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2020 | 사순절 새벽기도 14

참 안식이신 예수님

마태복음 11:16-30

예수님께서 자기 시대를 어떻게 보셨을까요? 우리도 우리 시대를 보면서 생각이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이 왜 이 모양이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보신 자기 시대의 모습은 아이들이 장터에서 다른 친구들에게 불평을 하는 모습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야, 왜 내가 노래를 부르는데 가만히 있어? 춤을 춰야지!” “야, 왜 내가 슬픈 노래를 부르는데 왜 안 울어? 울어야지!”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더니, 사람들이 ‘그 사람은 귀신이 들린 사람이야’ 이렇게 비난하고, 내가 와서 먹고 마셨더니 ‘저 사람을 봐! 아주 게걸이 들렸구만! 저 사람은 술꾼이야. 세리들과 노는 꼴이라니!’하고 비난한다.” (18-19절) 예수님께서 보신 자기 시대의 모습은 올바로 반응할 줄 모르는 시대였습니다. 올바로 반응할 능력을 상실한 시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는 시대였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서 박수를 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They were completely amazed and said again and again, ‘Everything he does is wonderful. He even makes the deaf to hear and gives speech to those who cannot speak.’” (마가복음 7:37)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Fear swept through the crowd as they saw this happen. And they praised God for sending a man with such great authority.” (마태복음 9:8) “중풍병자는 일어나 침상을 들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으며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을 본 적이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마가복음 2:12)

지도자들이 문제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제사장들, 사두개인들, 이런 지도자들이 문제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깎아 내리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일반 대중들의 관심이 예수님을 향하고 있는 것을 시기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끼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보시오. 우리 계획은 하나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온 세상이 저 사람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2:19) 그리고,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고 계시는 것도 불만의 원인이었습니다. 자기들은 병을 고치지 못하는데, 예수님은 병을 고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려냈다는 소문을 지도자들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지도자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평소에도 사람들을 보내서 예수님 주변을 감시하게 했고,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 유대에 총독으로 와 있던 빌라도도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모였을 때,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너희는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아니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냐?’ 빌라도가 이렇게 말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자기에게 넘겨 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7:17-18) “도대체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악한 일을 저질렀느냐?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죽을 죄를 찾지 못했다. 따라서 매질만 하고 풀어 주겠다.” (누가복음 23:22)

예수님은 자기를 비난하는 지도자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 행한 일 때문에 옳다는 것이 증명된다 (But wisdom is shown to be right by its results)” (마태복음 11:19) 예수님의 말씀은 그 지혜가 옳은 지혜인가, 틀린 지혜인가 하는 것은 그 지혜를 듣고,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내가 성경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 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성경의 진리를 따라 살고, 그래서 내 삶이 변화 되는 것은 곧 성경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의 진리를 잘 따르지 않고, 내 삶이 변화되지 않으면 그것은 곧 성경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가장 많이 기적을 베풀었던 가버나움, 벳새다, 고라신, 이 세 도시들을 꾸짖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도시 사람들이 많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Then Jesus began to denounce the towns where he had done so many of his miracles, because they hadn't repented of their sins and turned to God).” (20절) ‘성 프랜시스’ (1181-1226. 이탈리아)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보통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라고 합니다. ‘아시시’는 지명입니다. ‘아시시 (Assisi)’ 출신 ‘프란치스코’라는 말입니다. 프랜시스가 남긴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이 기도문이 유명합니다. 프랜시스가 제자들을 데리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전도를 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한 제자가 프랜시스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 나는 큰 죄인이지.” “아내,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들은 어떻게 합니까? 선생님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프랜시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큰 죄인이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면서 어디 적합한 사람이 없나 하고 찾으시다가 나 프랜시스를 찾으신 거야. 하나님께서 내가 나의 사랑을 이 사람에게 쏟아 붓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쏟아 부었더라면 그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지 보여주기 위해서 나 같은 죄인을 선택한 것이야!”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 도시를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너희들에게 베풀었던 그 많은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 베풀었더라면 그 도시들이 지금 모두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책망은 세 도시 사람들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을 향한 책망으로 들어야 합니다. 어저께 새벽에 그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듣고 배우는 것들은 예언자들도 보지 못하던 것들이라고요 (마태복음 13:17). 지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그렇게 귀한 것인데,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옳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19절).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실천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지친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짐은 가볍다 (28-30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라고 초청한 사람들은 ‘those who are weary and carry heavy burdens (지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에 이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시대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자기에게 오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마가복음 6:34) 이 말씀에서 ‘목자’는 누구이고, ‘양’은 누구입니까? ‘목자’는 그 당시 지도자들입니다. 양은 그 당시 백성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얼마나 도전적인 말씀입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은 지도자들이 줄 수 없는 안식과 쉼을 내가 주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해당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those who are weary and carry heavy burdens’입니다. 사는 것이 힘에 버겁습니다. 얼마 전에도 어느 자매가 “목사님, 저 어쩌면 한국으로 돌아 가야 할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공부를 마쳐도 미래가 밝지 않습니다. 어둡습니다. 청년들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힘들어요. 하지만, 이만큼이라도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고, 견딜 수 있고 지킬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 없으면 어디서 위로를 받고, 어디서 힘을 얻고, 용기를 얻나요? 나는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자기에게 오라고 부르시는 그 부르심 때문에, 그래도 금요일이 되고, 주일이 되면 “교회 가서 예배드려야지!” 하면서 교회로 나오는 그 믿음 때문에, 지금 여러분의 삶이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새벽에 나가서 말씀 듣고 기도해야지!” 하는 그 작은 믿음이 우리를 지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3/11/2020 | 사순절 새벽기도 13

예수님께 걸려 넘어진 사람들

마태복음 11:1-15

오늘 말씀은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힌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감옥에 있는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오신다고 했던 분이 바로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Are you the Messiah we've been expecting, or should we keep looking for someone else)?”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어 오라고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 있습니다. “혹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이제 자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서 오직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 왔습니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1:7).”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입니다 (마태복음 3:11).”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망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30).”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당신 메시아입니까?” 하고 물으면 요한은 단호하게 “나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20)”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것은 예수님을 의심했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니요, 자기가 지금까지 믿어 왔던 것을 확인하고 (to confirm) 싶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의 의도를 알아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말하여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고, 문둥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진다고 하여라. 나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4-6절)

왜 예수님은 “내가 메시아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시고, 너희가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요한에게 가서 말을 하라” 이렇게 말했을까요? 여러분, 아래 표를 한번 보시지요. 먼저 나오는 말씀은 이사야 35:5-6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 때에 보지 못하는 사람이 다시 보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다시 들을 것이다. 다리를 저는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사람이 기쁨으로 노래할 것이다. 광야에 샘물이 흐르고, 메마른 땅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And when he comes, he will open the eyes of the blind and unplug the ears of the deaf. The lame will leap like a deer, and those who cannot speak will sing for joy! Springs will gush forth in the wilderness, and streams will water the wasteland)."

이 말씀을 본문 말씀 마태복음 11:4-6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말하여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고, 문둥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진다고 하여라 (Go back to John and tell him what you have heard and seen--the blind see, the lame walk, the lepers are cur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to life, and the Good News is being preached to the poor. And tell him, ‘God blesses those who do not turn away because of me).’ 두 말씀이 상당히 중복되지 않습니까?

이사야 35:5 말씀이 “When he comes, he will......” 이렇게 시작되지요? 여기서 ‘He’는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 시대가 되면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또 마태복음 11:4-6 말씀은 지금 예수님께서 어떤 사역을 하고 계시는지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35:5-6 말씀은 미시아 시대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고, 마태복음 11:오른쪽의 말씀은 이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지금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감옥에서 그의 제자들이 전해주는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뻤을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이 맞았고, 자기의 사역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그는 얼마가지 않아서 목이 잘려 죽습니다. 젊은 사람이 일찍 죽는 것을 요절(夭折)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요절하는 사람을 보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건강하게 사는 것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생각이 다릅니다. “누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 크리스천들의 대답은 늘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그 사명을 성취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어떻습니까?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행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도 요절한 사람이니까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가 후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에 대하여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보라, 내가 너보다 앞서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는 너의 길을 준비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그 누구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아무리 낮은 사람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 (10-11절)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일종의 예수님께서 강조법을 사용하신 것이죠. 둘째는, 세례 요한은 예언자입니다. 요한이 죽음으로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가 끝이 나고, 복음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예언자들과 율법에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이다 (For all the Prophets and the Law prophesied until John, 13절)”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고 싶어했지만 보지 못했다.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 싶어했지만 듣지 못했다.” (마태복음 13:17) 요한은 메시아 시대를 예언했던 한 사람의 예언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이 메시아 시대를 경험하지 못했고, 메시아 시대를 즐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에서는 아무리 낮은 사람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예언자들도 감히 볼 수 없었던 메시아 시대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을 더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있게 성장하고 있다. 힘있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12절) 이 말씀이 개역성경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침노한다’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 이런 말들이 천국과 어울리는 말들이 아닙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from the time John the Baptist began preaching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①, and violent people are attacking it.” (New Living Translation) / ①Or the Kingdom of Heaven has suffered from violence 또 ESV에는 이 말씀이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suffered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폭력에 시달려 왔으며, 폭력적인 사람들이 힘으로 천국을 취해왔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IV 성경에는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subjected to violence, and violent people have been raiding it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늘 천국은 폭력에 시달려 왔으며,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천국을 침입해 왔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이런 뜻입니다. “지금까지 천국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천국이 무슨 힘이 지배하는 나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천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다. 이제 내가 천국은 어떤 나라인지 알게 해 주겠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이 누구라고 하셨는지요. 예수님은 천국이 어떤 나라인지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은 모두 천국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께서 만들어 내신 교육 방법 (teaching methods)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3, 9-10)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태복음 13:31-3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8:2-3)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께 걸려 넘어졌습니다. 예수님께 걸려 넘어진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께 실망하고 돌아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자기들이 희망하는 것들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선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잘못하면 예수님께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복음을 잘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 걸려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신실한 제자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대와 꿈을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꿈을 우리의 꿈을 받아들여 예수님과 같은 꿈을 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전을 우리도 품어 예수님의 비전을 나의 비전으로 삼고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언젠가 예수님께 실망하고 예수님께 걸려 넘어져 예수님을 떠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3/10/2020 | 사순절 새벽기도 12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

마태복음 10:34-42

오래 전에 William Smith Clark (1876-1886)이라는 사람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Massachusetts에서 나고 Massachusetts에서 죽은 분입니다. 아주 훌륭한 화학자, Botany and Zoology 학자입니다. Amherst College의 교수로 있었습니다. 일본이 자기 나라의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 초빙할 정도로 학문적으로 저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방과 후에 일본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친다는 조건을 걸로 삿보로 농과대학의 초빙을 수락했습니다. 이 사람이 일본 청년들에게 남긴 유명한 말이 “Boys be ambitious!”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사람의 영향을 받아서 수많은 인재들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 ‘우치무라 간조 (內村鑑三, 1861-1930)’라는 인물이 나왔습니다. 또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그가 낸 책 중에 “나는 왜 크리스천이 되었는가?” “회심기”는 명저 중 명저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hrist, And All for God (나는 일본을 위해, 일본은 세계를 위해,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그 말이 ‘우치무라 간조’의 비석에 새겨 있다고 합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렇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질서가 잡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치무라 간조’가 이런 말을 생각하게 된 것은 아마도 성경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생명이나 죽음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22-23) 간단히 정리해 보면 “모든 것은 나를 위해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우치무라 간조’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은 가족에 대한 개념을 바꾸셨습니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고,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마태복음 12:48, 50) 가족의 개념처럼 바뀌기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 집, 우리 가족, 우리 부모, 우리 형제의 개념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가족의 개념마저 달라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마가복음 2:22)”고 본 것입니다. 한 핏줄에서 낳다고 해서 한 가족이 아니라 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가족 (God’s family)’이라고 본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부모를 더 사랑하면, 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아들과 딸을 더 사랑하면, 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 (37절) 부모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 아무리 귀하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밑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크리스천의 삶에 적용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You therefore must endure hardship as a good soldier of Jesus Christ. No one engaged in warfare entangles himself with the affairs of this life, that he may please him who enlisted him as a soldier).” (디모데후서 2:3-4)

실제로,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성경적인 가치관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치관이 큰 충돌을 불러 일으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는 놈들은 조상도 몰라보는 놈들이다. 교회에 나라는 놈들은 부모도 모르는 놈들이다!” 교회는 이런 비난을 받아야 했고,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희생 (십자가)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 자기의 목숨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잃게 될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얻게 될 것이다.” (38-39절) 어제 여러분들에게 소개했던 ‘하형록’ 목사의 간증이 생각납니다. 신구약 성경을 모두 읽고 나서 얻은 결론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인데, “네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는 질문이 생겼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그 간증을 들으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통은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을 해석할 때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이웃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말씀을 예수님의 생애에 비춰서 해석해 본 것입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예수님은 자기 몸을 희생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은 “자기를 희생하라는 뜻이다” 이런 결론을 얻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If you refuse to take up your cross and follow me, you are not worthy of being mine. If you cling to your life, you will lose it; but if you give up your life for me, you will find it.” (38-39절, New Living Translation) Jim Elliot (1927-1956)이 남긴 말이 생각납니다.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what he cannot lose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하여 어차피 간직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닙니다).”

우리가 간직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것에 집착을 해도 간직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붙잡고 있지 말고 놓아 버려야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짐 엘리엇은 휘튼 칼리지 4학년 때 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놓아 버리는 (희생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을 통해 배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에 집착한 사람은 그것을 잃게 될 것이고,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사람은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I tell you the truth, unless a kernel of wheat is planted in the soil and dies, it remains alone. But its death will produce many new kernels--a plentiful harvest of new lives. Those who love their life in this world will lose it. Those who care nothing for their life in this world will keep it for eternity.” (요한복음 12:24-25) 예수님은 스스로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시기로 하셨셨습니다. 그 덕분에 그 자신이 생명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삶을 이해하는 사람, 성경의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나에게 합당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정말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필요한 사람은 다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다수이겠습니까? 다수 아닙니다. 늘 소수입니다. 하나님은 늘 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미션을 주시고, 이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옆의 사람들 쳐다볼 것 없습니다. 옆의 사람들 봐도 그저 주일날 교회에 나가는 정도인데..... 맞습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과 비교할 것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3/9/2020 | 사순절 새벽기도 11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마태복음 10:24-33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 (Stu¬dents are not greater than their teacher, and slaves are not greater than their master)”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면 우리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그가 쓴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종이 자기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한 법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13:16-17)

우리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자들이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제자들도 다른 사람들의 발을 닦아 주는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도 응당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는데, 제자들이 고난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높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두목 바알세불이 들어갔다는 오해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와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보면 예수님보다 더 높은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자리에 서 계시는데, 섬김을 받으려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칭찬이 아니라 비난을 받으셨는데, 우리는 비난보다 칭찬을 더 받으려고 합니다. “고난은 주님이 받으시고 영광과 존귀는 제가 받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십자가를 졌으니 너희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하고, 내가 섬김의 삶을 살았으니, 너희도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목사님의 추천으로 하형록 목사라는 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정말 눈물 나는 간증이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이 분이 아주 성공적인 삶을 살다가 갑자기 심장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이 사람은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몇 번이나 읽고 난 후 이 사람이 이런 결론을 냈습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희생이구나! 희생의 마음을 가지고 그 마음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이로구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보여 주신 것이 결국 이런 것이구나!” 이 사람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결국 심장 이식해야만 살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심장 기증자를 기다렸습니다. 가까스로 심장 기증자가 나왔습니다. 의사가 하는 말이 정말 젊고 건강한 심장이라고 하면서 당신은 운이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방을 나가려고 하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옆 방에 한 여자가 들어왔는데, 그 여자가 필요로 하는 심장도 바로 이런 심장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여자는 2일 안에 심장 기증자를 만나지 못하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의사의 손을 잡고 한참 생각하다가 나에게 줄 심장을 저 옆방의 여자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의사는 당황하면서 내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고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이 사람은 괜찮다고, 저 여자는 2일 안에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니, 나에게 줄 심장을 저 여자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기적적으로 젊고 좋은 심장을 만나 생명을 구했습니다. 3주 후에 이 사람에게도 심장 기증자가 나왔는데, 의사가 그러더랍니다. “이 심장은 그리 좋은 심장이 아니고 그냥 쓸만한 심장 (a marginal heart)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수술한 의사가 이 사람에게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자기에 온 좋은 심장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자기는 안 좋은 심장을 이식하다니요? 이 사람은 성자입니다”라고 간증 속에 나와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형록 목사는 이식수술을 받고 6년을 더 삽니다. 그 후에 다시 좋은 심장을 받아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간증을 듣기를 원하는 분은 제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보시면 됩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 하형록 목사라는 분의 간증이 생각났습니다. 이 분은 정말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 주시는 희생을 하셨는데, 예수님의 종으로서 당연히 희생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자기에게 올 심장을 얼굴도 모르는 옆 방의 여자에게 내 준 것입니다. 하형록 목사의 귓전에 이런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네가 이웃을 위해 희생을 하기로 했다니? 그럼 정말 희생을 할 수 있는지 어디 증명해 봐!”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 마라. 영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6, 28절) 영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지 사람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라틴어로 ‘Coram Deo’라는 말을 아시지요? ‘하나님 앞에서 (before God)’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은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원래 ‘위선자’라는 말이 ‘hypocrites’라는 말인데, 이 말은 ‘actor on a stage (무대 위해서 연기하는 배우)’라는 뜻이라고 하잖아요? 배우가 자기의 본심과 다르게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회칠한 무덤 같은 사람들 (people like whitewashed tombs)’ 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27). 우리 크리스천들이 무서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모두 ‘위선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몸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까지도 죽일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어디나 계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디나 계시다고 할 때 ‘Omnipresence’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고 할 때는 ‘Omnipotence’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라고 할 때는 ‘Omniscience’라고 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동전 한 개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가 아니고서는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질 수 없다. 심지어 너희 머리카락의 수까지도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므로 두려워 마라. 너희는 참새 여러 마리보다 훨씬 더 귀하다.” (29-31절)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모든 것이 하니님의 control 속에 있습니다. “God is in control”입니다. 참새 한마디의 생명도 하나님의 control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참새보다 더 귀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control 속에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오늘 마지막 말씀은 이런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인정하는 사람은, 나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앞에서 그를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32-33절)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의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부인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말은 나의 삶이 하나님의 주관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계서 내 삶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외로울 때, 힘들 때, 아무도 내 옆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절망적인 상황이 주어질 때, 이 때 나를 지켜주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계획이 있으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계신다. 내 삶도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다 (God has a plan and God is in control of everything. my life is perfectly in God’s control)!”

얼마 전에 잠언 3장에 있는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 그러면 이것이 너의 몸에 보약이 되어, 상처가 낫고 아픔이 사라질 것이다.” (잠언 3:5-8)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do not depend on your own understanding. Seek his will in all you do, and he will show you which path to take. Don’t be impressed with your own wisdom. Instead, fear the Lord and turn away from evil. Then you will have healing for your body and strength for your bones.”

D. L. Moody (1837-1899, Northfield, Massachusetts)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시대를 위해서 귀하게 쓰신 사람입니다. 무디가 쓰던 책들을 정리하던 중에 무디가 사용했던 성경에 이상한 표시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표시가 무슨 표시인지 한동안 몰랐다고 합니다. 성경 곳곳에, 어떤 절에는 ‘P’자가 씌어 있고, 어떤 절에는 ‘T’자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글자들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그와 함께 무디 성경학교에서 일했던 R. A. Torrey (1856-1928) 목사가 그 약자들이 무슨 뜻인지 알아냈다고 합니다. ‘P’자는 proved (증명되었다)의 약자였고, ‘T’자는 tested (시험해 보았다)의 약자였다고 합니다. 어떤 곳에는 tried (시도해 보았다)의 약자였다고 말한 곳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잠언 말씀에 ‘T’자를 한번 표시해 놓으십시오. 정말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했더니, 그것이 나의 삶에 보약이 되었는지, 그것이 나의 삶을 건강하게 지켜주었는지 한번 test를 해 보시지요. 그리고 나중에 정말 이 말씀이 사실로 증명이 되면 그 때 그 옆에 “이 말씀이 사실로 증명이 되었다”고 ‘P’자를 써 넣으시기 바랍니다.


3/8/2020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9

영적인 훈련 3 Train Yourself for Godliness

누가복음 11:1-4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지금까지 ‘영적인 훈련’에 대하여 2차례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한 번, 기도에 대하여 한 번 설교했습니다. 오늘 기도에 대하여 한 번 더 설교하고, 다음 주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한 번 더 설교하려고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럼 이렇게 기도해라” 하면서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주기도문 (The Lord’s Prayer)’입니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기도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주기도문’은 좀 더 짧은 기도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This is how you should pray”라고 말씀하시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예수님의 입에서 이 기도문이 나왔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기도문이 예수님의 입에서 그렇게 술술 나온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평상시에 이렇게 기도하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 ‘주기도문’이 더 감동적으로 마음에 다가옵니다.

기도에 대한 이런 저런 좋은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아버지여’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면서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Our Father in heaven, 마태복음 6:9)’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라고 나와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친구 (야고보서 2:23, 이사야 41:8, 역대하 20:7)’라고 칭찬했던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주 (Lord)’라고 불렀습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을 친구처럼 친하게 대했던 사람이지만 (출애굽기 33:11), 모세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고 ‘주’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인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이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전에는 (예수 믿기 전에는) 본질적으로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We all formerly were by nature children of wrath).” (에베소서 2:3)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ou received God's Spirit when He adopted you as his own children. Now we call him, ‘Abba, Father.’” (로마서 8:15) ‘아바’는 아람어로 ‘아빠’라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는 말입니다. 비록 ‘아바’라는 말이 ‘주기도문’에 나오진 않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바(마가복음 14:36)’라고 부르신 것으로 보아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또한 그리스도와 공동의 상속자입니다 (And since we are his children, we are his heirs. In fact, together with Christ we are heirs of God's glory).” (로마서 8:17)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축복이 정말 엄청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동일한 상속을 받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상상이 가시나요? 간혹 드라마에서 보면 그 집 아이들과 양자로 들어온 아이가 차별을 받습니다. 법적으로는 아들이지만, 친 아들은 아니기 때문에 무의적으로 그른 차별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양자로 들어온 우리와 본래 아들이신 예수님과 조금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양자로 들어 온 우리가 받는 상속이 똑 같습니다. 그래서 NIV 성경에는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f we are children, then we are heirs-heirs of God and co-heirs with Christ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들입니다. 그리스도와 똑 같은 권리를 갖는 상속자들입니다.”

아무리 기도에 대한 지식이 많고, 어느 정도 기도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신 이유를 모르면 기도의 깊은 강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찬송가 302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이 찬송가 가사를 보십시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 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번 헤아려 안 보나/많은 사람이 얕은 물 가에서 저 큰 바다 물결보고 찰싹 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 가네/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저 큰 은혜 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어 깊은 데로 가라 망망한 바다로.”

참 좋은 가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은 강에 비유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깊은 강을 경험하지 못하고 항상 얕은 물가에 서 있습니다. 깊은 은혜의 강으로 들어갈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찬송가 가사를 보면서, 기도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도의 세계는 밑을 알 수 없는 깊은 강과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깊은 강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늘 얕은 물가에서 찰싹 거리는 작은 파도를 보면서 걱정하고 불안해 합니다. 기도의 깊은 강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This is how you should pray. Our father in heaven......”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따라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벌써 오래 전입니다만, 제가 중국에서 단기선교를 마치고 대원들과 함께 중국의 재래시장을 구경했습니다. 신기한 것들이 많이 있었고, 먹을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왔는지 ‘꽃제비들’이 나타나서 저를 보고 “큰아버지, 큰아버지, 돈 좀 주세요!” 그러면서 따라옵니다. 전혀 모르는 아이들 저를 보고 ‘큰아버지’라고 부르니까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나 알아? 내가 왜 너의 큰아버지야?”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아이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서 나를 ‘큰아버지’라고 부르니까 어색하고 불편했습니다. 그러다가 단속반이 눈에 띄면 순식간에 어디론가 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길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 모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마태복음 7:21)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베풀지 않았습니까?’ 그 때, 내가 분명하게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썩 물러나라.’” (마태복음 7:22-23) 예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들을 버젓이 행하면서 어떻게 ‘주님, 주님’ 이렇게 부를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난 너희들을 모른다. 불법을 행한 자들아!”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기도의 깊은 강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래야 나머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세요. 왜 우리가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억지로 부를 수야 있겠지만 어색합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마치 한번도 본적이 없는 ‘꽃제비들’이 저를 ‘큰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과 관계가 설정되지 않았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되는 것입니까? 원칙적으로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교회에 나온 지 오래 되었어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들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일들을 작은 일부터 시작하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말을 가볍게 듣지 마십시오.

지난 주에 빌립보서 4장 말씀을 가지고 기도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씀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지요? 그때 꼭 하고 싶었는데, 못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형제 여러분, 선함을 추구하며 가치가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기 바랍니다. 참되고, 고상하고, 옳고, 순결하며, 아름답고, 존경할 만한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4:8-9)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바울은 왜 기도에 대한 말씀 끝에 이 말씀을 기록했을까요? 바울은 기도자들이 이런 것들로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것들을 한번 보십시오. 모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들입니다. 바울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이런 것들을 추구하고, 이런 것들을 실천하면서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You can be sure of this. The LORD set apart the godly for himself. The LORD will answer when I call to him. Don't sin by letting anger control you. When you are on your beds, search your hearts and be silent (Interlude) Offer sacrifices in the right spirit, and trust the LORD.” (시편 4:3-4) 조용히 잠자리에 누워서 자기 자신을 반성해 보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이렇게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 기도의 응답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이 있어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쓴 유명한 시편 15편에서도 같은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Who may worship in your sanctuary, LORD? Who may enter your presence on your holy hill? Those who lead blameless lives and do what is right, speaking the truth from sincere hearts.” (시편 15:1-2)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자격이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의 삶이 올바른 사람, 진실한 마음으로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 드릴 자격이 있고,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갑니다.

꼭 읽어야 할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서 예물을 드릴 때, 네 형제가 너에게 나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제단에 예물을 놓아 두고,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후에 다시 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복음 5:23-24) 주변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께 찬송을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찬송을 들으시겠습니까? “난 너를 모른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먼저 그 사람과 화해를 해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기도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한 단계 upgrade되고, 기도의 깊은 강을 경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번 사순절 기간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축복의 기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들을 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기도의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