 대화도 그렇게 매끄러운 것 같지 않습니다. 이 청년은 어렸을 때부터 율법교육을 잘 받은 것 같습니다. 충실하게 율법의 규정들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먼 무슨 선한 일을 더 해야 합니까?” 이렇게 물렀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선한 일을 더 해야 하느냐고 묻고 있는데, 예수님은 엉뚱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두 경우 모두요. 한번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한번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이웃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이유는 두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든지, 한쪽을 귀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마태복음 6:24)

Erich Fromn (1900-1980, 독일)이라는 정신분석학자가 있습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이분의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제일 재미있게 읽은 책이 ‘The Art Of Loving (사랑의 기술, 1956)’이라는 책이었고요. 또 잘 알려진 책이 ‘To Have Or To Be (존재냐 소유냐, 1976)’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Fromn은 인간의 삶에 두가지 모드 (mode, 양식)의 삶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Having Mode (소유양식)’의 삶이 있고, 다른 하나는 ‘Being Mode (존재 양식)’의 삶이 있다고 했습니다. 좀 어렵습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잘 들어 보시면 우리 삶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Having Mode’의 삶을 사는 사람은 무엇을 많이 소유함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길 가에서 꽃을 봐도 그냥 놔 두지 않습니다. 기어코 꺾어다가 자기 방 화병에 꽂차 놓습니다. “야, 참 꽃이 아릅답다!” 이렇게 말하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데요. ‘Being Mode (존재 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길 가에 핀 꽃을 꺾지 않고 그냥 보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성경에서 보면, 이 예수님을 찾아 왔던 부자 청년이 ‘소유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존재양식’의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삶의 양식이 바뀌는 것입니다. ‘소유양식’의 삶에서 ‘존재양식’의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게 잘 안 바뀌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 말씀 하나 보시겠습니까? “I have no one else like Timothy, who genuinely cares about your welfare. All the others care only for themselves and not for what matters to Jesus Christ. But you know how Timothy has proved himself. Like a son with his father, he has served with me in preaching the Good News.” (빌립보서 2:20-22) 디모데 같은 사람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디모데는 삶의 양식이 ‘존재양식’으로 바뀐 사람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일에 빠져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없어요. 그런데, 디모데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으로 삶의 양식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와서 무슨 일을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을 믿으라고, 이 말은 너희들의 삶의 양식을 바꾸라고, 무슨 일을 해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는 생각을 내려 놓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믿으라고, 그래서 너희들의 삶의 양식을 바꾸라고,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관심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주신 말씀도 같습니다. “네가 소유양식의 삶을 사는 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삶의 양식을 바꿔라. 네가 가진 것 다 이웃에게 줘 버리고, 나를 따르라, 그래야 너의 삶의 양식이 바뀔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못 알아 듣고 계속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무슨 표적을 보여 주십시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1절) 이 말은 그러니 당신도 이런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말을 받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내린 빵을 준 사람은 모세가 아니다. 나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된 빵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빵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이 빵을 우리에게 항상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단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2-35절)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자신을 ‘생명의 빵 (the bread of life)’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빵은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해 주는 빵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10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My purpose is to give them a rich and satisfying life.” (NLT) “I have come so that they may have life, and may have it abundantly.” (NET)

이 말씀을 읽고 있으면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이 쓴 시편 23편 말씀입니다. “You anoint my head with oil; my cup overflows (주께서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5절) 다윗은 구약시대의 사람이니까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으로 메시아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희미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윗이 “내 잔이 넘친다”고 말했던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서 내 생명이 부유하고 만족하게 되는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삶이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풍성하게 된다’는 말은 삶의 의미가 모두 드러난다, 충족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게에서 파는 빵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만 부르고, 살만 찝니다. 하지만,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 우리의 삶이 풍성해집니다. 삶의 의미가 분명해지고 삶의 목적이 생깁니다. 내가 왜 사는지 삶의 이유가 생깁니다. 말씀을 읽어도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히브리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들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복음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유익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4:2) “But it did them no good because they didn't share the faith of those who listened to God①.” (NLT) / ①Some manuscripts read they didn't combine what they heard with faith


3/15/2020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10

영적인 훈련 4 Train Yourself for Godliness

창세기 1:1-5

우리는 지금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기간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절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카톨릭 교인들은 고기 (meat)를 이 시간에 먹지 않습니다. 그대신 생선을 먹습니다. 여기에 착안해서 맥도날드에서 ‘Fish Burger’를 내 놓았다고 합니다.

이 기간에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에 집중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절제하는 데 크게 도움이됩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나의 삶을 반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다가가는 훈련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필요한 훈련이 아니라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꼭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하나님의 영감 (inspiration)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디모데후서 3:16)”고 했습니다. 신학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씌어졌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는 것을 가지고 오래 동안 논쟁을 벌였습니다. 요즘에 번역된 성경들을 보면 이 말을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특별한 책입니다. 성경에 씌어진 글자 (말씀) 속에 하나님의 영감 (inspiration)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생각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세 가지 꼭 알아야 할 것들을 말씀 드리겠습니다.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말씀에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생겨라!” 그러자 빛이 생겼습니다 (3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지만 땅은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했고,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빛이 생겨라 (Let there be light)!” 하고 말씀하셨는데, 빛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말씀이 아니라 받아들임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하나님의 말씀에 창조의 능력이 있다고 했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면 우리 삶에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말씀이 가지고 있는 창조의 능력이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합니다.

이사야가 자기 백성들에게 이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리면, 그리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오직 그 물이 땅을 적셔, 그것으로 식물이 싹이 터 사람들의 먹을 양식으로 자라난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도 그러하다. 내 말은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않는다. 내 뜻을 이룬 뒤에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다한 뒤에야 내게로 돌아온다 (The rain and snow come down from the heavens and stay on the ground to water the earth. They cause the grain to grow, producing seed for the farmer and bread for the hungry. It is the same with my word. I send it out, and it always produces fruit. It will accomplish all I want it to, and it will prosper everywhere I send it).” (이사야 55:10-11) 특히 마지막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곳에서 그 말씀이 번창하게 됩니다. 성장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게 ‘prosper’입니다. 명사형은 ‘prosperity’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실천해 나가면 우리의 삶이 성장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번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을 한번 보세요. 베드로가 헬라어를 몰랐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유세비우스(Eusebius, 263-339)의 교회사 (Church History)에 의하면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관이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벗어나면 베드로는 헬라어를 몰랐기 때문에 설교를 할 수 없어통역관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어떻게 초대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되기로 생을 결단했던 베드로는 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베드로의 삶 속에 많은 굴곡이 있습니다. 실수도 많이 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시몬), 사탄이 자꾸 너를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하는구나. 난 네가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 않게 해 달라고 계속 기도하고 있다.” (누가복음 22:31)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imon, Simon, Satan has asked to sift you as wheat. But I have prayed for you, Simon, that your faith may not fail.”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과 기도가 베드로의 인생을 성장 시키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저는 틀림 없이 여러분의 삶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때까지 힘든 일들을 참고 기다리고 견디십시오. 성경에는 그렇게 참고 견디면서 우리에게 크리스천의 성품 (character)이 만들어진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5:3-4).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생각하고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야, 여기에 이렇게 좋은 말씀이 있었구나!” 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에만 빨간 줄을 긋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도 자기 생각과 맞는 말이 설교 중에 나오면 “목사님, 오늘 설교에 큰 은혜 받았습니다” 하면서 좋아합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말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생각과 다른 설교에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잖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생각과 다르다니까요? 우리 생각과 같지 않다니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My thoughts are nothing like your thoughts, and my ways are far beyond anything you could imagine. For just as the heavens are higher than the earth, so my ways are higher than your ways and my thoughts higher than your thoughts).” (이사야 55:8-9)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높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깊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밖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나중에 말씀 드리겠지만, 물리학에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아인슈타인이나 뉴턴 같은 사람과 대화가 되겠습니까? 수준 차이가 너무 나서 대화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똑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은 참으로 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아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분의 의논 상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11:33-34) “How unsearchable are His judgments and unfathomable His ways!” (33절, NASB)

여러분은 인류 역사에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를 한 사람 뽑는다면 누구를 뽑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879-1955)을 뽑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 못지 않게 주목을 받는 사람이 아이작 뉴턴 (Issac Newton, 1642-1727)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볼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 비친 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나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매끈하게 닦인 조약 돌이나 예쁜 조개껍데기를 발견하고 기뻐하지만,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발견되지 않은 상태로 내 앞에 놓여 있다 (I do not know what I may appear to the world; but to myself I seem to have been only like a boy, playing on the seashore, and diverting myself, in now and then finding a smoother pebble or a prettier shell than ordinary, while the great ocean of truth lay all undiscovered before me).”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윤리 책에서 처음 이 말씀을 읽었을 때, 그 때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저는 뉴턴이 말한 ‘진리의 바다’라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뉴턴이 진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의 부유함은 ‘unsearchable’ ‘unfathomable’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백성에게 전달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Don't be afraid. Just stand still and watch the LORD rescue you today. The Egyptians you see today will never be seen again. The LORD himself will fight for you. Just stay calm).” (출애굽기 14:13-14)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 바다 앞에서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해 싸울 테니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얼마나 다릅니까?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릅니다. 사람이 죽게 되었으면 뭐라도 해 봐야지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왜 우리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느냐고 한바탕 토론을 벌여야 맞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중세기의 신학자 중에 안셀름 (Anselm, 1033-1109, 이탈리아)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Credo ut intelligam.” 영어로 번역하면, “I believe so that I may understand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가 용기를 잃어 버리고 주저 앉아 있을 때, 우리가 낙심되어 있을 때, 우리가 절망할 때,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위로하고,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성경에 보면 종종 하나님의 말씀이 ‘떡’이나 ‘빵’ 혹은 ‘양식’에 비유됩니다. 요한복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단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I am the bread of life. Whoever comes to me will never be hungry again. Whoever believes in me will never be thirsty).” (요한복음 6:35) “빵’이나 ‘떡’이나 ‘밥’은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에 비유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힘을 공급한다는 뜻입니다.

겁과 두려움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마라, 나다 (Don’t be afraid. I AM is here)!” (요한복음 6:20)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생명을 보장 받을 수 없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그는 주님의 위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Be encouraged, Paul. Just as you have been a witness to me here in Jerusalem, you must preach the Good News in Rome as well).” (사도행전 23:11) 주님의 말씀을 잘 들어 보십시오. “바울 너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가진 사람이야. 그 때까지 아무도 네 생명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내가 너를 지킬 것이다.” 이런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 속에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다 (요한복음 14:23-24)”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머리 속에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게 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성경을 읽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도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물러 여러분을 성장 시키고, 열매를 맺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말씀의 향기가 배어 나게 하십시오.


3/14/2020 | 사순절 새벽기도 16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6:16-27

‘오병이어’의 표적이 있은 후 사람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 왔고, 예수님을 찾으려고 아우성들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예수님은 산에 계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말씀들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어렵고 힘들 때가 있지만, 그 때가 위험한 때는 아닙니다. 정말 우리 인생에 있어서 위험한 때는 우리가 성공했을 때입니다. 성공했을 때 자칫 사람이 교만해 지거나 처신을 잘못해서 아주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자기가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 (If you think you are standing firm, be careful that you don't fall)!” (고린도전서 10:12)”는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창 자기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고, 인기가 높아졌을 때 사람들 틈에 있지 않고 산으로 가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받아서 어느 때가 위기이고, 어느 때가 기도해야 할 때인지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그 시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밤중에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노를 저어서 한 5km 정도 갔을 때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세게 일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Meanwhile, the disciples were in trouble far away from land, for a strong wind had risen, and they were fighting heavy waves (마태복음 14:24)”라고 기록했습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He saw that they were in serious trouble, rowing hard and struggling against the wind and waves. About three o'clock in the morning Jesus came toward them, walking on the water. He intended to go past them.” (마가복음 6:48)

그 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배를 향하여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제자들은 기뻐서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였고,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이 말씀도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좀 다르게 나와 있습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다!”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좀 찬찬히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조용하던 호수에 갑자기 바람이 불고 거센 파도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어저께까지 괜찮았는데, 오늘 갑자기 예상치 않았던 일이 터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수 김광석도 그렇게 죽었습니다. 저녁까지 후배들과 술을 마시고,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다음 날 김광석이 죽은 것입니다. 같이 있었고, 같이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멘붕에 빠졌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그의 죽음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충분히 그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김광석이 왜 죽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이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67장 가사에 그런 가사가 있잖아요? “질그릇같이 연약한 인생 주 의지하여 늘 강건하리.” 난 이 가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잘 표현한 것 같아서 부를 때마다 큰 은혜가 됩니다.

구약 전도서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Yet God has made everything beautiful for its own time. He has planted eternity in the human heart, but even so, people cannot see the whole scope of God’s work from beginning to end.” (전도서 3:11)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이 그들의 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 송에 영원을 심어 놓으셨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알도록 해 놓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계획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모릅니다. 그래서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불안하니까 매 순간순간마다 내 미래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오늘 말씀을 잘 보면, 제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고난의 현장에 찾아 오셨습니다. 자신이 어려울 때 그의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어려울 때 자기 제자들과 함께 고난을 함께 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찾아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죽었다고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낯선 분의 모습으로 마리아와 함께 계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이 상심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나그네의 모습으로 그들과 함께 길을 걸으셨습니다. 우리가 힘들어 하는 고난의 현장 속에 주님은 함께 계십니다. 몸이 아파 고생하는 사람과, 감옥에 갇혀 있는 외로운 사람들이 하나님을 쉽게 만나는 이유는, 그들의 고난과 아픔과 외로움 속에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제자들을 찾아 오신 예수님께서 “나다,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he called out to them, ‘Don't be afraid. I am here!①’ / ①Or The ‘I AM’ is here; Greek reads I am. See Exod 3.14 이 말씀은 좀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 말이 출애굽기 3:14에 처음 나오는데요.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 말로 ‘YHWH’을 ‘야훼’ 혹은 ‘여호와 (Jehovah)’라고 불렀습니다. 억지로 발음을 하니까 ‘야훼’ 혹은 ‘여호와’라고 발음하지 하나님을 말하는 히브리어는 모두 자음으로 되어 있어 발음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할 때는 ‘아도나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말로 ‘주’ 혹은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으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 (I AM who I AM)”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을 Greek으로 번역하면서 하나님의 이름 ‘I AM’을 번역해서 ‘ἐγώ εἰμι (ego eimi)’라고 번역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영어로 “I am here”라고 했지만 사실은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I AM is here”라고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하나님은 믿겠는데, 예수님은 못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같은 분입니다. 이런 성경 말씀이 예수님을 믿고 받아 들이는데 도움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내가 행한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지는 음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히 있어서 영생을 주는 음식을 위해 일하여라. 인자는 너희에게 그런 음식을 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자가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26-27절) 예수님의 말씀은 “왜 너희들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표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먹을 것을 주는 자로 알았느냐? 썩어 없어질 음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을 주는 음식을 위해서 일하여라” 이런 뜻입니다. “Don't be so concerned about perishable things like food. Spend your energy seeking the eternal life that the Son of Man can give you.” (27절)

맞습니다. 오늘 새벽, 이 말씀이 우리들의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힘 (energy)을 무엇을 위해 써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이 일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일이겠다” 싶은 그 일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비야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때 청년들이 한비야의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비야가 보통 사람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독특한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비야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계획해야 할 지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가슴이 떨리는 일을 생각하고 그 일을 결정하라고요. 참 좋은 말이지만, 가슴만 떨려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가슴이 떨리는 일이라도 이기적인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남을 돕는 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일, 그리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일과 관계되는 일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For God the Father has given me the seal of his approval.” (27절)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은 어디서 얻을 수 있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얻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양식은 오직 예수님만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어디서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만 그 양식을 주실 수 있다고 ‘도장 (seal)’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미쳐야 합니다. 예수님께 빠져야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빠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갈 수밖에 없고, 그런 사람이 예수님께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양식을 나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일에 참여합니다. 그 일이 나의 소명이 되고, 나의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고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살면 됩니다.


3/13/2020 | 사순절 새벽기도 15

5,000명을 먹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6:1-15

오늘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해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말씀입니다. 물고기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가지고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12 광주리가 남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으로 단번에 유명해졌습니다. 병을 고치는 기적을 일으킨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이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심지어 예수님을 왕으로 만들자는 움직임까지 있었으니까요 (15절). 사람들의 생각은 단순합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우리는 먹을 것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는 요한복음 6:26 말씀입니다. “Jesus answered, ‘Very truly I tell you, you are looking for me, not because you saw the signs I performed but because you ate the loaves and had your fill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내가 행한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아니라 단순히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New International Version)

‘표적 (sign)’은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사건이나 물체를 말합니다. 차를 몰고 가다보면 신호등을 만납니다. 빨간 불이 켜져 있습니다. 이 빨간 불은 차를 멈추라 사인입니다. 차를 멈추고 기다리 빨간 불이 잠깐 노란불로 바뀌다가 초록색 불로 바뀝니다. 초록색 불은 멈춰 있는 차들에게 가라는 사인입니다. 그 밖에도 많은 도로 표지판들이 있습니다. 운전자들은 이 도로 표지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문서에 사인 (signature)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인을 한다는 것은 그 문서에 적인 내용들에 대하여 내가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인 이 사건은 무슨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사인입니다. 무슨 사인 속에 들어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말했습니다. ‘이분은 세상에 오실 그 예언자가 틀림없다 (Surely, he is the Prophet we have been expecting).’” 사람들이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예, 사람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들의 소원과 꿈을 이루려고 한 것은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우리는 예수님의 꿈과 예수님의 비전을 나의 꿈과 비전으로 삼고 그 비전을 이루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결코 예수님을 통해 나의 꿈과 비전을 이루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2,000년 전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들의 꿈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만들자!” “그가 거부하더라도 강제로 왕으로 만들자!” 이런 말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메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 때는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 들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나온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그 때는 날이 저문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날이 저물었고, 인가도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서 이 사람들을 돌려 보내 각자 먹을 것을 사 먹도록 하자고 예수님께 제안합니다 (마태복음 14:15, 마가복음 6:36. 누가복음 9:12).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다소 엉뚱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면 될 것 아니냐?” 예수님의 이 말에 제자들은 깜짝 놀라면서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14:17, 마가복음 6:38, 누가복음 9:13)”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주로 알고 있는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빌립아, 이 사람들이 먹을 빵을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어떻게 하나 보시려고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6:5-6)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한번 읽어 볼까요? “He was testing Philip, for he already knew what he was going to do (예수님께서 빌립을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해야 할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he’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he’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he’도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세 번째 나오는 ‘he’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인 것 같지요? NIV 성경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He asked this only to test him, for he already had in mind what he was going to do (예수님은 빌립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그렇게 물으셨지만, 예수님은 벌써 그가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마음에 가지고 계셨습니다).” NKJV에는 아예 오해가 없도록 “But this He said to test him, for He Himself knew what He would do (예수님께서 이렇게 빌립에게 말씀하신 것은 벌써 예수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he’가 누구냐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빌립이면 어떻고 예수님이면 어떻습니까? 누가 되었든 상관 없지 않나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말씀을 이렇게 따져 가면서, 또 다른 버전들과 비교해 가면서 읽으면 말씀을 깨닫는 재미가 있습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The laws of the LORD are true; each one is fair. They are more desirable than gold, even the finest gold. They are sweeter than honey, even honey dripping from the comb) (시편 19:9-10) 시편 19편은 다윗이 쓴 시편이거든요?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뜻을 깨우쳐 가는 재미를 알았습니다. 사도행전 13:22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나님께서 다윗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통해서 나의 뜻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늘 궁금합니다. “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을까?” 누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까요?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푹 빠져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의 인격에 감화를 받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 우리는 “But this He said to test him, for He Himself knew what He would do”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처한 상황을 주관하시는 분이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God is in control (하나님께서 통제하신다)” 이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그런 것입니다. 날은 저물고, 많은 사람들이 배가 고파 먹을 것이 필요하고, 돈은 없고,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빈 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누가 해결해야 하는지, 자기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이 말씀을 읽어 보세요. “But this He said to test him, for He Himself knew what He would do.” 우리의 절망적인 상황을 해결해 주실 분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 자신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는 대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상황 속에 개입해 들어오시기를 구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늘 우리가 절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보세요. 모세가 도망자가 되어 나이 80살이 될 때까지 기다리셨잖아요? 그때는 모세가 미디언 광야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던 때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미디언 족장 이드로의 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이제 자기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꿈은 내려 놓은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은 어떻습니까? 아버지 집을 떠나 자기 사업을 한답시고 덤벙대다가 가진 것 모두 잃어버리고 거지가 되어 더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곤두박질했습니다.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의 생에 개입하십니다. 용기를 내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또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나사로가 병에 걸려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도 이틀이나 시간을 끕니다. 마치 나사로가 죽기를 바라는 것 같이요. 실제로 예수님께서 나사로 집에 도착했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4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미 장례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절망의 시간에 예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And for your sakes, I'm glad I wasn't there, for now you will really believe. Come, let's go see him.” (요한복음 11:15) 예수님은 그 절망의 자리에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요한복음 11:40)

여러분, 아직 이 말씀을 기억하고 계시지요? “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이다).” 우리에게는 당황스럽고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상황이 오히려 우리 삶에 개입해 들어오실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여러분은 지금 무슨 일로 걱정하고, 무슨 일로 절망하고 있습니까? 덴마크의 철학자 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 (Despair is the sickness unto death)’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절망에서 믿음을 붙잡는 사람은 그 절망을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축복으로 바꾸어 나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