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6/9/2019 | 성령강림절
예언과 환상과 꿈 Prophecy, Vision And Dreams
사도행전 2:14-21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자기들이 구하는 능력 (power)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 혹은 모르고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구하는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보세요. 이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했다는 말씀이 사도행전 1:14에 나옵니다. 그 앞에 나오는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만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리고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6/2/2019 | 부활절 일곱째 주일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 Stop Doubting And Believe
요한복음 20:19-29
제가 이런 말을 길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 없는 사람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앞이나 뒤에 무엇이 붙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역에 유익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일에 큰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의심장이’라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회의론자 (skepticist)’라고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고, 거기에 네 손가락을 넣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라는 사람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습니다. 도마가 지금은 “난 믿을 수 없어!” 이렇게 말하지만, 한번만 확인되면 금방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확인한 도마는 그 자리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My Lord and my God)!”이라고 고백합니다. 도마에게서 ‘un~’자가 떨어져 나가고, ‘~less’라는 글자가 떨어져 나가고, 하나님의 일에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5/26/2019 | 야외예배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This Is My Father's World
시편 8편
오늘은 전체적으로 햇볕이 나고, 낮 최고 기온이 84도나 된다고 합니다. 좀 더운 날씨이긴 합니다만, 이렇게 비가 오지 않고 춥지 않은 날도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여호와 우리 주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린 장언한지요?” 그랬습니다, 똑 같은 말씀이 마지막 절에도 나옵니다. “O LORD, our Lord, your majestic name fills the earth! Your glory is higher than the heavens.” 직역하면, “오 주님 주님의 위엄 있는 이름이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주님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습니다” 이렇게 되겠네요. 예전 개역성경에는 이 말씀이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아까 우리가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야외예배 때 부르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찬송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저께 우연히 이 찬송을 듣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찬송의 3절 가사가 의외의 가사인 것입니다. 이 찬송은 Maltbie Davenport Babcock (1858-1901, 미국)이라는 분이 찬송시를 썼습니다. 이 사람은 뉴욕 Lockport의 목사였습니다. 이 목사님에 대한 기사를 찾아 봤더니, 아주 탁월한 설교자였다고 합니다. 그의 설교는 교회 내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고 합니다. Babcock 목사님은 하이킹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특히 Lockport 근처의 깎아 지른 듯한 절벽들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절벽 위에 올라가서 보면 놀라운 전경이 펼쳐지는데, 숲도 보이고, 농장들도 보이고 과수원도 보이고, 저 멀리 호수도 보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시적 영감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Babcock 목사님은 자주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나는 나의 아버지의 세상을 보러 간다”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찬양시의 제목이 “This Is My Father’s World (이것이 나의 아버지께서 지으신 세상입니다)”입니다.
This is my father's world.
이것이 내 아버지의 세상,
Oh, let me never forget
나는 결코 잊지 않겠네
That though the wrong seems oft so strong.
종종 악이 너무나 강하게 보일지라도
God is the ruler yet
하나님이 지금도 통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This is my father's world; Why should my heart be sad?
이곳이 내 아버지의 세상인데, 왜 내가 슬퍼해야 할까?
The Lord is king, let the heavens ring; God reigns, let the earth be glad
주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니, 하늘은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니 땅은 즐거워하라.
Babcock 목사님에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왜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는 이렇게 악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을까?” Babcock 목사님은 이런 결론을 얻었습니다. “비록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 악이 만연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을 자기 뜻대로 통치하고 계신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The battle is not done yet). 그러니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고 슬퍼할 필요가 없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시편 8편 말씀의 은혜를 잠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편 8편 속에도 뭔가 우리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썼다고 합니다. 이 시편은 “지휘자를 따라 기쁜 곡조로 부른 노래”라고 나와 있고 “To be accompanied by a stringed instrument”라고 나와 있습니다. 다윗은 본래 수금 연주의 천재였습니다. 수금은 작은 사이즈의 하프(harp)와 같은 악기입니다. 사울에게 다윗을 처음 소개할 때 다윗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베들레헴의 이새에게 수금 을 연주하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저는 그 사람이 수금을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용감하고 싸움을 잘하며 말도 잘하고 잘 생겼습니다. 게다가 여호와께서 그 사람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사무엘상 16:18) 이렇게 해서 다윗이 사울에게 발탁되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저는 오늘 이 다윗의 시편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크게 두 가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참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의 주님이시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장엄한지요 (1, 9절)?”라고 했습니다. 누가 꾸민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연은 아름다울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음악이나 그림 같은 예술품 속에 그 작가의 혼이 들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 속에 하나님의 신성 (神性)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만물 속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드러나 있다 (로마서 1:20)”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아름다운 날씨와 자연을 한번 둘러 보십시오. 모두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입니다. 이것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있는 그대로 때가 되면 싹이 나고, 잎이 돋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억지로 꾸미거나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씀은,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4-6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는 사람을 돌보아 주시는지요? 주님께서는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그 머리에 영광과 존엄의 왕관을 씌우셨습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들을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et you made man a little lower than Elohim.” ‘Elohim (엘로힘)’이란 말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엘로힘’ ‘엘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아도나이 (주님)’ 같은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깨뜨리는 이유이고, 이것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는 무심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야! 내가 결정하는 거야! 아무도 간섭할 수 없어!”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누가 뭐래?”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한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위치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로 만드셨다고 해서 우리의 존재가 열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보세요. 다윗이 이 시편을 쓰면서 발견한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그 머리에 영광과 존엄의 왕관을 씌워 주신 존재입니다 (5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습니다. “You gave them charge of everything you made (6절)”라고 했습니다. ‘챠지 (charge)’라는 말은 돌본다,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을 계속해서 아름답게 돌보라는 책임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분수를 아는 겸손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입니다. 얼마 전에 생명 복제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잘 모르지만 복제산업이 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주로 개에 대한 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국내보다는 해외로부터 많은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행한 것은 그렇게 복제해서 태어난 개들이 원래 개와 똑 같이 생기긴 했지만 어딘가 이상하다고 합니다. 행동이 좀 이상하고, 힘이 없고, 병에 잘 걸리고 일찍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참 잘 되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생명을 창조하는 일은 하나님의 영역인데, 과학의 힘으로 생명을 창조할 때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참 두렵습니다. 인간이 자기 본분인 겸손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을 돌보는 ‘charger (챠져)’로서의 역할을 회복할 때 인간이 사는 세상도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5/19/2019 | 부활절 다섯째 주일
그러면, 내 양을 먹여라 Then Feed My Lambs
요한복음 21:12-19
5/12/2019 | 부활절 넷째 주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The Two Disciples On The Road To Emmaus
누가복음 24:13-27
오늘은 부활절 넷째 주일입니다. 영어로 하면, ‘Fourth Sunday of Easter’입니다. 부활절은 이미 끝난 행사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 날 (that same day)’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그 날이었습니다. 시간이 며칠은 지난 것 같은데, 여자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 날’은 매우 길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날’ 두 사람이 ‘엠마오 (Emmaus)’로 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약 11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두 사람은 ‘엠마오’로 가고 있던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엠마오’ 출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13절). 그리고,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글로바 (Cleopas)’라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지명(地名)과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은 이 이야기의 사실성(事實性, historicity)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얘기하면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던 석양(夕陽, sunset)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그림들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제일 유명한 그림은 로버트 췬트 (Robert Zünd, 1826-1909, 스위스)가 그린 ‘The Road to Emmaus (엠마오로 가는 길)’입니다. 세 사람이 길을 걷고 있는, 해가 저물어 가는, 그 때의 상황을 잘 묘사했습니다. 가운데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뭔가를 손짓을 해 가면서 말씀하시고, 두 사람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씀을 듣고 있는 장면입니다. 전체적인 그림의 분위기는 사방이 적막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분위기입니다.
Robert Zünd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삶의 희망이 끊어진 사람들의 심정을 이렇게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기대했습니다 (We had hoped he was the Messiah who had come to rescue Israel).” (21절) 이 말에서 그 두 사람의 절망을 느낄 수 있습니까? 이 두 사람은 예수님에게 모든 소망을 두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고, 그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도 똑 같은 제자들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We have left all we had to follow you).” (누가복음 18:28) “Behold, we have left our own [homes,] and followed You." Homes를 버렸다고 하면 집이나 재산도 포함되지만, 사랑하는 식구들도 포함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그들의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예수님께 모든 희망을 두었고, 나중에 모든 것을 보상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가졌던 상실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마가는 그 때 제자들의 상실감을 이렇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갔을 때) 제자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The disciples were grieving and weeping).” (마가복음 16:10)
누가는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을 때, 두 사람은 두 사람은 슬픈 기색을 하고 멈춰 섰다고 했습니다 (They stopped short, sadness written across their faces., 17절). 이 말 속에 두 사람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에 와 닿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슬픔과 절망을 우리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배신하고, 믿었던 것들이 틀어졌을 때, 내가 그토록 기대했던 것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영영 떠났을 때, 우리도 상실감을 경험합니다. 내 인생이 모두 끝난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어떻게 슬픔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세월이 약이라고 합니다. 그냥 살다 보면 다 잊혀진다고 합니다. 제가 경험해 보니까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금방 죽을 것 같더니 시간이 좀 지나면 진정이 됩니다. 그런데, 세월이 약이긴 하지만, 또 다시 그런 슬픔의 순간, 절망의 순간이 찾아 옵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로 유명한 존 뉴톤 (John Newton, 1725-1807, 영국) 목사님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없어져도 누가복음 24장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만큼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존 뉴톤 목사님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도 위로의 말씀이 되고, 치유의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상실감과 절망감에 사로 잡힌 두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동행하신 것입니다. 비록 처음부터 알아 보지는 못했지만, 길을 가다가 만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정말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과 절망의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이런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다시 올 것이다 (No, I will not abandon you as orphans- I will come to you).” (요한복음 14:18) 이 말씀대로 주님은 자기 제자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힘들어 할 때, 슬픔과 절망의 시간에 찾아 오셨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 (effective) 할까요? 하고 말고요. 성경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말씀이 우리를 위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Now these things happened as examples for us (이 같은 일들이 일어난 것은 (성경에 기록된 것은) 모두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6)
둘째로,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교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게 됩니다. 여기서 ‘교제(交際, fellowship)’라는 말은 주님과의 교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말씀을 풀어 가르쳐 주셨습니다. 메시아에게 십자가의 죽음이 당연하다는 것,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5-27절).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았습니까 (Didn't our hearts burn within us as he talked with us on the road and explained the Scriptures to us)?”
우리 마음에 불이 붙고,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는 순간은 우리의 눈이 새롭게 떠지는 순간입니다. 지금까지 믿고 있던 Old Paradigm이 무너지고 New Paradigm이 주어졌을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바울은 이 경험을 ‘enlightenment (깨달음)’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I pray that the eyes of your heart may be enlightened (나는 여러분의 마음이 눈이 밝아지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에베소서 1: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풀어 주실 때 두 사람은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이 이상한 말이 아니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었구나!” “우리가 길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었구나!” 말씀 안에서 교제하는 삶이 없으면 끊임없이 의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교제의 삶이 있으면 그 의심이 믿음으로 바뀝니다. 우리 믿음은 교제의 삶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견고해집니다.
셋째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personal encounter)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이깁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여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 (요한복음 16:33)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긴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서 해답을 찾지 못하고 힘들어합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과 내가 부활의 삶을 사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어떻게 내가 용서 받는 것이 됩니까? 오늘 여러분 중에도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15장에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 (the firstfruits of resurrection)’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0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첫 열매’가 있으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열매가 있을 것 아닙니까? 바울은 23절에서 ‘those who belong to Christ (NIV, NLT)’ ‘those who are Christ's (NKJV)’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나중 열매들이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를 용서 받고, 이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사람을 보세요. 슬픔과 절망으로 고향으로 내려 가던 사람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달려갑니다. 예루살렘에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아직 불안과 공포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기울어져 가는 석양을 걷던 사람들이 동터 오는 새벽 길을 달려갑니다. 이 사람들이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신학적인 상상력이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쓴 서신서 (epistles)에 그의 뛰어난 신학적인 상상력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5:2-5이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절대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 We can rejoice, too, when we run into problems and trials, for we know that they help us develop endurance. And endurance develops strength of character, and character strengthens our confident hope of salvation. And this hope will not lead to disappointment. For we know how dearly God loves us, because he has given us the Holy Spirit to fill our hearts with his love.” (New Living Translation)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의 공식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의 슬픔과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신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힘들어 하고, 슬퍼하고, 절망할 때, 그 자리에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렇다면, 힘들고 어려울 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슬프고 절망스러운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신뢰하면 됩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면 됩니다. 곧 주님께서 나의 슬픔과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문제를 만나고 시련을 만날 때 절망하지 않으면 됩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번에 이 문제를 통해서 나를 단련 시키시는구나. 이 시련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더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성장 시키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시각이고, 크리스천의 삶의 공식입니다. 이런 사람은 더 이상 저물어가는 석양 길을 걷지 않고 동터 오는 새벽길을 걷습니다.