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8/18/2019 |
하나님의 아름다움 The Beauty of God's Glory
이사야 35:1-10
복음은 좁은 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아름다움의 길은 깨끗하고 거룩한 길이며 가장 쉽고 편안하고 안전한 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길을 대로라고 소개합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읽을수록 자신이 살아가는 세대를 분별하며 살아가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본 장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어두운 곳에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밝은 곳으로 나오는 장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부름을 받아 60년간 활동한 남쪽 유다의 예언자였습니다. 이사야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특별히 메시아에 대한 예언자이기도 합니다. 예언서의 특성이 인생의 답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본서도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고, 유다를 향하여 예언하며 더 나아가 다음 세대를 향한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시대와 다시 오실 재림의 시대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 장에 앞서 이사야 34장은 에돔에 대한 철저한 심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일을 나타냈지만 본문 35장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을 향한 회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 장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한 선지자의 선포로 인하여 주눅이 들어 있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소망과 희망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라.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을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27:4)"고 노래합니다. 여호와께 구하는 한 가지가 명예도, 부도, 장수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집에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여호와의 은총과 사랑을 구하며 주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로 살아가길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와 사막 같은 인생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생은 광야와 사막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은 비참함이라 선포하였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회복할 수 없는 땅, 광야와 사막과 같이 메마른 땅은 고통과 죽음뿐입니다. 성도들이 심판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하시는 일을 발견하게 되면 세상에 사는 자들과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본서 기자가 노래한 것처럼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1절)" 희망을 발견할 때 환란과 고통가운데서 견디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소망 가운데 희망을 노래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는 영광을 누립니다. 소망이 없던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디는 영광을 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랑이 끝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게 됩니다. 남편과 아내와 자녀를 향한 사랑이 끝이 나면서 고통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부은 바 된 사랑 안에 있기에 십년을 견디고도 사랑이 끝나지 않고 이 십년을 견디고 삼 십년을 견딥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은 풍성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과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최후까지 견딜 때 더욱 찬란해집니다. 주님과 함께 잘 견딘 자가 승리의 깃발을 꽂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기적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입니다. ‘레바논의 영광,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 은 인간의 힘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와 사막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땅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하심으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곳입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3절)"라고하신 것처럼 구약의 요셉은 종으로 팔렸고 종살이하는 중에 주인의 눈에 형통한 자로 보인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 39:2)" 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었습니다. 요셉은 원망하지 않았고 견디는 영광과 기쁨을 노래하며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담을 넘어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끝나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사람들은 요셉처럼 견뎌야 합니다. 배반도 견디고, 종살이도 견디고, 감옥 생활도 견디고 총리의 삶에서도 원수를 갚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였으니 (창 50:20)” 하며 도리어 형제들과 그들의 자녀를 기르겠다고 위로합니다.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는 이와 같은 일들의 연속입니다. 어떤 상황, 환경이 펼쳐진다 하여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삶의 현장을 만들어 가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기쁨을 주십니다. 교회 안에 기쁨이 가득하면 온 성도들은 즐거워집니다. 전도 받아온 사람이 처음 교회 와서 예배하고 난 후에 “난 하나도 안 기쁜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행복해 하지요?”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광을 누리는 곳입니다. 영적전투에서 승리하는 교회는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집니다.
2.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라.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소명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구원의 복된 소식은 성도들을 영적전쟁에서 승리하게 합니다. 성도들은 말씀 따라 살아 갈 때 영적전투에서 승리하고 참된 신앙인이 됩니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4절) 주님의 권세 아래 살아갈 때 가장 존귀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은 광야와 메마른 땅 사막과 같은 비참한 인생에게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하신 것에 대한 확신과 신뢰와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사명감을 갖게 되면 세상에서 어떤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살며 하늘나라의 존귀함과 가장 가까이 머무르며 여호와의 영광에 이르게 합니다. 사명자들은 겁내는 자들에게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4절)” 하시는 희망메시지를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고 갚아 주신다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이 영광이며 승리인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기 위해 말씀과 기도가 필수적입니다. 저는 청년 때부터 개척 초창기에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읽은 성경이 밤에 환상으로 보일 정도로 읽고 또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말씀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리는 말씀 속에서 메시아이신 예수를 만나야 하고 기도를 통해 이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사단과의 전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도발합니다. 우리 하나님을 신뢰하는 담대함을 얻기까지 기도하십시오. 당대에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면 자녀들이 깨어지지 않도록 자녀를 향한 보호 기도로 다음세대를 지키십시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꿈이 가득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본 절에서 여호와가 오시면 이루어질 구원의 현상을 생생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회복과 그 자녀들이 거하는 땅이 회복되는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복음은 과거로부터의 단절이고 새로운 시대를 향한 구원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이 임하기 전 인간은 비정상적이고 부패한상태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소경이며 못 듣고 벙어리이며 못 걷고 소망이 없고 절망적인 영적 상태인 이스라엘을 심판합니다.
구원의 복된 소식은 사망에서 들은 생명의 소식이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복음은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요.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저는 자가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가 노래하며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여 년 전에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새 시대를 여셨습니다. 과거와 단절된 구원의 기쁨은 새 시대를 향한 빛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3)?”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5)"고 하셨습니다. 사막에 연못이 생기고 메마른 땅은 물들의 못이 되고, 시랑의 눕는 곳이 갈대와 부들과 풀들이 나며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 안에서 살아가는 영광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갈대와 부들과 풀은 물가에서 자랍니다. 땅 끝까지 증거 되는 선교는 생명이 없는 곳에서 생명이 존재하는 지역으로 바뀌게 되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으로 생명이 번성하는 기쁨과 아름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지면 모든 종교는 통합되어가며 착하게 살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교회는 성령을 의지하여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함을 누려야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응답 받는 교회로 서야합니다. 성경은 성경을 통해 증언하며 예언을 성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사 40:8)" 하심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영원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누려라.
하나님을 떠나 악하여져 가는 세상이 스스로 악한 줄을 모르는 시대는 마지막 때입니다. 세상이 죄로 더러워져 가는데 더러워지는 줄도 모르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오직 교회가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합니다. 교회가 끊임없이 세워지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며 복음의 증인이 되는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많아져야 합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은 거룩한 길을 만나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8절)” 하였습니다. 거룩한 길은 마귀에게 포로 된 자들이 부패한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와야 하는 길입니다. 거룩한 길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그 길을 대로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우매한 자들은 걷지 못하는 길입니다. 구속함을 입은 자들만이 걷는 길입니다. 그 길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는 길입니다.
예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 하셨습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의 문이 열려지지 않습니다. 예수의 보혈로 깨끗하여 지는 길이기에 좁은 길이 된 것입니다. 예수의 보혈 안으로 들어설 때 그곳은 거룩한 길, 대로가 펼쳐집니다. 성경은 이 길을 깨끗한 길 시온의 대로라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사단의 덫에 걸리면 불결해지고 더럽게 살기로 결단해 버립니다. 죄인의 길은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픈 길입니다. 부정한 자들이 들어가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이 들어가며 죄를 짓는 상태에서 깨끗하지 못한 자들에게 열려진 길입니다. 그 길에는 사자가 있고 사나운 짐승이 생명을 위협하여 두렵고 무섭고 불안한 길입니다. 사람들은 길에 사자가 있어 움츠리고 고립되고 갇혀서 살게 됩니다. 사나운 세력을 가진 마귀들이기에 사람들을 파괴시키는 존재들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거룩한 길을 만들어 악한 마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성도들의 생명을 보존 시켜야 합니다. 성도들이 거룩한 길을 걷게 되면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들을 만나지 않습니다. 구속함을 입은 자들만을 위하여 있는 길이니 은총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사 35:10)"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복음의 소식을 듣고 노래하며 교회로 돌아올 것입니다. 여호와께 돌아온 자들은 영원한 희락과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것입니다. 성도들은 스스로 예수 안에서 영육 간에 깨끗하도록 쓸고 닦아야 합니다. 이 길에 서기위해서는 눈물의 기도 자리에 앉아야 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자로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거룩하게 할 때 대로로 행하며 영광의 길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만나는 복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니 그들을 살리기 위해 복음 들고 나가십시오.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살려내는 빛과 소금의 소명을 감당합시다. 이 거룩한 일에 부르심을 입었으니 빛으로 살아내는 기적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슬픔과 탄식이 교회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달아나게 하는 능력이 케임브리지 한인 교회에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8/11/2019 |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I) To Live As A Christian
요한복음 15:5-8
지난 주는 비교적 선선한 날씨여서 가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 듭니다. 보헤미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1875-1926)의 ‘가을날’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 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
이해하기에 난해(難解)한 시가 아니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릴케의 이 시를 좋아합니다. 한국의 김재혁 시인이 이 시에 대하여 이런 평을 했습니다. “시인은 여름의 완성에 이어 가을을 ‘진한 포도주의 단 맛’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여름의 완성은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라는 표현 속에 들어 있다. 동유럽과 북유럽의 기후에 익숙한 시인에게 남프랑스 같은 남국의 햇살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하루만 그 햇살 속에 있어 보아도 시인이 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 시인은 언어의 포도원을 가꾸는 주인이다. 시인은 외적으로는 가을의 풍요로움을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스스로에게 시인으로서의 사명을 다독거리는 중이다. 남국의 햇살을 받아 자신의 언어가 무르익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15장 말씀에 사람들은 ‘포도나무의 비유’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비유(比喩)’라는 말은 그리스 말로 ‘파라볼레 (parabole)’라는 말입니다. ‘나란히 놓는다’는 뜻입니다. 자동차를 파킹할 때 ‘패러렐 파킹 (parallel parking)’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로 턱과 ‘나란히’ 차를 파킹하는 것입니다. 운전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어려운 고난도의 기술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해 주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Jesus did not say anything to them without using a parable, 마태복음 13:34)”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천재였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영적인 진리를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들과 ‘나란히’ 놓음으로써 누구든지 쉽게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많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원리를 말씀하심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으로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포도나무가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 그 원리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원리는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몇가지로 정리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정원사의 ‘돌봄 (care)’이 있어야 합니다. 정원사가 돌보지 않고 그냥 내버려둬도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열매가 작고, 맛이 없고, 볼품이 없습니다. 정원사가 거름을 주고, 정원사가 부지런히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줘야 합니다.
요즘 메모리얼 드라이브를 운전하면 얼마나 경치가 좋은 지 모릅니다. 다운타운 쪽으로 드라이브 하면 찰스 강 폭이 넓어지면서 요트들이 떠 있는 것이 환상적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까요? 그리고 반대로, 메모리얼 드라이브에서 하바드 쪽으로 드라이브를 하면 양쪽의 아름드리 가로수들이 서로 맞닿아서 아치 모양을 만드는 멋진 풍경이 나옵니다. 그런 풍경이 더 길게 계속되지 않는 것이 아쉬울 정도입니다. 어떻게 이런 멋진 풍경을 만들 수 있을까요? 저절로 나무들이 자라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전문가들이 꾸준하게 불필요한 가지는 잘라주고 필요한 가지만 남겨 두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충분한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들이 뿌리로부터 ‘수액 (sap)’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물론 충분한 햇빛도 있어야 합니다. 이런 조건들이 갖추어 질 때 탐스러운 열매가 열립니다. 이런 조건이 갖추어 져도 금방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급한 마음을 갖지 말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릴케도 그런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릴케가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고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과일을 무르익도록 명령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 말은 나무 스스로의 힘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원사의 ‘돌봄’이 있어야 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이 충족(充足)되어야 그 때 비로소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원리와 우리가 열매를 맺는 원리를 나란히 놓고 우리 스스로 그 원리를 생각하고, 발견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 말씀을 하신 후에는 거의 예외 없이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Anyone with ears to hear should listen and understand, 마태복음 1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냥 내버려 두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처럼 우리도 ‘돌봄’을 받아야 합니다. 전문가의 손으로 포도나무의 불필요한 가지들을 잘라주듯이, 우리의 삶에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빌립보서 3장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을 좋아합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3:7-8)
미국이 자랑하는 사상가 중에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 보스턴)이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추구했던 사상은 ‘초월주의 (transcendentalism)’라는 한마디로 말 할 수 있습니다. ‘초월주의’는 1830년대부터 1840년대에 본격화된 산업혁명과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는 미국의 전환기에 나온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nature and humanity) 속에 하나님의 신성 (divinity)이 드러나 있음으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머슨은 친구 데이비드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1817-1862, 미국)에게 콩코드 (Concord)에 있는 ‘월든 폰드 (Walden Pond)’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거기서 2년 동안 살면서 ‘삶의 단순성과 독립성, 자기 반성 (a life of simplicity, independence, and self-reflection)’을 실험하도록 했습니다. 소로우가 2년에 걸쳐 자연 속에서 얻은 경험들은 ‘월든 (Walden)’이라는 책으로 나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에머슨의 사상에서뿐만 아니라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도 ‘삶의 단순성 (a life of simplicity)’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은 ‘삶의 복잡성 (a life of com-plexity)’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필요 없는 것들을 다 제거하고, 정말 필요한 것들만 소유하게 되면 삶이 단순해 집니다. 삶이 단순해 지면, 집중력이 생깁니다. 그만큼 생산성이 높아집니다. 한두가지 꼭 필요한 일에 삶의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 (Martha)에게 주신 말씀도 ‘삶의 단순성’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르다야! 너는 너무 많은 일 때문에 걱정하며 안절부절 하는구나. 정말 필요한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Martha, you are worried and upset about many things, but only one thing is needed).” (누가복음 10:41-42)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의 불필요한 것들을 잘라주듯이, 우리의 삶이 보다 단순해 져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참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님과 깊이 교제해야 합니다. 포도나무가 햇빛을 받고, 뿌리에서 양분을 빨라 올리듯이, 우리는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살아 계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여러분의 삶이 사랑 안에서 강해지고, 또 깊게 뿌리내려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한없고 넓으며, 얼마나 깊고도 높은지 진정으로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Then Christ will make his home in your hearts as you trust in him. Your roots will grow down into God's love and keep you strong. And may you have the power to understand, as all God's people should, how wide, how long, how high, and how deep his love is).” (에베소서 3:17-18)
예수님은 열매 맺는 삶의 비결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보십시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Those who remain in me, and I in them, will produce much fruit. For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But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you may ask for anything you want, and it will be granted).” (5, 7절)
열매 맺는 삶은 우리에게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열매 맺는 삶이 옵션 (option)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옵션이 아니라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하는 필수 사항 (requirement)입니다. 공부할 때 옵션 과목이 있습니다. 이런 과목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하지만, 졸업을 하기 위해서 필수과목들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열매를 맺는 것은 필수 사항입니다. 보세요.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 내 제자인 것을 나타내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When you produce much fruit, you are my true disciples. This brings great glory to my Father).” (8절) 열매를 맺어도 많이 맺어야 합니다. 제자로서 열매를 맺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신 것은 세상에 나가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선한 일’ ‘착한 일’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 (true or genuine disciples)’가 되기 원하는 사람은 이 말씀을 심각하게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나의 전문 영역에서, 나의 일터에서, 직장에서, 비즈니스 현장에서,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까?” 이렇게 묻고 기도하십시오. 제발 열매 맺지 못하는 크리스천으로 평생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 새벽 기도에서 누가복음 말씀을 읽고 있는데, 2:52 말씀이 감동적입니다. “Jesus grew in wisdom and in stature and in favor with God and all the people.” 열매 맺는 크리스천은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습니다.
8/4/2019 | 성령강림절 후 여덟째 주일
네가 로마에서 나를 증거해야 하리라 You Must Testify About Me In Rome
사도행전 26:24-32
기독교 역사에서 볼 때 가장 뛰어난 ‘변증론자’는 ‘저스틴 (Justin Martyr, AD 100-165)’이라고 말합니다. 젊었을 때 ‘저스틴’은 플라톤 (Plato, BC 427-347)의 철학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스틴’은 에베소 근처에 있는 해변에서 한 유대인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노인은 ‘저스틴’이 대답할 수 없는 많은 질문을 했고, ‘저스틴’은 이 질문에 나름대로 대답을 했습니다. ‘저스틴’의 말을 들은 이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대는 행함과 사랑이 없는 말쟁이에 지나지 않는 것 같소. 그대는 선의 실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리한 논쟁가, 교묘한 궤변론자가 되려는 것 같소.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 예언자들을 연구해 보시오. 하지만,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지혜와 계시를 주시기 전에는 이것들을 깨달을 수 없을 터이니 그대 앞에 광명의 문들이 열리게 해 달라고 기도 하시오.” 저스틴의 눈에 이 노인이야 말로 참된 철학을 아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날 이후 ‘저스틴’은 구약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을 성취한 구원자시요, 진리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는 시편 22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한 최초의 인물이었고, 이사야 52장과 5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발견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플라톤의 철학에 깊이 빠져 있었지만, 그의 철학적인 지식은 나중에 복음을 변증하는데 요긴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크리스천들이 비난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저런 크리스천들이 죄악과 쾌락 속에 빠져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확신하면서, 기독교는 플라톤의 철학을 넘어섰다고 확신했다고 합니다.
저스틴의 기독교 변증은 그의 저서 ‘The First Apology of Justin Martyr (순교자 저스틴의 첫 번째 변증)’ ‘The Second Apology of Justin Martyr (순교자 저스틴의 두 번째 변증)’이라는 두 권의 책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로마의 황제들을 대상으로 기독교를 변호했습니다. 그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Antoninus Pius, AD 86-161) 황제 때 로마에 학교를 세우고 제자들에게 기독교 변증론을 가르쳤고,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상가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D 121-180)’ 황제 때 다른 신들에게 숭배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참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를 ‘순교자 저스틴’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저스틴’을 1세기의 기독교 변증론자라고 말하는데, ‘저스틴’ 이전에 살았던 사도 바울 역시 탁월한 기독교 변증론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붙여 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말은 ‘복음의 변증론자 (an apologist for the gospel)’라는 말입니다. 그는 아테네에서 철학자들과 기독교의 진리에 대하여 토론했고 (사도행전 17:22-31),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전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줄 수 없다.” 저는 이 말이 바울에게 꼭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변증론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반대하는 사상이나 다른 이단 사상이 교회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진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기독교를 변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만큼 기독교의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유대교에 정통했고, 그 시대의 철학에도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믿었으니, 그분 안에서 계속 살아가십시오. 그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 위에 여러분의 삶을 계획하시길 바랍니다.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늘 감사한 생활을 하십시오. 헛된 말과 거짓 철학에 속아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것들은 모두 사람의 생각에서 비롯되었으며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결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므로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모든 성품은 이 땅에 계신 그리스도께 완전히 나타난 바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진정으로 완전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지배자와 권세자들의 머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골로새서 2:6-10) “And now, just as you accepted Christ Jesus as your Lord, you must continue to follow him. Let your roots grow down into him, and let your lives be built on him. Then your faith will grow strong in the truth you were taught, and you will overflow with thankfulness. Don't let anyone capture you with empty philosophies and high-sounding nonsense that come from human thinking and from the spiritual powers of this world, rather than from Christ. For in Christ lives all the fullness of God in a human body. So you also are complete through your union with Christ, who is the head over every ruler and authority.” (Colossians 2:6-10, New Living Translation) 당시에 교회로 침투해 들어오는 스토익 철학 사상 (Stoic philosophy)이나 ‘영지주의 (Gnosticism)’로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변호하는, 이 보다 더 완벽한 변증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바울의 탁월한 변증, 하나 더 볼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여러분은 이 세상의 헛된 규칙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행동하십니까? 왜 아직도 ‘이것을 붙잡으면 안 된다’, ‘저것은 맛보면 안 된다’, ‘만지지 마라’ 하는 등의 규칙에 얽매여 있는 것입니까? 이런 규칙들은 먹으면 없어지고, 쓰면 사라지고 마는 세상 것들에 대한 인간적인 규칙이요, 가르침일 뿐입니다.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훌륭해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다 사람들이 만든 종교적 관습들입니다. 거짓된 겸손으로 자기 몸을 괴롭히기만 할 뿐, 마음속에 파고드는 악한 욕망과 죄를 이겨 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골로새서 2:20-23) “You have died with Christ, and he has set you free from the spiritual powers of this world. So why do you keep on following the rules of the world, such as, ‘Don't handle! Don't taste! Don't touch!’? Such rules are mere human teachings about things that dete-riorate as we use them. These rules may seem wise because they require strong devotion, pious self-denial, and severe bodily discipline. But they provide no help in conquering a person's evil desires.” (Colossians 2:20-23, New Living Translation)
“변증론자로서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체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자리에서나 자신의 체험을 기꺼이 사람들과 나누었습니다. “나는 유대교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했을 뿐 아니라, 아예 없애 버리려고 했습니다. 나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다른 유대인들보다 더 열심히 유대교를 믿었고, 그 누구보다도 조상들의 전통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갈라디아서 1:13-14) “저는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조건을 더욱 많이 갖춘 사람입니다. 나는 태어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나는 베냐민 지파의 자손이며, 히브리인 중에서도 히브리인이며,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바리새인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따르는 데 있어서는 그 어느 누구도 허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완벽한 삶을 살았습니다.” (빌립보서 3:4-6) “나는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위임 받아 다마스커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곳을 향해 가다가 정오쯤 되어 하늘에서 밝은 빛이 저와 제 일행을 둘러 비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저는 히브리 말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도행전 26:12-14) 바울이 아그립바 왕 (King Agrippa) 앞에서 했던 변명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나를 따로 세우셔서 은혜로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게 보이셨습니다.” (갈라디아서 1:15-16) 바울에게 있어서 체험은 그를 어떤 고난의 환경 속에서도 굳건하게 지켜주는 버팀목이었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의 말에 사람을 설득하는 힘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변증을 들었던 총독 베스도 (Governor Festus)는 바울이 매우 유식한 사람인 것을 알고 “바울, 그대는 미쳤구나. 그대의 많은 학식이 그대를 미치게 했구나 (Paul, you are insane. Too much study has made you crazy) (사도행전 26:24)!”라고 큰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서 바울의 변명을 들었던 아그립바 왕은 “그대는 이 짧은 시간에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Do you think you can persuade me to become a Christian so quickly)?” (사도행전 26:28)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증하는 바울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흥분하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확신에 찬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말에 설득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셋째로, 바울은 변증론자로서 자신의 삶을 사랑했습니다. “나는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나의 목숨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But my life is worth nothing to me unless I use it for fin-ishing the work assigned me by the Lord Jesus--the work of telling others the Good News about the wonderful grace of God).” (사도행전 20:24)
이 말씀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1813-1873, 영국)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People talk of the sacrifice I have made in spending so much of my life in Africa. It is emphatically no sacrifice. Say rather it is a privilege (사람들은 내가 아프리카에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낸 것에 대하여 희생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단호하게 말하지만 이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특권이라고 말해 주십시오).” 저는 사도 바울 역시 복음의 변증론자로 살았던 자신의 삶에 대하여 리빙스턴과 똑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사도 바울은 1세기의 변증론자였고, 순교자 ‘저스틴’은 2세기의 변증론자였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변증론자들이 있을까요? 예, 많이 있습니다. ‘사이몬 그린리프 (Simon Greenleaf, 1783-1853, 미국)’는 탁월한 그 시대의 기독교 변증론자였습니다. ‘The Testimony of the Evangelists, 1842-1853)’라는 3권의 책을 남겼습니다. ‘C. S. 루이스 (Lewis, 1898-1963, 영국)’ 같은 사람은 보다 최근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The Mere Christianity (단순한 기독교), 1952)’라는 책을 남겼습니다. 무신론자였다가 크리스천이 된 배경을 살려 무신론자들에게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지 설명하는 명저(名著)입니다. ‘나니아 연대기 (The Chronicles of Narnia, 1955-1956에 출판된 7개의 시리즈 소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The Screwtape Letters, 1942)’도 기독교를 변증하는 그의 탁월한 책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기독교 변증론자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잘못된 사상으로부터, 기독교 이단들로부터, 신은 없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조롱하는 무신론자들의 공격으로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는 변증론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세기에 ‘저스틴’과 동시대에 살았던 ‘켈수스 (Celsus)’라는 그리스 철학자는 기독교를 공격했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활했다고 하지만, 누가 살아난 것을 보았는가? 미친 여자와 넋이 나간 사람들뿐이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켈수스’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사람들의 주장으로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변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부름을 받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대하여 모르고, 기독교의 진리를 모른다면 우리는 기독교를 변호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7/28/2019 | 성령강림절 후 일곱째 주일
하나님의 전략적인 도시 고린도 God’s Strategic City, Corinth
사도행전 18:1-11
7/21/2019 | 성령강림절 후 여섯째 주일
유럽 대륙으로 건너 간 복음 The Gospel Spread Across To The European Continent
사도행전 16:6-15
바울과 바나바는 제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2차 전도여행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상치 않았던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친히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예루살렘 공의회를 준비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편지를 가지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2차 선교 여행을 준비하던 어느날,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집니다. 성경에는 “두 사람이 심히 다투어 두 사람이 갈라서게 되었다 (Their disagree¬ment was so sharp that they separated, 사도행전 15:39)”고 했습니다. 그 때부터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따로 전도여행을 합니다. 바울과 갈라선 바나바의 활약상은 아쉽게도 사도행전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바울에게 초점을 맞추고,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더욱 조심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시리아 (Syria)와 길리기아 (Cilicia)를 거쳐 아시아 (Asia)로 가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막힌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셨기 때문에 (because the Holy Spirit had prevented them from preaching the word in the province of Asia at that time, 6절)’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아시아로 들어가지 못하고 ‘부르기아 (Phrygia)’와 ‘갈라디아 (Galatia)’를 거쳐 ‘무시아 (Mysia)’로 갔다가 북쪽 내륙 ‘비두니아 (Bithynia)’로 가려고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성령께서 그 계획을 막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의 영이 그곳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but again the Spirit of Jesus did not allow them to go there, 7절)”고 했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바울과 실라는 ‘무시아’의 항구도시 ‘드로아 (Troas)’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성경 말씀을 읽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거룩하고, 참되며,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의 말씀이다. 그분께서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내가 네 앞에 문을 열어 두었으니, 아무도 그 문을 닫지 못할 것이다 (This is the message from the one who is holy and true, the one who has the key of David. What he opens, no one can close; and what he closes, no one can open....I have opened a door for you that no one can close).” (요한계시록 3:7-8)
하나님께서 닫으신 문은 아무도 열 수가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문을 억지로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문을 열어 주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성경에 ‘발람의 길 (the footsteps of Balaam, 베드로후서 2:15)’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 모압 (Moab)이라는 나라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 때 모압의 왕은 ‘발락 (Balak)’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발락은 이스라엘 민족이 모압 땅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발람’이라는 신통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불러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발람’에게 백지 수표를 주면서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 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라고 합니다. 여차저차해서 결국 ‘발람’은 ‘발락’이 보낸 사람들을 따라갑니다. ‘발람’은 입으로는 “발락 왕이 은과 금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집을 준다 해도, 나는 내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그 민족을 저주하지 말라고 하시는 명령을 어길 수 없습니다 (민수기 22:18)”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벌써 발락이 제시하는 돈의 유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시켜 ‘발람’의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그 때 ‘발람’은 나귀를 타고 좁은 담장 길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나귀의 눈에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들고 길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귀가 천사의 칼을 피하려고 담장에 바싹 붙는 바람에 타고 있던 ‘발람’의 발에 상처가 났습니다. 화가 난 ‘발람’이 나귀를 때립니다. 나귀가 다시 길을 가는데, 아주 좁은 길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나귀의 눈에는 하나님의 천사가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귀는 피할 길이 없어 가다 말고 털썩 주저 앉았습니다. 화가 난 ‘발람’이 또 나귀를 때립니다. 그랬더니 나귀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를 때립니까?” 하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화가 난 ‘발람’은 “네가 길을 제대로 가지 않으니까 때리는 것이 아니냐?” 나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발람’에게 말합니다. “네가 하는 일이 악하기에, 내가 너를 막으려고 온 것이다. 만약 나귀가 비켜서지 않았다면, 너는 벌써 내 칼에 죽었을 것이다.” (민수기 22:32-33)
이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발람’이 가는 길을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발람’은 나귀가 말을 하는 이 황당한 일을 겪으면서 ‘발람’은 하나님께서 내가 가는 길을 막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포기할 수 없는 욕심 때문에 계속 그 길을 갑니다. 성경은 이것을 ‘발람의 길’이라고 합니다. 그 길이 파멸의 길인지 모르고 계속해서 그 길을 갑니다. 이 말씀 속에 ‘발람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한 길을 막으시는 것은 다른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한 문을 닫으시고 다른 문을 열어 주시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것은 제가 지금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얻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저의 삶 속에서도 이 문을 닫으시고 다른 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아시아 선교의 문을 막으신 하나님은 유럽 선교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길이 막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바울에게 마케도니아 사람에 대한 환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나타나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9절)”라고 애원하는 환상을 본 것입니다. 이 환상을 본 바울은 이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유럽 선교의 문을 열어 주시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유럽 선교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무슨 증거가 있습니까?” 저는 성경 속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세요. “바울이 그 환상을 본 뒤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확신하고는 즉시 마케도니아 (Macedonia)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우리는 배를 타고 드로아 (Troas)를 떠나 곧장 사모드라게 (Samothrace)로 갔다가 이튿날, 네압볼리 (Neapolis)로 갔습니다. 다시 네압볼리를 떠나서 로마의 식민지요, 마케도니아 지방의 중심 도시인 빌립보 (Philippi)로 갔습니다. 우리는 며칠 동안, 그 곳에서 머물렀습니다.” (10-12절) 그렇게 꽉 막혀 있던 길이 확 뚫리지 않습니까? 일사천리(一瀉千里)로 길이 열립니다. 또 하나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이미 빌립보 선교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 (The Mission of God)’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 (Yahweh-Yireh, 창세기 22:14)’이신 하나님은 때가 되어 아시아 선교를 막으시고 유럽 선교의 문을 여셨습니다.
지금까지 아시아에 머물던 복음이 마케도니아 지방의 중심 도시 ‘빌립보 (Philippi)’에 전해졌습니다. 몇 년 전 터키 성지순례를 하면서 ‘에게 바다 (Aegean Sea)’를 보았습니다. ‘에게 바다’는 해협(海峽, straits)이니까요. 멀리 마케도니아가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좁은 바다입니다. 저희 성지 순례팀은 소형 배를 타고 ‘에게 바다’를 한바퀴 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느껴졌는지 모르지만, 그 때 제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2,000년 전에 바로 이 ‘에게 바다’를 건너서 마케도니아 빌립보로 건너갔겠구나 생각하니까 정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여러분, 이 글을 한번 보십시오. “A Christian historian said that the ship that carried the Apostle Paul carried the history of the world in it. Arnold Toynbee said in his ‘A Study of History’ that, when a wooden boat carried the Apostle Paul from Troas of Asia Minor to Macedonia, it moved the center of the world from the birthplace of civilization to Mediterranean and to the European Continent (한 기독교 역사가는 사도 바울을 태웠던 그 배는 그 배 안에 세계 역사를 태우고 있었다고 했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작은 목선이 소아시아 드로아에서 사도 바울을 태웠을 때, 세계의 중심은 문명의 발상지로부터 지중해와 유럽 대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Our Daily Bread, 9/11/2011) 토인비의 말은, 복음이 유럽 대륙에 전해 짐으로 세계 역사가 바뀌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 때까지 변방이었던 유럽 땅이 세계의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선교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문명사적으로 볼 때, 빌립보 선교는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일정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내가 원하는 뜻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한 쪽 문을 닫으시고 다른 문을 열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는 배를 탔을 때, 모든 일이 순탄하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모이는 기도처를 찾았을 때 그곳에 이미 ‘루디아 (Lydia)’라는 한 여자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루디아가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One of them was Lydia from Thyatira, a merchant of expensive purple cloth, who worshiped God. As she listened to us, the Lord opened her heart, and she accepted what Paul was saying).” (14절)
소름 돋는 일이 있습니다. 바울이 루디아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자매님은 고향이 어디세요?” “예, 저는 두아디라 사람이예요.” “뭐라고요? 두아디라 출신이라고요?” 여러분, 두아디라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소아시아에 있습니다. 바울이 들어가려고 했다가 들어가지 못한 곳에 있습니다. 뜻하지 않게 빌립보에서 두아디라 출신 루디아를 만난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든든한 두아디라 출신 루디아를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여차여차해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시아 선교의 문을 닫으시고 유럽 선교의 문을 열어 주셨는데, 그리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 같았는데,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다니 말이 됩니까?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 밖에 없는데, 감옥에 갇히다니, 이런 일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났다면 어떻게 이 일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빌립보 감옥의 이름 없는 간수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그 간수 한 사람을 구원하는 과정 속에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수감되고 고문을 받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집에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었다 (16:33)”는 말씀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많은 고문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것이 곧 우리에게 고난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고난을 겪게 된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말 속에 지금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난과 절망과 아픔과 실패와 기타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석하는 열쇠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온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16:31) 간수와 그 집안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성경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고작 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이런 일들이 있었단 말입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에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그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 주신 분입니다. 자기 아들의 생명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 바울을 빌립보로 가는 목선을 타게 만들었고, 그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기에 수많은 유럽 대륙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은 유럽 문명을 일으키고, 세계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