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3/2/2020 | 사순절 새벽기도 5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믿음
마태복음 9:1-8
예수님께서 병을 잘 고치신다는 소문이 온 유대 땅에 퍼졌습니다. 유대 땅뿐만 아니라 시리아에까지 예수님의 소문이 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모든 곳을 다니시며 유대인들의 회당 안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갖가지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시리아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병든 사람을 모두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는데,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 귀신들린 사람, 간질병에 걸린 사람, 그리고 중풍에 걸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 그리고 요단 강 건너편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복음 4:23-25)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서는 항상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못 고칠 병이 없었습니다. 위에서도 예수님은 사람들의 갖가지 병들을 고쳐 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지금처럼 의술이 발달한 시대에도 못 고치는 병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슨 병이든지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와서 고침을 받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이 중풍병 환자를 침상에 누인 채 예수님께 데려 왔습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면 사람들이 이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가기 위해서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달아 내렸다고 합니다. 이 중풍병에 걸린 환자는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안심하여라, 아들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2절)”하고 말씀하셨습니다. NLT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eeing their faith, Jesus said to the paralyzed man, "Be encouraged, my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여기서 예수님께서 보신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요? 어떻게 하든지 이 사람을 낫게 해 주려는 친구들의 믿음, 이 믿음을 귀하게 보신 것일까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오고,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직접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포기하지 않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구멍을 내고 예수님께 이 친구를 달아 내렸습니다. 그 무엇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행동을 하게 했을까요? 바로 평생 움직이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 있어야 했던 이 사람의 고통을 불쌍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남의 아픔과 고통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자기 아픔으로 받아 들인 이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높이 평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While Jesus was here on earth, he offered prayers and pleadings, with a loud cry and tears, to the one who could rescue him from death. And God heard his prayers because of his deep reverence for God.” (히브리서 5:8) 이 말씀에 나오는 ‘cry (울음)’ ‘tears (눈물)’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우는 울음, 우리가 흘리는 눈물과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우리가 흘리는 눈물과 아픔을 모두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울 때, 우리가 눈물 흘릴 때 우리를 달래 주시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 말씀을 하나 더 보겠습니다. “This High Priest of ours understands our weaknesses, for he faced all of the same testings we do, yet he did not sin. So let us come boldly to the throne of our gracious God. There we will receive his mercy, and we will find grace to help us when we need it most.” (히브리서 4:15-16)
예수님은 이 친구들의 믿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남의 눈물을 나의 눈물로 아파하면서 받아 들일 수 있는 믿음을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믿음생활 어디에서도 이기주의는 설 곳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믿음은 설 곳이 없습니다. 대신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남의 문제를 내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만이 설 자리가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모두 이런 믿음으로 훈련 받고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세상이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우리 조국이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2:2)”라고 했습니다. 2,000년 전에 사도 바울이 로마에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 나오는 글입니다. 그가 본받지 말라고 했던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이기주의로 물들어 있는 세상입니다. 2,000년 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이 세상을 바꿔야 합니다. 이기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벌써 여러분들 속에 들어와 있는 이기주의,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이 생각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다 보면 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냥 이 사람의 병을 고쳐 주지 않고, 먼저 네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왜 이 말씀을 해 가지고 율법학자들로부터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비난을 받았을까요? 영어로 ‘blasphemy’라는 단어가 있는데 ‘신성모독’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권위가 있으시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 사람에게 명령합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6절) “그러자 그 사람이 일어나 집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사람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7-8절)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경악을 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의 눈으로 이 광경을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Fear swept through the crowd as they saw this happen”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분이라면 아까 이 분이 하신 말씀도 빈말이 아니겠구만!”
3/1/2020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8
영적인 훈련 2 Train Yourself for Godliness
빌립보서 4:6-9
드디어 내일부터 사순절 새벽기도가 시작됩니다. 앞으로 40일동안, 정확하게는 36일동안,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집중적으로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세계를 위해 기도하면 좋은 영적인 습관이 길러지지 않겠습니까? 전에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 듣고, 기도하는 일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을 더 좋아하고, 우리는 가만히 기도하는 것보다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화면을 보면서 괄호 안에 무슨 말이 들어가면 좋을 지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 )이고, 우리 ( )의 호흡이다 (Prayer is the dialogue with God and the breath of our soul).” 또 기도에 대하여 여러분이 잘 아는 이런 성경 말씀도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카전서 5:16-18)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Pray continually (기도를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라, NIV)”는 뜻입니다. “Pray without ceasing.” (NASB) 기도를 중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 “Never stop praying (NLT)”이라고 나와 있는 성경도 있습니다. 기도를 절대로 중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기도에 대하여 좋은 말들이 있고. 성경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필요성을 실감(實感)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省察, reflection)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나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지금까지 잘 해결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새벽마다 나가서 무릎 꿇고 기도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큰 일 났다.” “난 지금 벼랑 끝에 몰려 있다.” “한발짝만 삐끗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새벽이 아니라 한밤중이라도 일어나서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겠습니까?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전화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큰 일 났습니다. 저 지금 교회인데요. 좀 와 주시겠어요?” 그래서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본당 안에 남편과 아내가 손을 꼭 잡고 울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이 사람이 Qualifying Exam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생전 기도하지 않던 사람들이, 정말 큰 일 났다 싶으니까 교회로 와서 이렇게 남편과 아내가 손을 꼭 붙잡고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달리더니 두 번째 시험에서 붙었습니다. 그러니까 또 기도하지 않습니다.
또 한가지 기도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는, 기도를 하고 싶어도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기도할 지 모른 것이 인간이 가진 ‘연약함 (weakness)’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 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로마서 8:26)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the Holy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For example, we don't know what God wants us to pray for. But the Holy Spirit prays for us with groanings that cannot be expressed in words.”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수단 (The Means of Grace)’으로 정해 놓은 두 번째 수단인 ‘기도’에 대하여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첫 번째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지난 주에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기도에 대하여 무슨 말씀을 나눌까 많이 생각하다가 선택한 본문 말씀이 빌립보서 4:6-9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 속에 기도에 대한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언제, 어떤 환경 속에서 기도해야 하는지,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는지, 그리고, 기도의 결과, 기도의 응답은 어떤 것인지, 기도에 대한 중요한 것들이 이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어떤 때 기도해야 합니까? “아무 것도 염려 (걱정)하지 말고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아뢰십시오 (6절)”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불 속에 던져질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는데, 너희를 더 소중하게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라.” (마태복음 6:30-31) 예수님의 말씀은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될 때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 아닙니까? 들풀도 입히시고, 참새로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지 않겠느냐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그런 것입니다.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될 때, 또 필요한 것들이 있을 때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한번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되는 상황 속에서, 필요한 것이 공급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 사람 저 사람 찾아 다니니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같은 환경 속에서 당연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소망을 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나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유력한 사람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eople.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rinces).” (시편 118:8-9)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Cursed are those who put their trust in mere humans, who rely on human strength and turn their hearts away from the Lord. But blessed are those who trust in the Lord and have made the Lord their hope and confidence.” (단순히 사람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화를 입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17:5, 7)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금방 알아 듣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거나 다른 사람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찾아가 봐야지. 나를 도와 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human strength (사람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급할 때 친구를 찾아가거나 유력한 사람을 찾아가서 듣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괜찮아요. 다 잘 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세요!”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래요!”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말은 이런 말들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듣는 이런 말들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둘째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6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할 때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생각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 상황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지금 걱정되고,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한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런데도 성경에는 그냥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감사와 함께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말씀 드리라, NIV)”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을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말씀 드리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를 위해서 해 주신 일들을 생각하고 감사드리라).” 감사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제일 만족스러운 번역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감사의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고, 다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a relationship with God)’라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기도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사람도 기도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한 사람, 멀어진 사람도 기도의 응답을 크게 기대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모세가 이런 기도를 잘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안다. 너는 나에게 은혜를 입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정말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면 주의 계획을 저에게 보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셔서 저도 주님을 알게 해 주시고 계속해서 주님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백성은 주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You have told me, ‘I know you by name, and I look favorably on you.’ If it is true that you look fa-vorably on me, let me know your ways so I may understand you more fully and continue to enjoy your favor. And remember that this nation is your very own people)” (출애굽기 32:12-13)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몹시 분노하셨습니다. 모세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을 알고 불안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실망한 나머지 이 백성을 버릴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때 모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그처럼 사랑하신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저도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인지를 보여 주는 아주 전형적인 기도입니다.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은 내 백성을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나를 위해서 해 주신 일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깨 말씀드리는 것은, 능력 있는 기도생활을 위해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끝으로 기도의 응답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어느 누구도 측량할 수 없는 평안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 가운데 풍성히 임할 것입니다 (7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응답 (the answered prayer)’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몸이 아픈 사람이 기도하면 꼭 병이 없어져야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입니까?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난 이제 죽는 구나!” 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이 생에 대한 아무 의욕이 없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들도 모두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람이 전과 아주 달라졌습니다. 얼굴이 밝아지고, 자기 생에 대한 감사가 생겼습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자기에게 좋은 가족들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자기에게 남은 시간들을 감사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런 것은 기도의 응답이 아닙니까? 꼭 병에 걸린 사람이 기적적으로 나아야 기도의 응답입니까?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Wilfred Peterson이란 사람이 이런 말을 말했습니다. 한번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Prayer does not change God, it changes us. It deepens insight, increases intuitive perception, expands consciousness, It transforms personality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깊은 통찰력을 갖게 하고, 사물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고, 의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2/23/2020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7
영적인 훈련 1 Train Yourself for Godliness
디모데전서 4:6-16
지난 주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두 가지 채널이 있는데, 이것을 “The Means of Grace (은혜의 수단)’라고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앞으로 두 번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글을 어디서 읽은 생각이 납니다. 크리스천들도 그럴까요? 크리스천도 그럴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되도록 빨리 내게 와 주었으면 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떠나고, 디도도 달마디아로 가 버렸습니다. 누가만이 내 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대가 올 때, 마가도 같이 데려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두기고는 내가 에베소로 보냈습니다. 드로아에 있을 때, 가보의 집에 두고 온 외투를 가져와 주십시오. 그리고 책, 특히 양피지에 쓴 것들을 잊지 말고 가져다 주십시오...... 겨울이 오기 전에 그대가 이 곳으로 왔으면 좋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9-13, 21)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속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때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일생에 가장 외롭고, 춥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입니다. 처음에는 여러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 사람, 두 사람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오직 한 사람 신실한 누가만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때 바울은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디모데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착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22). 디모데는 루스드라(Lystra)에 살던 청년인데,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생각만해도 마음이 즐거워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4). 지금 바울은 감옥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때 한번이라도 꼭 얼굴을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데모데였습니다. “되도록 빨리 내게 와 주었으면 합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그대가 이 곳으로 왔으면 좋겠습니다.....겨울이 오기 전에 이 곳으로 왔으면 좋겠습니다 (Timothy, please come as soon as you can.... Do your best to get here before winter).” 그가 얼마나 데모데를 보고 싶어했는지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디모데가 올 때 드로아에 있는 가보의 집 (Carpus at Troas)에 맡겨 둔 털옷을 가져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에게는 다가오는 겨울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추웠던가 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책, 특히 양피지에 쓴 것들을 잊지 말고 가져다 주십시오 (Also bring my books, and especially my papers①. / ①Greek especially the parchments).”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합니다. 이 책이 무슨 책인가 하고요. 그 때는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았을 때여서 ‘파피루스 (papyrus)’라는 원시적인 형태의 종이가 있었지만, 습기와 벌레에 약해서 ‘파피루스’에 쓴 문서들은 오래 보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 두루마리 중에 ‘파피루스’에 쓴 것들이 있는데, 대부분 많이 훼손되고 떨어져 나가서 읽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양피지’에 쓴 문서들은 비교적 오래 보관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잊지 말고 꼭 가지고 오라는 그 양피지에 쓴 문서 (책)는 성경 말씀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람이 외롭고, 힘들고, 약해져 있을 때 가장 그립고 찾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성경은 읽는 사람에게 힘을 주고, 위로를 주고,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상처를 싸매주고, 치유해 줍니다. 한국 TV를 보면 왜 그렇게 ‘힐링 (healing)’이라는 말이 많이 나와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healing’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상처 받은 사람의 마음을 싸매 주고, 치유해 줍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외롭고 힘든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찾은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내가 이 땅을 주리게 할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이다. 빵이 없어서 배고픈 것이 아니며, 물이 없어서 목마른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없어서 배고플 것이다. 그들이 지중해에서 사해까지 헤맬 것이요, 북쪽에서 동쪽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찾아다녀도 찾지 못할 것이다. 그 날에 아름다운 여자와 젊은 남자가 목이 말라 지칠 것이다.” (아모스 8:11-1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로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니,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도록 말씀의 채널을 모두 막아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헤맨다고 합니다. 청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헤매다가 지쳐 쓰러진다고 합니다.지금 많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도 청년들은 잘 걸리지 않습니다. 60대 이상된 허약한 사람들이 잘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이 넘치는 청년들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목이 말라 쓰러진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sustain합니다. 나를 어렵고 힘든 시간에 붙들어 주고, 지켜줍니다. 위기의 시간에도 그 위기를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줍니다. “그 때에 그들이 괴로움 가운데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그들의 괴로움으로부터 그들을 구해 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치료하시고, 무덤에서 그들을 건지셨습니다. 여호와의 변함 없는 사랑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사람들을 위해 행하신 그분의 놀라운 일들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시편 107:19-20)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Lord, help!’” they cried in their trouble, and he saved them from their distress. He sent out his word and healed them, snatching them from the door of death.”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치유의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가히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 (mystery)’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모든 유익함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디모데전서 4:13)”고 충고한 것은 그렇게 해야 우리 삶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양쪽에 날이 선 칼보다도 더 날카로워서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며,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감정까지 알아 냅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보여 드려야 합니다.” (히브리서 4:12-13)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word of God is alive and powerful. It is sharper than the sharpest two-edged sword, cutting between soul and spirit, between joint and marrow. It exposes our innermost thoughts and desires.” 직역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매우 파워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쪽에 날이 있는 잘 드는 칼보다도 더 잘드는 칼과 같아서 영혼과 영 사이를 자를 수 있고, 뼈와 뼈 속에 들어 있는 골수를 분리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드는 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 깊은 곳에 있는 생각과 갈망하는 것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비쳐 볼 수 있는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을 비쳐 보면 내 모습이 그대로 보입니다. 식사를 하고 나서도 한번 거울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브룩 쉴즈 (Brooke Shields)라는 미국의 유명한 영화 배우가 인터뷰 중에, 당신 같은 사람도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때가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 배우가 하는 말이 자기가 하루 종일 밖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봤는데, 앞 이빨에 커다란 시금치가 끼어 있었답니다. 그걸 보는 순간 죽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줄도 모르고,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그들 앞에서 웃었다는 생각을 하니까 죽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서 아침마다 자기를 비쳐 보는 사람은 하루 종일 자기 자신을 건강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시편 92:1)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쳐 보면 모든 것이 다 나옵니다. 안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내 영혼이 건강한지 다 나옵니다. 요즘에 MRI (Magnetic Resonance Imaging) 스캔이 유행합니다. MRI 스캔을 하면 우리 몸에 이상이 없는지 모든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MRI 스캔에 잡히지 않는 것도 다 잡힙니다. 아무리 첨단 MRI 장비라도 우리의 soul (혼)과 spirit (영) 사이에 있는 문제는 잡을 수 없습니다. 최첨단 MRI 장비를 가지고 스캔을 해도 아무 것도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는 모든 정보가 다 나옵니다.
여러분, 내 영혼을 건강하게 지켜 나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입니까?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평안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께 속한 자로 지켜 주시며, 여러분의 온몸을, 영과 혼과 육신 모두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그 날까지 아무 흠없이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Now may the God of peace make you holy in every way, and may your whole spirit and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until our Lord Jesus Christ comes again).” (데살로니가전서 5:23)
우리의 몸만 건강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열심히 운동하는 것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건강하게 관리할 수 있습니까? 나의 영혼이 건강한지, 병들었는지 객관적으로 조사하고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애매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영적인 훈련 (training for godliness)’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godliness’라는 말은 우리 말로 ‘경건’이라고 번역합니다. 달리 좋은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God (하나님)’에서 온 말입니다. 그 뜻은 ‘conforming to the laws and wishes of God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소원을 따르는 것)’입니다. ‘경건의 훈련’ 혹은 ‘영적인 훈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외우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누구든지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꺾여서 말라 버리는 가지와 같다. 사람들이 그 마른 가지를 불에 던져 태워 버릴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 내 제자인 것을 나타내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요한복음 15:5-8) 조금 긴 말씀이지만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7절)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산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산다는 말과 뜻이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사는 사람은 삶이 바뀝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살게 되면 너희가 비로소 내 제자가 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고요.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살게 하려는 노력, 예수님의 말씀이 나의 생각과 나의 뜻, 나의 의지를 지배하도록 하는 노력이 바로 ‘영적 훈련’이고 ‘경건의 훈련’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잘 되게 하는 훈련입니다. 이 훈련은 우리에게 익숙한 훈련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훈련을 중단하지 말고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을 건강하게 잘 지켜 나갈 수 있고, 풍성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2/16/2020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6
하나님의 은혜 3 Desiring God's Grace
디모데전서 4:4-9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 세 번째 설교입니다. 지금까지 두 번에 걸쳐 “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중요한가?” 그리고 “은혜 받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갖어야 하는가?” 오늘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지, 은혜 받는 길에 대하여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영어로 하면, ‘The Means of God’s Grace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수단)’입니다.
먼저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Breathing is the means that God uses to sustain life. So the command to breathe is the command to fall in with the purposes and patterns of God to give and sustain life. This is what I mean by the term, 'means of grace.' 'Grace' is the free keeping-work of God to sustain our spiritual life that leads to everlasting joy. The "means of grace" is our 'keeping ourselves in the love of God.' God's 'keeping' inspires and sustains our 'keeping.' His keeping is decisive and our keeping is dependent on his (숨을 쉬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숨을 쉬라는 명령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과 형식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수단’이란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지켜 나가기 위한 방법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하시는 일을 잘 보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 수 있습니다).” John Piper의 말입니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God has revealed certain channels through which he regularly pours out his favor. And we’re foolish not to take his word on it (하나님께서는 규칙적으로 그의 은혜를 부어 주시는 길들을 보여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매우 오래 전에 상영된 영화인데요. ‘아라비아의 로렌스 (Lawrence of Arabia)’라는 영화인데요. 1962년에 상영된 영국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아카데미 상을 7개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편집상, 음악상, 음향 효과상, 미술상)를 받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영국과 오스만 제국이 대치하고 있을 무렵 영국은 아랍인들의 참전 및 지원을 요구하기 위해 정보국 소속의 로렌스 중위 (피터 오툴)를 중동에 파견합니다. 로렌스는 분열된 아랍군을 통합하고 마침내 오스만 제국의 중동 거점인 다마스커스를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로 인해 아랍인들로부터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전쟁은 계속 되고, 결국 오스만 제국의 몰락이 가시화되면서 중동의 독립을 논의할 때가 되자 열강들은 독립의 약속을 내버리고 분할 점령의 음모를 기도합니다.
이에 로렌스는 영국 정부에 항의하며 아랍 민족들에게 단결을 호소하지만, 그들 또한 탐욕에 눈이 멀어 단결하지 않습니다. 결국 로렌스는 영국 정부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고 돌아갑니다. 로렌스는 계속해서 자신을 중동으로 다시 보내줄 것을 청하지만, 이미 로렌스가 돌아가기에는 상황이 너무 많이 바뀝니다. 중동 문제는 이미 열강들과 현지 기득권 세력 간의 정치적 협상거리가 되고 맙니다. 이런 현실을 깨달은 로렌스는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자신도 결국 소모품으로 이용 당했다는 배신감에 치를 떱니다. 결국 로렌스는 오토바이를 타고 엄청난 스피드를 내고 달리다가 마주 오는 자전거를 피하려고 하다가 스피드를 통제하지 못하고 결국 로렌스는 교통사고로 사망합니다. 이 장면이 첫 장면인데, 이 장면이 이 영화 전체가 주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스피드를 통제할 수 없어서 결국 사고로 이어진 것처럼, 국가 간의 협상의 무대인 전쟁에서 한 인간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로렌스를 향한 영국 정부 관리들의 비웃음, 그로 인해 정신적으로 무너져가는 로렌스의 광기 넘치는 눈빛 연기가 압권이라는 평을 듣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장면 중에 로렌스가 아랍 사람 몇 명을 데리고 런던을 방문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현대화된 영국 거리를 보면서 어리둥절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언제나 틀기만 하면 찬물이 나오는 콸콸 나오는 수도 꼭지 (the water faucets)였습니다. 그들이 로렌스에게 이 수도 꼭지를 사막에 가져 갈 수 있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들은 찬물이 나오는 수도 꼭지만 보았지, 이 수도 꼭지가 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무관심 하거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아무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요? 우리가 그냥 우리 방식대로 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지 그 방식을 알아서 그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John Piper 목사가 말하고자 하는 ‘The Means of God’s Grace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입니다.
오늘 읽은 디모데전서 4장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채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거룩해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we know it is made acceptable①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 ①Or made holy 여기서 ‘it’는 ‘everything God created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안에 저와 여러분도 들어 있습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은혜의 수단’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받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사람들로 성장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이 두가지 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길은 우리에게 익숙한 길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낯설고, 어색하고, 힘이 듭니다. 그래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니까 “스스로에게 경건의 훈련시키라 (Train yourself to be godly) (7절)”는 말씀이 나오고, 8절에는 다시 ‘경건의 훈련 (training for godliness)’이란 말이 나옵니다. 요즘에 ‘육체의 훈련 (Physical training)’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하고 (그 일들이 주로 앉아서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퇴근 길에 체육관에 들려서 운동하고, 샤워하고 집에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매일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몸이 그만큼 건강하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꾸준하게 운동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는데, 그만큼 ‘경건의 훈련’을 꾸준하게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Physical training is good, but training for godliness is much better, promising benefits in this life and in the life to come (몸을 훈련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경건의 훈련을 받는 것은 훨씬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경건의 훈련은 이 세상에서도 유익하고, 장차 올 세상에서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John Piper 목사의 말을 다시 여러분에게 리마인드 시켜 드립니다. “God has revealed certain channels through which he regularly pours out his favor. And we’re foolish not to take his word on it”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꾸준하게 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청년이 어떻게 깨끗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주의 말씀에 따라 살면 깨끗하게 살 수 있습니다 (How can a young person stay pure? By obeying your word).” (시편 119:9)
“조국이여, 안심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에 가면 ‘구국기도실’이 있는데, 그 기도실 들어가는 현관에 이런 말씀이 씌어 있습니다. 이렇게 이 나라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조국은 걱정할 것 없다는 말입니다. 갑자기 이 말이 생각난 것은, 여기 집을 떠나, 부모를 떠나 미국에 와서 유학생활 하는 청년들,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하겠습니까? 청년의 때에 얼마나 유혹이 많습니까? 자칫 한발만 잘못 디디면 곁길로 가기 쉬운 때가 청년의 때입니다. 이런 청년의 시기를 잘 붙잡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받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부모님들을 이렇게 안심시켜 드리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서 교회 생활 잘 하고 있고요. 말씀 훈련도 잘 받고 있습니다.”
또 하나, 여러분에게 소개할 말씀이 있습니다.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is useful to teach us what is true and to make us realize what is wrong in our lives. It corrects us when we are wrong and teaches us to do what is right. God uses it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 to do every good work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책입니다, 성경은 진실하고 무엇이 틀린 것인지 깨닫게 해 주는데 아주 좋은 책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사용하셔서 그의 자녀들을 모든 선한 일에 쓰임 받도록 준비 시키십니다).” (디모데후서 3:16-17)
마지막으로, 우리는 기도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도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기도가 쉽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색합니다. 더구나 지금같이 추운 새벽에는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어느 훈련이나 훈련 받을 때 힘들고 지루한 시간이 있습니다. 힘들다고 포기하지 말고 잘 견뎌내야 합니다. 피아노를 치거나, 악기 연주를 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한 곡을 잘 연주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힘든 연습, 힘든 훈련을 해야 합니까? 연습 또 연습, 지루하지만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곡을 마스터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생활도 훈련해야 합니다. 새벽기도 한번 나왔다가 기겁을 하면서 “난 새벽 기도 체질이 아니야!”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Jesus returned to the Mount of Olives, but early the next morning he was back again at the Temple. A crowd soon gathered, and he sat down and taught them (예수님은 올리브산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일찍 다시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이미 (그 시각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8:1-2) 예수님께서 밤에 올리브산으로 가셨다는 것은 거기서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밤에 기도하시고 이른 새벽에 다시 성전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훈련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기도가 자연스러웠습니다. 힘든 일이 아니라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 기도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었던 힘은 기도에서 왔습니다. 예수님께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시간이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께 흘러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This kind can be cast out only by prayer.” (마가복음 9:29) “왜 예수님은 이런 병을 낫게 하실 수 있고, 우리는 안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그랬습니다. “그 차이는 기도하고, 안 하고의 차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The Means of God’s Grace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길에 주목하고, 이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라고 말하는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9/2020 | 청지기주일/임명예배
나의 사명 The Ministry Assigned Me By The Lord Jesus
사도행전 20:17-27
여러분, 먼저 이 지도를 한번 보십시오. 바울의 제 3차 선교여행의 루트를 그린 것입니다. ‘드로아 (Troas)’ ‘앗소 (Assos)’ ‘미둘레네 (Mitylene)’ ‘기오 (Chios)’ ‘사모 (Samos)’ ‘밀레도 (Miletus)’ ‘고스 (Cos)’ 바울의 3차 전도여행에 나오는 ‘에게 바다 (Aegean Sea)’ 연안에 있는 지명들입니다. 보기에는 이 섬들이 터키 연안에 가까이 있어서 모두 터키 영토인 것처럼 보이는 데, ‘고스’는 현재 그리스 영토입니다.
2015년 9월 2일, 한 장의 사진이 전 세계 사람들을 울렸습니다. 터키의 휴양지 ‘보드룸 (Bodrum)’ 해변에 빨간 셔츠를 입은 한 어린 아기가 엎드러진 채 죽어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이 아기의 이름은 ‘아일란 쿠루디 (Alan Kurdi)’라는 세 살배기 아이였습니다. 한 시리아 난민 가족이 시리아 북부에 있는 작은 도시 ‘코바니 (Kobane)’를 출발해서 육로로 터키로 들어 간 후 거쳐 고무 보트를 타고 그리스 영토인 ‘고스 (Cos)’로 가던 중에 거센 파도에 배가 뒤집히면서 참변을 당한 것입니다. 이 가족은 처음에 캐나다로 이민을 가려고 했지만 거절을 당한 후에 그리스로 건너가 유럽으로 망명을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지명들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지명들이 2,000년 전에 사도 바울이 복음을 가지고 에게 바다를 건넜던 지도에 등장하는 이름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 지명들이 뜻하지 않게 ‘시리아 난민’이라는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지명들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뭔가 우리 마음을 때리고, 뭉클하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의 희망이라고 말하면서도 권력과 물질의 풍요로움과 평안 속에 안주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사이에 이곳은 모두 이슬람화 되고 말았습니다. 터키도 그렇고, 에게 바다의 섬과 도시들이 모두 이슬람화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과거와 현재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변화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유럽의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리아 난민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쿠루디 가족’이 무사히 ‘고스’ 섬에 도착하고, 그리스로 들어갔다고 해도 유럽의 국가들이 난민들을 거절하는 마당에 어떻게 되었을 지, 앞날을 보장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온 가족이 다 죽고, 혼자 살아남은 ‘쿠루디’의 아버지는 이제 나에게는 삶의 희망이 없다고 하면서 시리아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나라들도 모두 자기 나라에 대한 걱정을 먼저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난민들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라들이 일찍 복음을 받아들인 나라들 아닙니까? 우리에게 이런 역사에 대한 이해와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시아에 온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어떻게 생활해 왔는지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나는 언제나 겸손히,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전파하였습니다. 이제 나는 성령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 곳에서 내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어느 도시에 가든지 감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성령께서 내게 경고해 주셨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목숨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내가 떠난 뒤에 어떤 사람들이 사나운 이리처럼 교회에 들어와서 양 떼를 해치려 할 것을 나는 압니다. 또한 여러분 가운데서도 진리를 왜곡되게 말하고, 제자들을 유혹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는 사람들도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십시오. 내가 삼 년 동안을 밤낮으로,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쉬지 않고 교훈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능히 세울 수 있고 모든 거룩한 백성들과 함께 기업을 받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그 누구의 금이나 은이나 옷을 탐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저처럼 열심히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또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18-35절)
우리는 이 바울의 고백을 들으면서 몇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복음에 대한 열정을 배워야 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쁜 소식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들어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이 복음을 전해준 덕분에 내가 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간절한 생각을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전파하였습니다 (I never shrank back from telling you what you needed to hear, either publicly or in your homes).” (20절) “I didn't shrink from declaring all that God wants you to know.” (27절)
오늘 말씀에만 그렇게 나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전할 때마다 기도 중에 늘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전심으로 섬기는 하나님께서 나의 증인이 되십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여러분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까닭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을 나누어 주어 여러분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1:9-11) 이 말씀 속에 복음을 로마에 사는 크리스천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그의 간절함이 나와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이 간절함이 없습니다.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누고 싶은 열정이 없다고요.
로마서 12:2에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NIV).”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패턴은 어떤 것입니까? 다른 사람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이 세상의 패턴 중의 하나입니다. 부부 간에도 서로 사생활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끼어들 공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의 패턴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복음을 나눠야 합니다.
둘째로, 그는 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모든 희생을 감수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말합니다. “But my life is worth nothing to me unless I use it for finishing the work assigned me by the Lord Jesus-the work of telling others the Good News about the wonderful grace of God.” (24절)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반드시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 사명을 위해서 그의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2,000년 전에 갈릴리의 어부들은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말씀을 따르기 위하여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배와 그물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부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찬송 중에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I'd Rather Have Jesus)’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찬송은 Rhea. F. Miller (1894-1966, 미국) 라는 사람이 가사를 썼고, George Beverly Shea (1909-2013, 미국) 라는 사람이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찬송가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죠지 베버리 쉐아’는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학교를 쉬고 뉴욕에 있는 보험회사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 때 죠지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 NBC 방송국 프로그램 편성 부장을 알게 되었습니다. 죠지는 그 사람에게 자기가 노래에 소질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아마도 그 프로그램 담당자도 죠지의 굵직한 베이스 목소리가 호소력이 있고 매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NBC 스튜디오에서 1,500명의 방청객과 전국의 청취자들에게 ‘가라 모세 (Go Down Moses)’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청취자들은 굵직하고 호소력 있는 죠지의 목소리에 열광했습니다. 방송국 편성부장은 이 프로그램에 정기 출연을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죠지에게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나 죠지는 즉각 대답하지 않고 생각을 좀 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의 마음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희망에 부풀어 잠을 못 이룰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 있는 뭔가가 그로 하여금 쉽게 결정하지 못하도록 말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고민하는 것을 보고 시 한 편을 주면서 이 시를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아침에, 죠지는 그날 교회에서 부를 찬송을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 속을 떠나지 않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금이나 은보다 차라리 주 예수를 선택하고 싶다”는 어머니가 준 시에서 읽은 구절이었습니다. 그 순간 죠지는 자기도 모르게 피아노를 치면서 즉흥적으로 그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던 어머니가 달려와 아들을 껴안으면서 “엄마는 이 노래 너무 좋구나! 오늘 예배 시간에 이 노래를 불러 줄 수 있겠니?” 하고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찬송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NBC 방송극의 요청을 거부한 죠지는 그 후 빌리 그레이엄 크루세이드 (Billy Graham Crusade)의 요청을 받고 독창자로 세계를 돌면서 찬양을 했습니다. 그가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찬양을 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의 뜨거운 박수갈채도 예수님과 바꿀 수 없습니다.”
셋째로,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5절)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ou should remember the words of the Lord Jesus:‘I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 바울은 크리스천의 삶을 그 한마디로 요약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내 것을 주는 것입니다.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열정이 있어야 하고, 내게 맡기신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나의 소중한 것들을 내려 놓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1961년 1월 20일, John F Kennedy가 취임 연설에서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나라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묻지 말고,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 주십시오).” 우리는 교회를 향하여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묻지 말고, 내가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은 청지기 주일입니다. 여러분, 화면을 한번 봐 주십시오. ‘청지기 (Stewardship)’라는 말은 이제 잘 안 쓰는 말이 되었습니다만, 교회에서는 여전이 이 말을 사용합니다. ‘청지기직 (Stewardship)’이라는 말은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은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Give (주다)’ ‘Serve (섬기다)’ ‘Attend (출석하다. 참여하다)’ ‘Grow (성장하다)’ 이 네 가지가 각각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줌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재능과 자원 (resource)를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섬김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을 수 있는 모든 자리에 열심이 출석하고, 참여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성숙하고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런 크리스천이라야 자신의 재능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섬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